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환자가 한 명 생기면 낭떠러지를 앞에 둔 절벽으로 몰린다. 한 발 잘못 내디디면 추락한다. 과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은 2015년 1월~2016년 3월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중증질환을 앓는 아동 의료비·생계비 도움을 요청한 103가구를 대상으로 가계 소득·부채 현황, 주거 수준 등 경제적 상황을 묻는 설문조사를 하고 상담 사례를 분석했다. 103가구에는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음에도 아직 ‘희귀난치성 질병’ 코드를 부여받지 못한 아이가 있는 가구들도 포함됐다.
아이 돌보느라 결근 잦다 결국 해고집에 아픈 아이가 생기면 가계경제는 얼마나 추락할까. 특히 그 아이가 오랜 기간 많은 병원비를 들여 치료해야 하는 4대 중증질환(백혈병 등 소아암, 심장질환, 뇌혈관질환,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면 어떨까.
우선 아동이 질병을 앓기 전과 후의 월 가계소득 변화를 물었다. 전체 103가구 가운데 절반이 넘는 57가구(55.3%)가 월소득이 감소했다. 소득 변화가 없는 가구가 33가구, 소득이 늘어난 가구도 13가구 있었다.
소득 변화가 없는 33가구 가운데 17가구는 최저생계비 120%에 못 미치는 소득을 버는 기초생활수급 가구로 정부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이 가운데 9가구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기초생활수급 가정이었다.
57가구는 왜 소득이 감소했을까. 소득이 감소한 57가구 가운데 68%에 해당하는 가정이 아동의 병간호로 회사를 그만둬야 했거나, 정규직에서 일용직으로 일자리를 바꿔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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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에서 월 250만원씩 받았던 ㄱ씨는 태어나면서부터 백혈병과 다지증을 앓은 둘째아이를 병원에 데려가고 돌보느라 자주 결근하면서 권고사직을 당했다. 이후 그때그때 인력사무소 등에서 일을 구하는 ‘일용직’이 됐다.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하던 ㄴ씨는 둘째를 낳은 뒤 출산휴가가 끝나면 복직하려 했지만, 아이가 한국에 10명 미만의 환자가 있다고 알려진 희귀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추가로 육아휴직을 쓰려는 ㄴ씨에게 회사는 퇴직을 요구했다. 남편이 하던 작은 자동차용품 판매점도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게 돼, ㄴ씨 가족은 갑자기 저소득도 아닌 ‘무소득 가구’가 됐다.
성장지연·정신지체 등을 유발하는 유전질환 코넬리아드랑게증후군을 앓는 아이가 태어나면서 잦은 결근으로 퇴직당한 ㄷ씨의 둘째아이도 첫째아이와 같은 병을 갖고 태어났다. 둘째아이까지 아빠 혼자 돌볼 수 없어 어린이집에서 교사로 일하던 엄마까지 직장을 그만뒀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픈 아이 병간호를 위해 둘 중 한 명이 회사를 그만둠으로써 가계 전체 소득이 줄어든다. 갓난아이의 경우 누군가에게 맡기기도 힘들고, 초등학생·중학생의 나이에 발병하더라도 간병인을 쓰는 비용을 생각하면 부모 가운데 한 명이 그만두는 게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라고 판단해서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과 돌봄의 어려움은 한부모 가정일 경우 더욱 극적으로 나타난다. ㄹ씨는 고부갈등·성격차이 등으로 남편과 갈등을 겪다 2009년 이혼했다. 2년 뒤 딸아이는 ‘면역글로불린 A의 선택적 결핍’이라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ㄹ씨가 운영하던 가게가 문을 닫으면서 모녀는 서울에서 수도권 모자보호시설로 주거지를 옮겼다. ㄹ씨도 연이어 터널증후군 등으로 수술받아 건강이 나빠졌다. 가족은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됐다. 중증질환을 앓는 아동이 있는 전체 103가구 가운데 31가구가 한부모 가정이다. 이 가운데 21가구가 기초생활수급 대상 가구다.
아버지는 연락이 두절되고 어머니는 사기 혐의로 구속돼, 신경섬유종증을 앓는 16살 동생과 올해 19살인 언니가 기초수급비 53만원으로 살아가는 형제자매 가정도 있었다.
적은 소득으로 치료하다보니 부채는 쌓여만 간다. 전체 103가구 가운데 74.7%에 해당하는 77가구가 100만원 이상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부채가 없는 가구는 24가구에 불과했다.
아빠는 기능직 공무원이고 엄마는 유치원 교사를 하며 월 500만원 이상을 벌며 제주에 사는 ㅁ씨 가족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뚜렷한 치료약이 없는 희귀난치병인 ‘소장의 림프관 확장증’ 진단을 받았다. 아내도 같은 해 갑상선암 진단을 받았다. 집안에 환자 2명이 생기자 치료비에 더해,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교통비, 치료 기간 동안 서울에 머무는 거주비 등으로 2억원의 빚이 생겼다. ㅁ씨는 빚을 갚기 위해 밤에는 주 3일 대리운전을 하며 빚을 갚아나가고 있다. 부채가 있는 전체 77가구 가운데 25가구가 지방에서 서울로 왔다갔다 하며 치료를 받고 있다.
가계경제가 소진된 뒤에는 의료비가 없어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103가구 가운데 20가구가 ‘병원비 걱정으로 자녀를 적극적으로 치료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경을 관할하는 좌측 측두엽이 없어 사지를 움직이지 못하고 시력·청력이 없는 것은 물론 연하 장애가 있어 매번 가래와 침을 뽑아줘야 하는 4살 ㅂ의 가정은, 의료비가 없어 하루에 10개씩 쓰는 ‘석션팁’(가래 뽑는 기구)을 삶아 재활용하고 있다. 원래 일회용품으로 만들어진 기구를 재활용하다보니 2차 감염이 생길까봐 불안해도, 일용직으로 월 150만원에 불과한 남편 소득으로 모든 의료용품을 사서 쓸 수가 없다.
이 가정이 한 달에 의료용품비로만 필요한 돈은 특수분유(월 15만원)·석션팁(월 12만원)·인공호흡기 소모품(월 10만원)·식염수·증류수·소독약·거즈(월 20만원) 등 모두 합해 130만원에 이른다. 그 밖에도 대전에서 서울대병원 정기검진을 가기 위해 오가는 교통비, 의료비까지 모두 계산하면 언제나 통장은 ‘마이너스’다.
태어나면서부터 뇌척수액이 순환되지 않고 막혀 뇌압이 상승하는 등의 문제가 생기는 수두증을 앓고 있는 2살 ㅅ은 지속적으로 신경외과적 치료를 입원해서 받아야 하지만, 비싼 병원비 때문에 입원하지 않고 있다. 폐렴 등으로 고열이 나 생명이 위험할 때만 입원치료를 하고, 상태가 조금 좋아지면 금방 퇴원했다가 다시 입원하는 등 병원비 걱정으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병원비 본인부담금에 각종 물품비까지 ‘눈덩이’두개골의 이상 발달을 일으키는 선천적 유전질환 에이퍼트증후군을 앓고 있는 ㅇ(11)도 안면기형, 손가락이 붙은 합지증으로 수술·치료를 해야 하지만, 한번에 2천만~3천만원이 들어가는 수술비를 마련하지 못해 수술을 미루고 있다.
4대 중증질환의 급여 항목 본인부담금은 10%다. 일반 환자의 입원 본인부담금은 20%, 외래 본인부담금은 30~60%여서 ‘산정특례’가 되면 확실히 급여 항목의 본인부담은 줄어든다. 하지만 비급여까지 합하면 2014년 4대 중증질환 보장률은 77.7%로 23.3%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그나마 이런 본인부담률은 희귀난치성질환과 암의 경우 5년, 뇌혈관질환과 심장질환의 경우 최대 30일 동안만 적용 가능하다.
희귀난치성이란 ‘치료가 어렵다’는 말이다. 아이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병이라는 말이다. 본인부담률을 낮추더라도 그 보장이 한시적이라면, 치료비는 평생의 굴레가 된다. 게다가 아픈 아이가 있는 가정은 본인부담금 외에 각종 의료물품비, 구급차 비용을 포함한 부대 비용까지 모두 부담해야 한다. 그 와중에 부모는 아이가 아프기 전과 비교해 100% 시간과 힘을 쏟아 일할 수 없다. 아픈 아이가 생긴다면, 어느 가정이라고 무사할 수 있을까. 누구도 예외는 아니다.
“아이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보이기 싫은 것까지 마구잡이로 내보여야 하는 일이 상처가 됐습니다.” ‘모금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던 4대 중증질환 아동을 둔 한 가정에 인터뷰를 의뢰하자 돌아온 대답이었다. ‘모금’을 위해 가장 내밀한 개인의 건강 상태와 가족의 경제적·심리적 상황을 불특정 다수에게 내보이는 것은 사실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는 큰 병을 앓는 아동을 둔 많은 가정이 ‘모금’ ‘후원’ ‘온정’에 기대지 않으면 아이의 치료도, 가정의 정상성 유지도 어렵다. 어떤 가정은 상처를 감수하고 모금에 뛰어든다.
은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0~15살(현 중학교 3학년) 아동의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책임지자’는 캠페인을 진행한다. 이 의제는 지난 2월 ‘세상을 바꾸는 사회복지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등 59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어린이병원비국가보장추진연대’(이하 연대)가 제기했다. 연대는 △어린이의 생명을 모금에 의존하는 나라는 나라가 아니다 △780만 명 어린이의 건강권과 생명권 보장을 위해 5152억원에 해당하는 ‘어린이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하라는 주장을 펼치며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아이들의 생명권은 국가가 보장해야 하는 기본권이다. ‘무상급식’ ‘무상의료’ 등 보편적 복지가 유행어처럼 세상을 휩쓸고 지나갔지만, 여전히 둘 다, 특히 후자는 현실과 가깝지 않다. 은 전면적 무상의료에 앞서 우선 0~15살 아동의 의료, 그것도 더 중한 질환 치료에 쓰이는 입원진료비를 국가가 보장하자는 주장에 대해 방법을 모색하고 뜻을 모으려고 한다.
이 정책이 실현될 때까지, 은 그 설득을 위해 모순되게도 아픈 아동으로 인해 감당해야 할 경제적·심리적 부담이 큰 가족을 만나고, 가족이 처한 어려움을 말하고, 정책 현황을 보여주고 허점을 짚는 연재를 시작한다. 5월5일 어린이날부터 카카오 스토리펀딩에서도 관련 연재를 시작하며, 제도가 실현될 때까지 도움이 시급한 가정을 우선적으로 돕는 ‘모금’도 함께 진행한다.
‘모금’을 통해 어려움을 해소해야 하는 이 ‘모순’을 없애기 위해 하루빨리 ‘아동 진료비 국가 보장’이 제도화돼야 할 것이다.
*후원 계좌 농협중앙회 10573964784416 (예금주 어린이재단),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희망나눔콜센터 1588-1940
취재 박수진 기자, 사진 류우종 기자, 편집 황예랑 기자, 디자인 장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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