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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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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청년의 나날은 푸르지 않았다

소득·주거 빈곤 속에 희망 갖기를 유예한 청년 5명에게서 듣는 지금, 여기 우리네 청년들의 이야기 그리고 숫자에 담긴 서늘한 현실
등록 2015-08-18 10:16 수정 2020-05-02 19:28

청춘은 푸른빛이 아니라, 핏빛이다. 가냘픈 손목에 칼을 그었다. 붉은 핏방울로 한 글자 한 글자 썼다. ‘내 돈 내놔!’
정다은(27·가명)씨는 요즘도 자다가 벌떡벌떡 일어난다. 지난 2월 정보기술(IT) 회사를 퇴사한 뒤 받지 못한 체불임금과 퇴직금 900만원이 떠오른다. 다은씨는 쉴 새 없이 재잘대며 귀여운 농담을 즐기는 20대 청년이다. 명랑만화 여주인공 같다. 그런 사람이 공포만화에나 등장함직한 일을 벌였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해 정규직까지 3년간 일했던 회사의 사장은 직원들 월급 9억원을 떼먹었다.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어 근로감독관과 삼자대면을 하던 날, 사장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난 IMF도 버텼는데 다은씨는 왜 못 버텨? 고소 취하해주면 다달이 얼마라도 줄게. 고소해봤자 난 벌금 내면 그만이야. 돈 못 받으면 너만 손해지.” 반협박이었다. 다은씨는 화가 치밀어 새벽에 자다 말고 회사로 달려가서 혈서를 썼다. 거리의 나무들이 푸름을 더해가던, 지난봄 어느 날의 일이다.

정다은(27·가명)씨가 지난 8월12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고시텔 3평짜리 자신의 방에서 옷을 걸고 있다. 회사 회의실, 찜질방을 전전하던 다은씨에겐 월 25만원짜리 ‘내 방’도 소중하다. 그는 3년간 다니던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체불임금 900만원을 못 받은 상태다. 김진수 기자

정다은(27·가명)씨가 지난 8월12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의 고시텔 3평짜리 자신의 방에서 옷을 걸고 있다. 회사 회의실, 찜질방을 전전하던 다은씨에겐 월 25만원짜리 ‘내 방’도 소중하다. 그는 3년간 다니던 정보기술(IT) 회사에서 체불임금 900만원을 못 받은 상태다. 김진수 기자

악덕 사장에게 혈서를 썼다 ‘내 돈 내놔’

이 여름의 끝, 다행히 다은씨는 새 일자리를 찾았다. 6월부터 IT 회사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한다. 얼마 전, 첫 월급도 받았다. 이제 햇반과 컵라면과도 안녕이다. 신용카드가 끊겼던 기간 동안, 그가 휴대전화 소액결제로 사먹을 수 있는 건 편의점 음식뿐이었다.

옷장 속에 고이 넣어둔 기타도 지킬 수 있게 됐다. 돈이 없어 젬베, 신시사이저 등을 모두 팔았다. 다은씨는 전문대 실용음악과를 졸업했다. 평일에는 PC방을 전전하며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고, 주말에는 맥도날드 알바를 뛰던 생활도 이제 끝이다. 그래도 그의 젊음이 완연히 푸르러지진 않았다.

지난 8월12일 수은주가 33℃를 가리키는 한여름.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위치한 한낮의 고시텔은 찜통 같았다. 다은씨 얼굴 위로는 땀이 주르륵주르륵 흘렀다. 에어컨은 1시간마다 딱 10분씩만 가동된다. 고시텔 복도에 있는 에어컨 제어기에는 온도·시간 조절을 못하도록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3평 남짓한 다은씨의 방에는 바깥공기를 쐴 창문도 없다. 공용 화장실에서 찬물로 샤워하고 밤새 더위를 버텨야 한다. 회사 회의실, 찜질방에서 생활하던 시절보다는 낫다. 월 25만원으로 서울에서 ‘내 공간’을 갖기란 쉽지 않다. 얇은 합판을 사이에 둔 이웃인 옆방 조선족 아저씨가 방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는 것쯤, 새벽 4시면 일하러 나가느라 시끄러운 것쯤은 대수롭지 않다. 다은씨는 “침대에 누워 기다란 우산 하나 들고 있으면 전등 스위치도, 텔레비전도 켜고 끌 수 있어 좋다”며 깔깔 웃었다.

다은씨 같은 청년들의 빈곤 문제가 심각하다. 장하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의뢰해 조사한 청년 빈곤율은 노인 빈곤율과 어금지금할 정도로 높게 나타났다.
만 18~24살은 5명 가운데 1명꼴(19.7%)로, 만 25~29살은 10명 가운데 1.2명꼴(12.3%)로 상대적 빈곤 상태인 것으로 나타났다. 각각 만 60~64살의 빈곤율(20.3%), 만 50~59살의 빈곤율(11.4%)과 비슷한 수준이다. 빈곤율은 가처분소득이 중위소득 50% 미만인 사람의 비율이 얼마인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2015년도 중위소득 50%를 월급으로 따져보면, 1인 가구 기준 78만원, 4인 가구 기준 211만원 남짓이 된다.
다은씨는 최근 취업을 했기 때문에, 소득빈곤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주거빈곤에는 포함된다. 국토교통부가 고시하는 최저 주거 기준은 1인당 14m²(4.2평 남짓)이다. 서울에 사는 청년 5명 가운데 1명꼴로 고시원, 옥탑방 등 주거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청년, 빈곤의 미로에 갇히다’ 표1·4 )참조.

하지만 다은씨는 국가의 도움을 받아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을 다니는 목수였다. 벌이는 시원찮았다. 엄마·아빠는 가난 때문에 지긋지긋하게 싸웠다. 5년 전 아버지가 홀연히 세상을 떠난 뒤로는 절망스러운 나날이 이어졌다.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는 돈을 벌지 못한다. 다은씨는 17살 때부터 패스트푸드점, 백화점, 피아노 학원, 레스토랑, 도서관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용지원센터 취업 창구에도 몇 차례 가봤지만, 어울리지 않는 경리 업무만 추천해줬다.

중학교 때 ‘작곡가’를 꿈꾼 이후로, 다은씨에게 꿈은 사라졌다. 스무 살 때 음악 페스티벌에서 만난, 1천 일 넘게 사귄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삶은 더 잿빛이었을지 모른다. 서울의 4년제 대학을 다니는 남자친구는 졸업 유예 상태다. 배고픈 청춘의 데이트는 선택지가 많지 않다. 음식을 사다가 고시텔의 좁은 방 안에서 나눠먹는다.

모처럼 고시텔에서 나와 다은씨와 남자친구와 함께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있는데, 휴대전화 카카오톡 알림 메시지가 울렸다. 지난 8월10일 만났던 비정규직 노동자 이아라(29·가명)씨였다. “오늘 회사에서 갑자기 자르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입속의 밥알이 갑자기 돌 씹는 듯이 서걱거렸다.

만 18~35살 청년층의 실질실업률은 30.9%에 이른다. 정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회 밖 청년’은 전체 20대의 절반 가까이(456만2천 명) 된다. 이들은 취업이나 학업을 포기하거나 졸업유예 상태이지만,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모습. 한겨레

만 18~35살 청년층의 실질실업률은 30.9%에 이른다. 정부 정책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사회 밖 청년’은 전체 20대의 절반 가까이(456만2천 명) 된다. 이들은 취업이나 학업을 포기하거나 졸업유예 상태이지만,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다. 편의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모습. 한겨레

“파견직은 이름도 안 불러줘요”

“파견업체에서 그냥 어려워서 입사 순서대로 자른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런데 저보다 늦게 들어온 언니들은 연락받은 거 없다 하네요, 휴~.” 카카오톡 대화창에 뜨는 메시지를 읽어내려가는데, 서글서글 시원하게 웃던, 씩씩한 아라씨의 얼굴이 자꾸 팝업창처럼 떠올랐다.

아라씨는 경기도 안산시 반월공단의 한 제약회사 공장에서 일한다. 링거주사액 등을 포장하고 불량을 걸러내는 일이다. 월 130만원 남짓 받는 파견직이지만 아라씨는 이번 회사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전에 일했던 ‘홈매트’ 제조공장이나 휴대전화 조립공장에서는 파견직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이번 공장은 그나마 가족적인 분위기다. “파견직은 이름도 안 불러줘요. ‘어이, 거기 세 명 여기로 오세요’ 이런 식이죠.”

지난 8월10일 오후에 만난 아라씨는 중간중간 슬며시 하품을 했다. 새벽부터 출근한 탓이다. 근무는 아침 7시부터지만, 통근버스를 타려면 새벽 5시40분에 집을 나서야 한다. 집 바로 앞에도 통근버스가 서지만 아라씨는 탈 수 없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정규직만을 위한 통근버스다. 아라씨는 10분을 더 걸어가 파견업체 통근버스를 탄다.

파견직 근로계약서 뒷면에는 4대 보험 포기 동의서가 인쇄돼 있다. 고용·산재보험을 포기하는 대신 쥐꼬리 급여를 조금 더 받아가란 무언의 압박이다. 제조업 직접생산 공정의 파견직 사용은 금지돼 있다. 일시적으로 3개월 파견 사용만 허용할 뿐이다. 아라씨를 1년 가까이 고용한 제약회사는 ‘불법파견’을 악용하고 있는 셈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3~5월 전국의 주요 공단에서 근로감독을 실시해 파견노동자 사용 업체의 34%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결과를 8월 초 발표했다. 근로감독관이 찾아온 날, 회사는 아라씨에게 사흘 휴가를 줬다. “노동부에서 전화 오면 ‘그만뒀다’고 이야기하라”고도 지시했다. “열심히 하면 정규직 시켜줄게”라던 말은 희망고문이었다.

아라씨는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를 졸업했다. 원래는 언론사 입사가 꿈이었다. 대학원을 갈까도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엔 돈이 없었다. 자영업자였던 부모님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 가게가 망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초등학교 때까지 외할머니의 공공임대아파트에서 가족 넷이 얹혀살았다.

고등학교 때는 마을버스 요금 400원이 없어서 100원짜리 동전을 500원처럼 속이고는 거스름돈 100원을 받아 교통비를 마련하곤 했다. 엄마는 발열양말을 만드는 가내수공업체에서 일하다가, 그마저도 얼마 전 그만뒀다. 중소기업 엔지니어로 취업한 오빠가 가족 생계를 책임진다. 아라씨도 다달이 30만원씩 보탠다. 학자금 대출 500만원도 갚아야 했다. 당장 일할 곳이 필요했다. 반월공단에 정규직으로 취직해 있던 친구가 아라씨의 손을 끌었다. 월세 10만원을 내고 친구 전셋집에 둥지를 틀었다.

“제일 힘든 건 주변의 시선이에요. 대학 나와서 공장 다닌다는 손가락질. 내가 불법파견 노동자 되려고 대학 나왔나? 이런 패배감에 우울해지기도 해요. 그래서 대학 친구들이랑은 연락도 거의 안 해요.” 아라씨는 직업상담사 2급 자격증을 따서 1년간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직업상담사도 대부분 계약직의 불안정 노동이긴 마찬가지다. 3년 가까이 사귀었던 남자친구는 “공장 다니지 말고 직업상담사 하라”며 아라씨를 못마땅해했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던 남자친구와는 결국 지난 2월 헤어졌다. 최근 혼자 사는 원룸으로 이사하면서 아라씨의 빚은 3500만원으로 늘어났다.

빈곤 벗어난 삶을 그리지 못한다만 18~35살 청년층의 실질실업률은 30.9%에 이른다. 지난 6월 청년 실업률은 10.2%였다. 1999년 6월(11.3%) 이후 최고치다. 공식실업률에는 취직을 포기하거나 졸업을 유예하고 학생 신분으로 구직 활동을 하는 청년층 수는 잡히지 않는다. 청년들의 ‘고용절벽’은 사상 최악이다(30쪽 표2 참조).
취업한다 해도 좋은 일자리가 아닌 게 더 큰 문제다. 아라씨 같은 ‘워킹푸어’,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두룩하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만 15~29살 노동자 가운데 중위임금의 3분의 2 미만(2015년 기준 월 104만원, 시급 6900원 안팎)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가 30%에 이른다. 60대 이상 고령자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아라씨가 동네 여행모임 친구인 김지연(31·가명)씨와 함께 ‘공원 전망대’에 올랐다. 반월공단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발밑으로 보이는 수천 개의 공장 안에 얼마나 많은 청년들의 삶이 깃들여 있는지, 빈곤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지 두 사람은 알지 못한다.

안산에서 4년 동안 거주한 지연씨는 공단에서의 삶 ‘이후’를 그리지 못한다. “10년 뒤요? 계속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기대가 별로 없어요. 어느 공장에 가든지 다 최저임금일 테고, 자영업이 어려운데 가게 차리면 망할 거고, 다른 일을 배운다고 해도 취업하기 쉽지 않고. 너무 비관적인가요? 비관이 아니라 객관적인 건데.” 지연씨는 쓰게 웃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던 지연씨는 2011년 친척 언니가 살고 있는 안산으로 흘러왔다. 전에는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일했고, 지금 근무하는 공장에는 2013년 취업했다. 정규직과 유니폼 색깔이 다르고 심지어 탈의실과 휴게실, 화장실도 구분해 사용하는 사내하청 노동자, 즉 비정규직 노동자다. 안산에서 일한 공장마다 지연씨는 막내였다. “안산에는 대기업의 2~4차 하청업체가 많아요. 다 최저임금에 보너스도 거의 없고, 일이 힘들잖아요. 비전도 없고. 그런데 20대가 굳이 오고 싶겠어요?”

아직 여름이 가지도 않았는데, 안산 공단에는 찬바람이 분다. 경기가 좋지 않다. 지연씨가 일하는 하청업체도 인원을 절반으로 줄였다. 지연씨는 이날 저녁 해고된 ‘언니들’을 위로하는 삼겹살 파티에 갔다. “우울하지만은 않아요. 우리 딴에는 해학이 있거든요. 이를테면 컨베이어 벨트에 부품이 떨어지면 우리끼리 ‘밥 대달라’고 소리쳐요. 부품이 우리 밥이잖아요.”

지연씨는 지난해 결혼해서 안산에 아예 터를 잡았다. 7년 연애한 남편은 학원강사다. “연애하는 동안 김밥천국, 롯데리아만 자주 다녔어요. 돈 안 드는 산이나 서점에 가고. 돈이 없어서 결혼을 미뤄왔는데, 친척 언니가 결혼하는 바람에 살 곳이 없어져서 얼떨결에 결혼하게 됐죠.”

보증금 6천만원에 방 2개짜리 다가구주택을 구했다. 둘이 사니 생활비 부담도 줄었다. 아이는 내후년쯤 낳을 계획이다. 청년들에게 연애와 결혼, 출산은 하나같이 어려운 숙제다. 지연씨가 대학을 가지 못했던 이유도 돈 때문이었다. “공부도 잘 못했고, 돈이 없으니 부모님도 저한테 대학 가란 말을 할 수가 없었지요.”

안 생겨요, 연애할 마음

박기호(21·가명)씨도 돈이 없어 대학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지방 전문대와 4년제 대학 2곳에 합격자 후보 10순위 안에 들었지만, 추가 합격 여부를 확인해보지도 않았다. “한 살 터울의 누나가 전문대에 다녔는데 집에서 ‘돈 없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당장 음악을 하고 싶기도 해서 대학은 안 가겠다고 했죠.”

기호씨는 201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올라와, 신림동 고시촌에 보증금 100만원, 월세 35만원짜리 원룸을 구했다. 대구에서 석 달 동안 고깃집 서빙 알바를 해서 보증금을 마련했다. 서울에서 구한 첫 알바도 고깃집이었다. 월 60만원만 받고 8~9개월을 일했다. 손님이 적을 땐 40만원밖에 못 받았다. 친구랑 월세며 각종 공과금을 나눠내고 나면, 달랑 20만원이 남았다. 밥은 식당에서 대충 때우기 일쑤였다. 그나마 월세가 밀려 보증금도 까먹었다. 지난해 겨울부터는 아는 형의 전셋집에 월 15만원을 내고 얹혀산다. 3평짜리 작은 방이지만 “지금까지 산 집들에 비하면 최고”다.

밴드 베이스 연주자인 기호씨는 알바로 생활을 꾸린다. 서울대 안에 있는 음식점에서 오전 9시~오후 6시에 일해서 버는 월급은 100만~120만원 남짓. 월세, 교통·통신비, 식비, 의료비 등 한 달에 쓰는 생활비 112만원가량을 대기에는 빠듯하다.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도 종종 생긴다. 두 달 전에는 휴대전화를 잃어버렸고, 최근엔 병원비가 들었다.

지난 8월12일 지하철 2호선 신림역 근처에서 만난 그는 흰 약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사랑니를 오래 방치해 잇몸이 많이 부었다. 충치도 있다”고 의사는 진단했다. 금니를 씌우려면 42만원이나 든다. 일단은 2만원 드는 사랑니 치료밖에 할 수가 없다. 기호씨는 시급이 좀더 높은 편의점으로 일자리를 옮길 생각이다.

대학교 안에서 일하다보니 상대적 박탈감도 많이 느낀다. “친구들 만나서 같이 밥 먹거나, 해외여행 가려고 알바하는 또래들을 보면 부럽죠.” 그런데도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안 생긴다. 마지막 연애는 몇 달 전에 끝났다. “연애 초기엔 영화를 보든지 밥을 먹든지, 만나면 다 돈이잖아요. 요즘엔 여자를 만나는 것도 좀 꺼려져요.”

대구에 있는 부모님께 손 벌릴 형편은 안 된다. 기호씨가 서울로 올라온 지 며칠 만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다. 8급 구청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결국 퇴직했다. 자동차부품 회사에서 가끔 부업을 하던 어머니는 아버지 간호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기호씨는 정부 정책에는 잡히지 않는 ‘사각지대’에 있다. 아르바이트 일자리만 전전하기 때문에 취업자 또는 구직자로 분류되지 않는다. 이렇게 취업이나 학업을 포기한 니트(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과 졸업유예자 등 ‘사회 밖 청년’ 인구는 456만2천 명으로, 전체 20대의 48.1%에 이른다(30쪽 표3 참조). 하루 한 끼 컵라면만 먹던 나날

기호씨의 서울 생활은 ‘라면과의 전쟁’이었다. 일자리를 구하는 첫 달에는 친구와 라면만 먹었다. 그것도 값이 싼 안성탕면이나 삼양라면만 먹었다. 가끔 동전을 긁어모아 짜파게티를 사먹었다.

라면 이야기를 하다가 신미희(23·가명)씨도 왈칵 눈물을 쏟았다. 인천에 사는 부모님 댁에서 독립해 나왔던 2013년 4월 무렵의 서럽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갑에 7만원이 있었는데,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오려면 2~3주를 버텨야 했거든요. 하루에 2천원꼴로 써야 했죠. 그런데 충청도 외진 곳에 있는 학교가 멀어서 셔틀버스가 없는 시간대에는 꼭 지하철역에서 택시를 타야 해요. 그래서 학교 안 가고 알바하면서 하루 한 끼 컵라면만 줄곧 먹었어요. 살이 엄청 빠지더라고요.”


미희씨는 ‘빈곤’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여러 기준 항목으로 보면 청년 빈곤, 맞죠. 그런데 그렇게 낙인찍혀버리는 순간 ‘쯧쯧’하고 혀 차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요.”

긴 생머리로 눈물 어린 얼굴을 숨긴 채 미희씨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희씨는 졸업까지 1학기 남은 휴학생이다. “고시텔에서 살던 2년간은 라면만 먹고 살았어요. 일주일에 이틀은 라면만 먹었던 것 같아요.”

배고팠던 기억도 서글프지만, 얼마 전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에 더 울컥했다. 데이트하면서 남자친구가 “뭐 먹자”고 하면 호주머니를 걱정해 “밥 먹었다”고 거짓말하곤 했다. 생활비는 대형마트에서 맥주·와인·생리대 판촉일을 하면서 받는 일당으로 충당했다. 오후 1시에 출근해서 9시간 동안 근무하면 적게는 6만5천원, 많게는 8만원까지도 받을 수 있다. “부모들이 공부 진짜 열심히 시키지 않으면 이렇게 24살까지 마트 알바나 하고 있는 거야”라는 정규직의 비아냥을 견디면서 버는 돈이다. 하지만 고시텔 월세 33만원을 포함한 생활비를 감당하기엔 벅찼다.

미희씨의 아르바이트 인생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시작됐다. 대형마트,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등등을 전전했다. 아버지가 회사에서 실직한 뒤 편의점을 여러 곳 운영하다가 망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마지막 편의점 문을 닫았다. 수천만원의 빚이 남았다. 미희씨는 7학기 대학 등록금을 모두 학자금 대출로 충당했다. 총 2800만원이다. 지금도 월 4만원씩 꼬박꼬박 이자가 나간다.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는 미희씨의 꿈은 비정부기구(NGO) 취업이다. 연봉 2400만원대의 괜찮은 NGO는 대기업만큼이나 들어가기가 어렵다. 초조한 마음에 일반 사무직 원서도 수십 군데 넣었다. 그중에서 6~7곳에 면접을 보러 갔지만 취업에 성공하진 못했다. 취업 공고와 달리 막상 면접을 보러 가면 “주말에 당연히 출근하고 평일엔 밤 11시에 끝나는데 세전 120만원밖에 못 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금을 받는 청년인턴 모집 공고를 낸 한 기업에선 ‘노예계약서’나 다름없는 근로계약서를 들이밀었다. 결국 미희씨는 부모님 집에 들어가 취업 준비에만 전념하기로 결정했다.

“힘내라”고만 하지 말아요

미희씨는 ‘빈곤’이라는 단어가 불편하다. “여러 기준 항목으로 보면 청년 빈곤, 맞죠. 그런데 그렇게 낙인찍혀버리는 순간 ‘쯧쯧’ 하고 혀 차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요.”

정부와 정치권이 때마다 청년을 무대로 불러내지만, 청년은 항상 대상화된다. 동정이나 훈계의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소비의 목적이거나. 다은씨는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그런 이름짓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다은씨 남자친구는 “가진 게 있었어야 포기하지”라며 맞장구쳤다.

아라씨는 “포기가 익숙하다. 포기가 이제 슬프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익숙하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말했다. 지금 청년들의 현실은 잿빛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들의 푸른 정신과 마음마저 온통 잿빛인 것만은 아니다. 지연씨는 “청년들 힘내라고만 하지 말고 (이 상황을 바꾸려면) 어떻게 하자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안산=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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