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둘쨋주. 인류는 한 명의 천재를 잃고 새로운 천재를 맞이한다. 월요일에 비틀스의 전 멤버 존 레넌이 광적인 팬에 의해 살해되고, 금요일에는 애플 주식의 공모가 시작되면서 스티브 잡스라는 젊은 청년이 하룻밤 사이에 2천억원을 번 ‘미국 최고의 자수성가 거부’가 된다. ‘애플’ 음반사의 비틀스는 한 시대의 막을 고했고, 같은 시기에 ‘애플’ 컴퓨터는 새로운 시대를 알린 것이다. 한동안 스티브 잡스는 ‘애플’이라는 이름 때문에 비틀스 저작권자들과 싸워야만 했는데, 그가 아이팟(iPod)을 출시해 음반시장을 장악하면서 두 애플의 악연은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영국의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 이후 ‘가장 유명한 사과’를 소유한 역사적 인물이 됐다.
대학들은 요즘 ‘21세기형 창조적 리더’를 키우기 위한 고등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지난 30년간 한국은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빨리 따라잡을 수 있는 산업인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새로운 아이디어가 세상을 선도하고 가치를 만들어내는 ‘지식정보화 시대’를 20세기형 리더로는 헤쳐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세분화된 영역의 전문가가 아니라 여러 분야를 아우를 수 있는 통합형 인재,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식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창조적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데에는 모두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마땅한 대안이 없는 형편이다. 20세기형 인재들끼리 모여앉아 궁리하고 있으니, 대안이 없을 수밖에.
해외에서 그 역할모델을 찾자니, 단연 돋보이는 인물은 바로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를 모두 장악한 ‘디지털 시대의 테크노 구루’ 스티브 잡스다. 아이콘 클릭만으로 프로그램을 여는 컴퓨터 혁명을 이끌어낸 매킨토시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 3D 애니메이션 와 디즈니의 상상력을 잇는 애니메이션의 걸작 , 로 영화산업을 뒤흔들어놓은 디지털 시대의 최고 흥행사. 매력적인 디자인과 편리한 기능 혁신의 아이팟으로 ‘MP3 파일로 음악을 듣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최초의 인터넷 음악 공급 프로그램 아이튠스를 만들어낸 하이테크계의 예술가. 스티브 잡스만큼 과학과 예술을 행복하게 결합한 인물이 또 있을까. 그만큼 사회적 트렌드를 제대로 꿰뚫어본 과학기술자가 있을까.
그러나 불행히도 스티브 잡스와 같은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제도권 교육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그가 살아온 삶은 분명 그의 창조성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우리가 따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955년 2월24일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아기의 법적 양육권을 포기하자 폴과 클라라 부부에게 입양된다. 고아 출신인 스티브 잡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증명해 보이고야 마는 도전정신으로 무장돼 있었다고 친구들은 술회한다. 그는 명석한 학생이었지만, 과잉행동 장애를 앓는 산만한 소년이었고 독불장군에 외톨이였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가졌지만, 함께 일해온 동료들을 애플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애플 주식 공개 상장에서 배제할 정도로 편협했고, 화이트보드를 가로챘다는 사소한 이유로 픽사의 공동 창업자에게 소리를 지르며 벌컥 화를 내기도 했던 유치한 독설가였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사기를 친 적도 있었고, 잘나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아냥과 험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래서 대학생들에게 〈iCon〉(민음사 펴냄·2005) 같은 스티브 잡스의 평전을 읽히면, 감상평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훌륭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우리랑 비슷한 사람이라는 데 놀랐어요.” “성공했다는 것 외에는 딱히 본받을 만한 게 없는 사람 같아요.” 카이스트 기숙사에는 스티브 잡스와 비슷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는 녀석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와 함께.
‘우주를 놀라게 하자’는 꿈그럼에도 어떻게 그는 미국의 대학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회사의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지상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과 함께 일하는’ 행복을 누리게 됐을까?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전 우주적 스케일의 꿈’이 그에게는 있었다는 것이다. 세상을 송두리째 바꾸어놓겠다는 비전과 우주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야심찬 꿈 말이다. 그래서 애플 컴퓨터의 모토도 한때 ‘우주를 놀라게 하자!’(Make a Dent in the Universe!)가 아니었던가! 사람들은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가진 지도자에게 매료된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그를 ‘우리 시대에 가장 우뚝 선 몽상가’라고 칭하지만, 그가 단지 몽상가였다면 오늘날과 같은 업적을 이루진 못했을 것이며, 그를 따르는 ‘애플 컬트’와 ‘아이팟 컬트’가 만들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에겐 꿈과 비전을 ‘현실화’하는 놀라운 재능이 있었다. 그중 나 같은 신경과학자에게 흥미롭게 눈에 띄는 것은 그가 가진 ‘창조성의 본질’이다.
창조적인 사람을 정의할 때, 20세기 심리학자들은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창의력 테스트가 대부분 “‘둥글다’라는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만들어보시오”라는 과제를 주고 몇 개의 문장을 만들어내는지 센다거나, “신문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열하시오”라는 과제를 주고 행동을 관찰하는 정도였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주목받는 창조적 능력은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개성적인 통찰력’을 요구한다. 문제의 본질을 남들과 다르게 새롭게 정의하는 능력과 황당한 아이디어를 현실 가능한 아이디어가 되도록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픽사는 스티브 잡스가 처음 만든 회사가 아니라 조지 루카스가 이미 가지고 있던 기업이었고, 아이팟이 나오기 전에도 MP3 플레이어는 여럿 있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을까? 실사영화의 특수효과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스만으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창조적인 아이디어는 스티브 잡스만의 생각이었고, 그것이 단번에 픽사를 영화산업의 가장 성공한 기업으로 만들었다. 인터넷 비평가는 아이팟을 ‘멍청한 놈들이 가격을 매긴 물건’(Idiots Price Our Device)의 약자라고 조롱했지만, 스티브 잡스는 갖고 싶은 디자인과 편리하게 음악파일을 들을 수 있는 기능만 제공해주면 소비자들이 CD 대신 MP3 파일을 들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남들과 다르게 바라본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사실 애플 컴퓨터의 모토가 아니라, 스티브 잡스의 ‘삶의 철학’이었던 것이다.
대학 중퇴가 ‘약’인 이유이마 바로 뒤인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서 한다고 열려진 이 21세기형 창조적 기능들은 ‘사회화가 많이 될수록, 또 일찍 사회화될수록’ 오히려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니 스티브 잡스의 대학 중퇴는 그에겐 ‘독이 아니라 약’이었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찌 이런 사람을 대학이 키울 수 있느냔 말이다! 아이러니다.
그가 한 강연에서 했던 말은 ‘분석의 틀’에만 매몰된 합리적인 (척하는)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양식의 삶’을 전해준다.
“시장조사는 하지 않았다.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할 때 시장조사를 했느냔 말이다! 천만의 말씀.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혁신이다.”
이제 책상 위에 ‘디지털 시대의 구루’ 스티브 잡스를 올려놓고 ‘과학적 사고’ ‘창조적 사고’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할 때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바이오및뇌공학과
<hr><font size="4">IT 문화의 구루</font><font color="#C21A8D">매년 이루어지는 기조연설은 IT 대중에게 예수의 산상수훈, 신제품은 IT 시대의 복음이어라</font><font size="3"><font color="#1153A4">[진중권]</font></font>
우연히 인터넷에서 본 애니메이션. 아이폰의 출시를 기다리는 어느 부자(父子)의 심정을 담았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출시가 안 되자, 부자는 결국 출시가 계속 연기되는 이유를 자신들의 마음가짐에서 찾는다. 마침내 마음을 비우기로 한 부자는 머리를 밀고 도를 닦기 시작하여 나중엔 공중부양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번뇌가 모두 사라지자 아이폰은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 되었단다. 알고 보니, 원래는 ‘안 와요, 가정교사’라는 제목의 일본 애니메이션인데, 한국의 네티즌이 거기에 가짜 자막을 달아 여대생 가정교사를 기다리는 심정을 ‘아이폰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바꿔놓은 것이란다.
그에게는 ‘현실왜곡장’이 있다네아이폰의 출시가 또다시 몇 달 뒤로 연기됐다. 그런데 인터넷 분위기가 생각보다 조용하다. 기다리다 지친 사람들이 모두 해탈의 경지에 올랐나 보다. 조바심은 분노로, 분노는 체념으로, 체념은 이제 달관으로 바뀐 듯. 이게 불교적 어법이라면, 같은 상황을 기독교적으로 과장할 수도 있겠다. 지난해 7월11일이던가. 이웃 일본에서 아이폰이 출시되던 날 일본의 소비자들은 소프트뱅크 앞에서 노숙까지 해가며 매장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것은 일종의 강림의 드라마다. 출시의 아침을 기다리는 정보기술(IT) 노숙자들에게서 우리는 휴거를 기다리는 종말론 신도들 못지않은 종교적 열정을 볼 수 있다.
굳이 과장을 섞지 않아도 적어도 스티브 잡스가 ‘IT 문화의 구루(Guru)’라는 데에는 아마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구루’의 말뜻 그대로 스티브 잡스는 IT 문화의 지자이자 현자이자 스승이다. 그의 인격의 주위에는 신비한 아우라가 감돌고, 그의 추종자들 사이에는 기묘한 숭배의 분위기가 존재한다. 맥월드에서 그가 해마다 행하는 기조연설은 오늘날 IT 대중에게 마치 예수의 산상수훈처럼 여겨진다. 이 IT 교주의 연설은 먼저 발표장의 청중들을 사로잡고, 그것을 담은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전파된다. 잡스가 신제품을 내놓는다는 소식이야말로 IT 시대의 복음이 아닐까.
애플의 공동창업자인 버드 트리블은 스티브 잡스에 관해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준다. 1981년 소프트웨어의 개발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잡스는 벌써 다음해인 1982년 초로 선적 일정을 확정해놓았단다. 이 비현실적인 계획을 왜 만류하지 않았느냐 묻자, 버드 트리블은 이렇게 대답한다. “스티브 잡스니까. 1982년 초에 선적을 한다고 말한 이상, 그와 다른 그 어떤 대답도 스티브는 들으려 하지 않아. 이런 상황을 가장 잘 묘사하는 방식은 에 나오는 용어지. 스티브에게는 현실왜곡장이 있다고나 할까. 그의 앞에서는 현실도 변형 가능하지. 그는 어느 누구에게나 그 어떤 확신이라도 갖게 할 수 있어.”
이후 ‘현실왜곡장’(Reality Distortion Field)이라는 표현은 애플사의 사원들을 휘어잡는 스티브 잡스의 카리스마를 기술하는 용어가 되었다. 요즘은 그가 하는 기조연설의 청중, 그가 만든 제품의 소비자들에게 그가 행사하는 그 압도적인 심리적 영향력을 가리키는 데까지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잡스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알아두어야 할 게 또 한 가지 있다고 한다. 누군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말하면, 잡스는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일축했다가도 얼마 뒤 그 당사자를 찾아와 똑같은 아이디어를 마치 제 것인 양 역제안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확신과 자기최면이 강한 것은 모든 교주들의 공통점이다.
비물질화를 재물질화로 돌려놓다애플에는 ‘루머 커뮤니티’가 있다. 루머 커뮤니티들은 그해에 반포될 복음의 내용을 대중에게 미리 알려주는 애플교의 선지자들이다. 선지자 중에는 가짜와 진짜가 있는 법. 그리하여 어떤 선지자들의 예언은 빗나가지만, 어떤 선지자들의 예언은 실현되기도 한다. 그들의 예언들 중에서 실제로 실현된 것도 상당히 많다. 이 선지자들에 대한 애플사의 공식 입장은 ‘근거가 없다’는 것. 하지만 이 루머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선지자들 중 일부는 실제로 애플사에 근무하는 사람들로 보인다. 이 예언의 놀이가 일종의 서브컬처가 되다 보니, 애플사의 입장에서는 제품의 홍보가 따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다.
잡스는 컴퓨터 산업에 미학을 도입했다. 그는 최초로 컴퓨터에 서체의 아름다움을 부여했고, 자신이 개발하는 모든 제품에 미적 디자인을 구현했다. 한때 ‘번거로운 케이블은 물론이고, 언젠가는 모니터와 키보드와 본체까지도 눈에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애플의 뛰어난 디자인 때문에 이제 기기의 물질성은 사라질 수 없게 되었다. 애플의 사용자들은 미니멀리즘의 미학을 구현한 자신의 기기가 남들의 눈에 보이기를 간절히 원한다. 심지어 고장난 기기의 이어폰을 끼고 다닌다고 하지 않는가. 애플의 미학은 비(非)물질화를 지향하던 디지털 기술을 재(再)물질화 쪽으로 돌려놓았다.
“서로 전공과 취향이 다른 애플의 개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하게 단합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그들에게 공통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적이란 바로 스티브 잡스다.” 이 농담을 들으며, 나는 ‘버튼을 없애라’는 잡스의 한마디에 엔지니어와 디자이너들이 모여 전전긍긍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상이한 분야에 속하는 전문가들의 작업을 조율하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지휘와 닮은 데가 있다. 스티브 잡스는 그 자신이 뛰어난 디자이너이기도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예술과 기술의 교향악을 연주하는 마에스트로이기도 하다. 이는 픽사를 설립하여 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얘기할 때, 빼먹을 수 없는 것이 맥월드의 기조연설일 것이다.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철저하게 연극적으로 조직된다. 이 공연은 물론 반복적인 리허설과 고된 연습을 통해 완성된다. 스크린 앞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프레젠테이션은 일종의 행위예술이다. 결정적인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무대 옆으로 가서 물을 한 잔 마시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프레젠테이션이 끝날 때쯤에는 꼭 “아, 한 가지 더”라고 말하며 보너스를 얹어준다. 서류봉투에서 슬며시 노트북을 꺼내드는 제스처는 당연히 노트북의 두께를 숫자로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인상을 준다.
예술가 CEO의 전형미디어에서 떠드는 최고경영자(CEO) 찬양, 현대 자본주의가 양산해내는 이 조작 신화들은 대부분 유치하고, 뻔뻔하고, 지루하다. 하지만 그것이 스티브 잡스에 관한 것이라면, 사정이 좀 다르다. 그는 이제까지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CEO, 즉 ‘예술가 CEO’의 전형이다. 그는 컴퓨터 기기의 디자이너이자, 기술과 예술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지휘자이자, 프레젠테이션을 행위예술로 끌어올린 탁월한 퍼포머다. 동시에 IT 대중들에게 지혜와 확신을 주는 구루이자, 테크놀로지와 결합된 프레젠테이션으로 청중들의 혼을 홀딱 빼놓는 마법사다. 빌렘 플루서였던가? 디지털 시대를 탈역사적 마법의 시대라고 했던 것이.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독어독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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