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31일 국회에서 ‘어린이 병원비를 국가가 보장하자’고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한 공부방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저희 센터 한 선생님이 난산으로 아이를 낳다 결국 돌아가셨어요. 어렵게 태어난 아이는 심각한 장애를 가진 친구가 되었습니다. 엄마는 장애아를 낳고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이 상황에서 아이를 포기할 수 없으니 얼른 바깥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합니다. 이 가정은 아주 가난하진 않아서 모금을 받을 만한 상황이 안 되는 거죠. 제가 곁에서 가깝게 지켜보던 한 가정이 ‘이런 일을 겪으며 완전히 쑥대밭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막 부부가 된 사람들, 막 집안을 꾸려 기반이 없는 집에서 아픈 아이가 태어나니 온 집안이 흔들흔들하는 거죠.” 원장님은 물었다. “국가가 이들의 삶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시적 ‘온정’만으로 병원비 해결 못해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어김없이 불우이웃돕기 캠페인을 접한다. 그중 하나가 중증질환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를 위한 모금운동이다. 특히 소아암과 심장병, 희귀난치성 환아를 위한 의료비 모금 활동은 방송사와 사회단체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진다. 이런 온정은 없는 것보다야 당연히 낫다. 하지만 그 온정만으로 우리 아이들의 병원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그나마 직접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그것도 일부 저소득층만 작은 혜택을 볼 뿐이다. 온정만으로 아픈 아이들이 있는 한국 사회의 모든 가정이 무너지는 일을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사회복지사들이 주도해 6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여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라는 사회운동단체를 결성했다. 어린이 병원비만이라도 걱정 않는 사회, 미래 세대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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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는 만 15살 이하 아동의 입원진료비 전액을 국가가 책임지자고 주장한다. 의무교육을 시행하는 중학교 3학년까지는 의료도 국가가 책임지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병원비 문제는 전 국민이 고통받는 사안이다. 모든 국민이 병원비 걱정 없도록 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우선 당장 실현 가능한 아이들 의료비부터 해결하자는 것을 제안한다. 이 작은 움직임은 차츰 모든 의료비의 보장으로 확대하자는 큰 움직임이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만 15살 이하 아동의 입원진료비는 마음만 먹으면 해결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재원은 2014년 기준 5152억원이면 충분하다. 15살 이하 아동에게서 발생하는 총병원비는 2014년 6조3937억원으로 추산된다. 그중 국민건강보험공단이 3조8823억원을 부담했고, 환자 가족이 부담한 본인부담금은 2조5114억원이다. 2조5천억원은 15살 이하 어린이의 병원비 일체를 국가가 모두 책임진다고 할 때 필요한 돈이다.
우선 2조5114억원 전액을 국가가 보장하기에 앞서 적어도 입원진료비에 해당하는 5152억원부터 국가가 보장하면 어떨까. 병원비는 크게 입원, 외래, 약값으로 나뉜다. 2조5114억원 중 5152억원이 입원시 본인부담금이다. 외래와 약값 의료비를 우선순위에서 제외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래진료나 약값의 경우 경증질환이 많아 상대적으로 환자의 부담이 크지 않다. 외래는 감기 등 가벼운 질환으로 진료받는 경우가 많고, 환자 본인부담금도 크지 않다. 반면 입원진료비는 다르다. 입원시에는 전체 병원비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항목(상급병실료, 특진료, 그 외 각종 검사, 약제 등)이 많다. 환자의 부담이 큰 병원비의 대부분은 입원진료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우리는 외래나 약값은 제외하고 우선 입원진료비에 대해서 완전 보장을 주장한다.
둘째, 입원진료비에선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여지가 매우 적다. 입원은 제한된 병상 수로 인해 도덕적 해이가 크게 발생하기 어렵다. 반면 외래진료비의 경우 보장성을 높이면 상대적으로 의료 이용량이 많아 재원이 추가로 소요될 가능성이 크다.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여지가 분명 있다. 입원진료비로 제한한 현실적 이유다.
5천억원은 현재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재정 상황을 보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무려 17조원에 해당하는 재원을 금고에 쌓아놓고 있다. 정부는 향후 건강보험 재정의 적자가 예상된다며 재원을 보장성 확대에 사용하지 않고 적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논리로는 지금의 재정 흑자를 설명할 수 없다. 이 흑자 역시 그간 정부가 계속 적자 난다며 주장하는 와중에 발생한 것이다. 더구나 곧 적자가 난다고 예상하면서 적립된 돈을 다른 곳에 투자하겠단다. 앞뒤가 맞지 않다. 보장성을 확대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사용하려는 속셈이다.
누적 흑자분은 모든 국민이 2년 동안 입원해서 치료받는 비용 전액을 보장할 수 있는 재원이다. 15살 이하 아동의 입원진료비만 보자면 17조원의 3%만으로 모두 해결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앞으로 30년 동안 아이들 병원비를 해결할 수 있는 재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현 정부는 건강보험 재원을 금고에 쌓아놓고 있을 뿐 국민의 병원비 부담을 덜어주는 데 사용할 의향이 없어 보인다.
과거 2005년 노무현 정부에선 1조5천억원의 건강보험 흑자가 발생하자, 암부터 무상의료를 하자는 시민사회단체의 요구를 받아들여 암질환 보장률을 대폭 높였다. 그러자 암보장률은 2004년 49.6%에서 2006년 71%로 껑충 뛰었다. 암질환의 병원비 부담이 그나마 줄어든 것의 시작점이었다. 그게 좀더 확대돼 4대 중증질환의 보장 개선으로 나아갔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정부의 태도는 정반대다.
건강보험의 낮은 의료비 보장률은 국민의 병원비 직접 부담뿐 아니라 사보험 부담을 높이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공동 조사하는 한국의료패널에 따르면, 10살 미만 아이들의 민간 의료보험 가입률은 84.9%(2012년)에 달했다. 1인당 월평균 금액은 4만8천원이다. 15살 이하 아동 수가 780만 명(통계청)임을 고려하면 무려 4조원이 넘는다. 5천억원이면 병원비 걱정 없이 해결할 것을 10배에 이르는 금액을 사보험에 지출하게 하는 것이다. 아이 키우는 것도 걱정인데, 비싼 사보험료 부담까지 가중돼 더더욱 아이 키우기 어려운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4대 중증질환 100% 보장’ 약속은 어디로?어린이 입원진료비를 전액 국가가 보장하자는 주장에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표적으로 왜 100% 보장이어야 하는지다. 그러나 이는 15살 이하 아동의 의료비 가운데 입원진료비만 우선적으로 보장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100% 보장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계적 이행을 위한 실현 방안을 제시하는 셈이다. 적어도 병원비 걱정으로 아이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거나, 병원비가 가계의 큰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을 살펴보면 입원진료비에 대한 국가 보장률은 평균 85%다. 이 수치는 한국·멕시코·미국 같은 나라들이 평균을 갉아먹어서 그렇지, 대부분의 유럽 복지국가들은 입원진료비 국가 보장률이 95% 내외에 달한다. 이웃 나라 일본조차 입원진료비 보장률이 90%가 넘는다. 이에 비해 한국은 60%에 그치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100% 국가 보장을 약속해 중병으로 인한 병원비 부담은 많이 덜어지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박근혜 정부는 4대 중증질환에 대해 100% 국가 보장을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조금 나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4대 중증질환의 병원비 부담은 매우 크다. 현재 보장률이 70%를 갓 넘는 수준이다.
더욱이 4대 중증질환 대상자는 제한적이라 그 혜택을 누리는 환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4대 중증질환자는 전체 국민 대비 3.4% 정도이고, 15살 이하는 2.2%에 불과하다. 또한 4대 중증질환이라 하면 대부분의 중증질환을 포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4대 중증질환이란 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희귀난치병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 중증질환은 간질환, 신장질환, 폐질환, 감염성질환, 내분비질환, 퇴행성질환, 유전성질환 등 수도 없이 많다.
또 4대 중증질환과 실제 혜택이 주어지는 4대 중증질환의 간극도 크다. 대표적으로 심장질환과 뇌질환은 질병만으로 대상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질병으로 수술(시술)한 경우에만, 그것도 30일에 한정해 일시적으로 혜택을 주므로 대상자가 매우 제한적이다. 현재의 4대 중증질환 제도로 대부분의 큰 병원비 부담이 덜어질 거라는 생각은 잘못됐다.
큰 돈 필요하지 않다그래서 어린이의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하자는 주장과 운동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당장 실현이 가능하다.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금고에 쌓아둔 17조원의 3%면 충분하다. 정부는 그 돈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요구해야 한다. 간절히 원하고 치열하게 행동하면 현실이 될 것이다.
“아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보이기 싫은 것까지 마구잡이로 내보여야 하는 일이 상처가 됐습니다.” ‘모금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던 4대 중증질환 아동을 둔 한 가정에 인터뷰를 의뢰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모금’을 위해 가장 내밀한 개인의 건강 상태와 가족의 경제적·심리적 상황을 불특정 다수에게 내보이는 것은 사실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큰 병을 앓는 아동을 둔 많은 가정이 ‘모금’ ‘후원’ ‘온정’에 기대지 않으면 아이의 치료도, 가정의 정상성 유지도 어렵다. 어떤 가정은 상처를 감수하고 모금에 뛰어든다.
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0~15살(현 중학교 3학년) 아동의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책임지자’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이 의제는 지난 2월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59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이하 연대)가 제기했다. 연대는 △어린이의 생명을 모금에 의존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780만 명 어린이의 건강권과 생명권 보장을 위해 5152억원에 해당하는 ‘어린이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하라는 주장을 펼치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이들의 생명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기본권이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등 보편적 복지가 유행어처럼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여전히 둘 다, 특히 후자는 현실과 가깝지 않다. 은 전면적 무상의료에 앞서 우선 0~15살 아동의 의료, 그것도 더 중한 질환 치료에 쓰이는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하자는 주장에 대해 방법을 모색하고 뜻을 모으려고 한다.
이 정책이 실현될 때까지, 은 그 설득을 위해 모순되게도 아픈 아동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큰 가족을 만나고, 가족이 처한 어려움을 말하고, 정책 현황을 보여주고 허점을 짚는 연재를 시작한다. 5월5일 어린이날부터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도 관련 연재를 시작하며, 제도가 실현될 때까지 도움이 시급한 가정을 우선적으로 돕는 ‘모금’도 함께 진행한다.
‘모금’을 통해 어려움을 해소해야 하는 이 ‘모순’을 없애기 위해 하루빨리 ‘아동 진료비 국가 보장’이 제도화돼야 할 것이다.
*후원 계좌 농협중앙회 10573964784416 (예금주 어린이재단),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희망나눔콜센터 1588-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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