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새벽까지 심장 타는 냄새

‘너무 ( )해서 ( ) 할 수가 없’는 한강의 소설집 <노랑무늬영원>
등록 2012-11-23 11:01 수정 2020-05-02 19:27

평론가의 요약을 작가는 환영하지 않는다. 작가는 자신의 책이 요약되는 순간, 그 요약 속에 포함되는 데 성공한 것과 실패한 것의 운명을 생각하는 데 사로잡히고, 전자의 행운을 기뻐하기보다는 후자의 불운을 서운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요약은 괜찮을 것이다. 인터뷰를 보니 작가 자신의 생각도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다. 달리 읽기가 힘들 정도로 이 책의 관심사는 또렷하다. 그것은 ‘상처와 회복’이다. 상처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회복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으로 나뉠 수 있다. 그렇다면 경우의 수는 최소 넷이겠지만, 섬세한 작가는 이런 산수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안다. 모든 상처와 회복은 유일무이한 것이기 때문에 경우의 수는 결국 무한일 테니까. 한강의 새 소설집 (문학과지성사)에는 일곱 개의 유일무이한 ‘상처와 회복’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상처받은 자의 내면을 한강보다 더 잘 그려내는 작가가 있는가 생각해보면 말문이 막힌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갈대밭에 고꾸라져 피부가 벗겨지고 뼈가 부러진 주인공이 제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이 여기서 끝장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대목(34쪽)을 보라. 그리고 상처가 주는 고통 때문에 주인공이 꾸게 된 악몽을 네 단락으로 된 시처럼 서술한 대목(49쪽)을 보라. 이 대목들을 보았으면 이제는 그냥 아무 데나 펼쳐보라. 그녀는 상처를 감각으로 치환하는 데 경이롭도록 능하다. “사람 몸을 태울 때 가장 늦게까지 타는 게 뭔지 알아? 심장이야. 저녁에 불을 붙인 몸이 밤새 타더라. 새벽에 그 자리에 가보니까, 심장만 남아서 지글지글 끓고 있었어.”(109쪽) 한강의 좋은 소설들에서는 그 심장 타는 냄새가 난다. 이런 상처를 입었는데 어떻게 회복이 가능한가?

이 물음과 관련해서 나는 ‘에우로파’라는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 그는 그녀를 10년 전에 처음 만났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지만 둘은 서로의 사생활을 묻지 않으면서 친구로 지낸다. 그런데 6년이 지난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로 무너진다. 결혼생활이 불행해 보였는데 특히 최근에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것. 그녀는 그가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가 한 말은 이렇다. “나는 너처럼 되고 싶어.”(76쪽) 그는 6년 전 그녀를 소개받은 날 자신의 성정체성이 여성임을 깨달았지만 그 진실을 회피해왔다. “비겁한 사람의 인생이란 긴 형벌과 다름없는 거야.”(77쪽) 그는 이제 ‘자기 자신’이 되기로 결심하고, 본래 친구였던 그와 그녀는 자매가 된다. 그녀는 그가 여자가 될 수 있도록 돕고, 그는 그런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는 이혼 뒤 음악을 다시 시작해서 자신의 상처와 맞서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세상의 편견과 맞선다. 그러나 그들도 서로 상처를 입히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럴 줄 알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가장 알맞은 거리를 유지한다. 이 거리가 만들어내는 이 소설의 톤은 아름답다.

이 소설에는, 입을 틀어막아도 새나오는 신음 같은 문장들 대신에, 가장 알맞은 거리를 두고 둘이 함께 부르는 회복의 노래가 있다.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암석 대신 얼음으로 덮인 달// 지구의 달처럼 하얗지만/ 지구의 달처럼/ 흉터가 패지 않은 달// 아무리 커다란 운석이 부딪친 자리도/ 얼음이 녹으며 차올라/ 거짓말처럼 다시 둥글어지는,/ 거대한 유리알같이 매끄러워지는// 에우로파,/ 얼어붙은 에우로파/ 너는 목성의 달// 내 삶을 끝까지 살아낸다 해도/ 결국 만질 수 없을 차가움.”(88~89쪽)

이 소설의 끝은 별로 낙관적이지 않지만 나는 이 소설의 가장 따뜻한 페이지들을 접으면서 이런 회복의 주문(呪文)을 여기에 적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싶은 시절이므로. “그러지 마.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뿐인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게 설계된 것뿐인걸. 존재하지 않는 괴물 같은 죄 위로 얇은 천을 씌워놓고, 목숨처럼 껴안고 살아가지 마. 잠 못 이루지 마. 악몽을 꾸지 마. 누구의 비난도 믿지 마.”(127쪽)

알다시피 영어에는 ‘too 형용사 to 동사’ 구문이 있다. 너무 ( )해서 ( )할 수가 없다, 정도로 옮긴다. 한강의 소설과 이 구문이 어쩐지 어울리는 것 같아서 빈칸에다 이런저런 말들을 집어넣어보았지만 흡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적기로 한다. ‘한강의 소설은 너무 너무해서 뭘 할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