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이라는 단어는 동전의 양면 같다. 한쪽은 젊은이라면 모름지기 갖춰야 할 덕목이다. ‘당신의 열정을 보여달라’ ‘열정 있는 인재를 찾습니다’. 기업 채용 공고나 하다못해 요즘 유행하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열정이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는다. 긍정의 언어다. 다른 한쪽은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수단이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주면서 열정으로 버티라고 어르는 식이다. 이건 노동시장의 ‘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청년창업자들도 비슷하다. 취업이 어려우니 창업하라고 잔뜩 부추겨놓고는 ‘너는 좋아하는 일을 열정적으로 하고 있으니 돈 따위에는 연연해하지 말라’고 한다. 지독한 부정의 언어다.
최근 ‘열정 페이(pay)’가 잇따라 입길에 올랐다. ‘열정 페이’란 열정과 급여(pay)를 합친 신조어로, 열정을 핑계 삼아 짜디짠 급여를 주는 사용주들을 비꼰 말이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열정 페이 계산법’의 예시는 이렇다. ‘당신은 어차피 공연을 하고 싶어 안달 났으니까 공짜로 공연하라.’ ‘당신은 경력도 없으니까 경력도 쌓을 겸 내 밑에서 공짜로 엔지니어를 해라.’ 패션·영화·공연·벤처 업계 등에서 일하는 수습 또는 인턴들이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 대다수는 교육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근로기준법의 적용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초저임금만 받고 일한다.
지난 2월5일 소셜커머스 업체인 ‘위메프’의 박은상 대표이사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고개를 숙였다. ‘열정 페이’와 ‘채용 갑질’ 논란에 대한 사과였다. 위메프는 지난해 12월 직원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최종평가 전형에 오른 11명에게 2주간 영업 업무를 맡겼다. 이들은 일당 5만원을 받고 하루 14시간가량씩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며 계약을 따냈다. 위메프는 이들이 계약한 상품을 판매했지만, 11명 중 1명도 채용하지 않았다. 시급 3천원을 주면서 영업만 시킨 꼴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 위메프 불매운동이 번지자, 서른넷의 젊은 대표이사가 직접 진화에 나선 것이다. ‘청년 착취 대상’이라는 불명예를 안은 패션디자이너 이상봉씨도 사과문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 1월29일 상을 수여한 패션노조, 알바노조, 청년유니온 등과 만나 재발 방지 대책을 논의했다. ‘패션계 열정 페이 문제 해결을 위한 대토론회’도 열기로 했다. 패션노조 등 3개 단체는 이씨가 견습직원에겐 월 10만원, 인턴직원에겐 월 30만원을 주는 등 청년들의 열정과 노동을 착취해왔다고 비판한 바 있다. 3개 단체는 열정 페이의 온상인 패션업계 전체를 뜯어고칠 태세다. 지난 2월11일 이들은 패션계 인턴들의 떼인 열정과 떼인 돈을 받아준다는 캠페인을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열었다.
사실 견습이나 인턴에 대한 노동 착취 문제는 하루이틀 된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벌집을 건드린 듯이 여론이 따갑다. 왜일까?
사상 최악으로 치달은 청년층 고용 사정과 무관치 않다. 통계청이 발표한 지난해 15~29살 청년층 실업률은 9%. 38만5천 명의 청년이 4주 이상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했지만 직장을 구하지 못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10.9%에 이어 최고치다. 세계 금융위기로 경기가 바닥을 쳤던 2009년(8.1%)보다도 높다. 더구나 처음 취업한 일자리가 1년 이하의 계약직인 청년 비율도 19.5%나 됐다. 비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한다 해도, 다섯에 한 명은 비정규직 일자리로 들어가는 셈이다.
열정은 하나의 ‘스펙’이 됐다. 이력서에 한 줄 더 쓰기 위해서, 저임금에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난 이유다. 나의 열정을 어떻게 포장하고, 취업 면접관에게 잘 보여줄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이처럼 취업 전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열정은 하나의 ‘스펙’이 됐다. 이력서에 한 줄 더 쓰기 위해서, 저임금에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이들이 늘어난 이유다. 나의 열정을 어떻게 포장하고, 취업 면접관에게 잘 보여줄 수 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열정은 본디 뜻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다.
열정 페이로 청년들을 이용하는 건 악덕 사용주만이 아니다. 정부도 여기에 숟가락을 얹었다. 열정적인 청년들이여, 창업에 나서라!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 정책의 핵심으로 창업 활성화를 꼽는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창업 인프라를 만들고, 대학들은 ‘창업휴학제’를 도입하거나 창업 관련 강좌를 2~3배 늘리는 등 측면 지원 이다. 대기업과 금융권도 각종 창업 인큐베이터를 설립했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는 전국 17개 시·도에 대기업들이 짓는 창조경제혁신센터가 문을 연다. 대구(삼성), 충북(LG), 광주(현대자동차), 대전(SK), 경남(롯데) 등 면면이 화려하다. 정부가 등 떠밀고 대기업들이 앞에서 끌어주며 ‘창업’ 바람을 억지로 일으킨다.
이 덕분인지는 몰라도 통계청이 집계한 청년 자영업자 수는 지난해 6만4천명으로 2012년(7만9천 명)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2013년(4만8천 명)보다 늘었다. 지난해 1~11월 30살 미만의 젊은 사업주가 설립한 법인이 3494개로 2011년 (2547개)보다 다소 증가했다(중소기업청 자료). 성공한 청년사업가들의 열정은 펄떡펄떡 생생한 사례가 된다.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에서 튀긴 감자를 파는 ‘열정감자’로 시작해 지금은 찜닭집, 고깃집, 카페 등 11개 매장에 직원 35명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한 ‘청년장사꾼’ 김윤규(28) 대표, 6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떡볶이를 팔다가 프랜차이즈로 성공한 ‘봉구스 밥버거’ 오세린(30) 대표 등등.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심이 똬리를 튼다. 혹시 청년실업률을 낮추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정부가 취업 대신 창업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려는 속셈은 아닐까. (웅진지식하우스)를 쓴 한윤형씨는 “정부가 취업률 통계를 왜곡하기 위해 창업으로 등 떠밀고 있다”고 말했다. “창업에 열정을 투여하는 것 자체를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열정 노동을 만드는 착취 구조를 비판하지만 ‘열정’이라는 그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창업의 성패를 가르는 게 열정이 있고 없고가 아니니까 문제다.” 몇 년 사이 부쩍 늘어나 자생하는 한 무리의 또 다른 열정가들이 있다. 사회를 바꾸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혁신가. ‘체인지 메이커’라고도 불린다. 이들은 교배종이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일반 청년창업가와, 시민사회단체나 정당 활동가의 DNA를 모두 갖고 있다. 이들의 일터는 사회적 기업, 소셜벤처, 공유경제 기업 등이다. 현재 국내에 인증받은 사회적 기업은 1251곳, 인증받진 않았지만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설립된 소셜벤처는 어림잡아 4천여 곳으로 추산된다.
[%%IMAGE2%%]20대 소셜벤처 창업가들은 ‘열정 창업’ 분위기를 어떻게 생각할까? 대학생 정다운(26)씨는 지난 1월 법인 설립신고를 마친, 따끈따끈한 소셜벤처 창업가다. 그는 대전에서 소셜벤처들의 ‘코워킹(협업) 공간’인 ‘벌집’을 운영하는 플랫폼 사업을 시작했다. “요즘 청년창업 붐이 있어서인지 얼마나 힘들고 성공 확률이 낮은지는 생각하지 않고, 스티브 잡스 신화를 꿈꾸며 막무가내로 창업에 도전하는 경우도 많다.” 출퇴근 시간에 카풀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마튼폰 애플리케이션 ‘히처’를 개발한 ‘웁스랩’의 권영인(28) 대표도 “창업 네트워크 모임에 가보면 확실히 연령대가 낮아진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취업이 안 되니까 창업하자고 하기엔 만만치 않다. 20대는 인맥 관리나 회사 경영 등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1살 때부터 소셜벤처 창업에 뛰어든 ‘시지온’의 김미균(29) 대표도 “예전엔 창업이 두려워 선택지에도 없었다면, 이제는 취업이 어려우니 청년층이 창업을 대안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진단했다. ‘시지온’은 악성 댓글을 막기 위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댓글 서비스를 개발한 소셜벤처로 직원 25명, 연간 매출 10억원이 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열정 페이’와 ‘열정 창업’ 넘어“자본주의는 청춘들에게 꿈을 꾸라고 강요하고 그 꿈을 실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거의 공짜로 착취한다. 꿈은 자본주의가 청춘에 깔아놓은 가장 잔인한 덫이다. (중략) 여전히 문제의 핵심은 노동 구조이다. 이 깨달음이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돼지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이 청년들의 미래가 적어도 ‘배는 고프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엄기호 추천사) 소셜벤처 창업가들은 ‘배고프지 않은’ 소크라테스가 되고자 길을 나선 이들이다. 이들이 품은 열정의 대상은 자신의 성공만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라는 밖을 향한다. 그래서 그 열정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언어로 읽힌다. 소셜벤처를 ‘열정 페이’와 ‘열정 창업’의 논란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만들어갈 여지는 없을까. 자본주의가 깔아놓은 덫을 피해갈 방법은 없을까. 이 이미 그 길을 걸어갔던 이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봤다.
이어진 기사 보기 ▶ 멈추지 않고 달릴 자신 있나요? (제1050호 2015.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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