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나 같은 사람한테 해당 사항이 있나.”
일거리를 찾으러 나온 김상수(57·가명)씨는 ‘정치’ 얘기를 꺼내자 자꾸만 등을 돌렸다. 그는 자신이 언제 마지막으로 투표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 보니 정치는 다른 세계였고, 투표는 남의 일이었다. 손사래를 치던 김씨는 자리를 뜨며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우리야 한 달에 120만원만 받을 수 있어도 참 좋지.”
서울 가리봉동과 구로동이 만나는 남구로역 3번 출구 일대는 남부권 최대의 인력시장으로 통한다. 김씨처럼 하루치 일당을 벌기 위해 매일 새벽 남구로역 앞을 찾는 일용직 노동자가 하루 250명에서 많게는 500명에 이른다. 하루 일당 6만5천원. 소개비 5천원과 왕복 교통비를 빼면 실제 하루에 손에 쥐는 돈은 많아야 6만원이다. 새벽 5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추위에 떨며 일한 대가로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래도 일을 잡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분명 ‘싸인지’(일종의 근로계약서)에는 7만원이라고 돼 있는데 왜 6만원밖에 안 줘. 거기서 용역비 떼고 차비 떼면 얼마 남는다고. 나 안 해. 일 하루 안 한다고 뭐, 없으면 깨끗이 들어가는 거야.”
어둠 속에서 일당을 놓고 ‘팀장’이라는 사람과 실랑이를 벌인 40대 강아무개씨는 물었던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끄며 발걸음을 홱 돌렸다. 강씨처럼 호기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침 6시30분까지는 인력사무소를 들락거리며 어떻게든 일을 찾아보려 애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가리봉동에 사는 이형기(49·가명)씨는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된 걸 모르는 눈치다. “투표야 시간이 있으면 하고 싶지. 근데, 뭔 선거가 있나? 이렇게 나와서 물어보는 것 보니까.”
곁에서 발을 구르며 추위를 쫓고 있던 사내가 거들었다. “일자리 좀 많이 만들어주고, 여자들도 직장 생활 편하게 할 수 있게 애들 맡길 곳을 좀 많이 만들어주면 좋지. 그런데 그게 어디 나 혼자 바란다고 되간디. 투표야 당일 가봐서 기분이 내키면 하겠지, 뭐.” 결론은 정치에 대한 냉소와 무관심이다. 일부는 처음부터 그랬고, 몇몇은 배신감에 등을 돌렸다. 멀리 동이 트기 시작했다.
정치로부터 소외된 계급, 이들은 ‘얼굴 없는 시민’이다. 어떤 제도권 정당도 이들을 대표하지 않는다. 이들 또한 어떤 정당에도 기대를 걸지 않는다. 부유층과 빈곤층의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가속도를 더해갈수록 ‘정치적 양극화’도 덩달아 심해지고 있다. 조만간 출간되는 노동운동가 손낙구씨의 책 (후마니타스 펴냄·이하 )은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연구서다. 서울과 경기, 인천 등 수도권 1186개 동네를 대상으로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를 비롯한 각종 통계와 2004년 총선 및 2006년 지방선거 등 최근 치러진 주요 선거 결과를 모아 분석했다. 메시지는 뚜렷하다. △부유층과 빈곤층은 자신의 계급에 따라 투표한다 △대다수 빈곤층은 투표하지 않는다 △계층 간 종교적 분화가 분명하다 등이다.
먼저 계층과 투표 여부의 상관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서울에서 투표율이 가장 높은 동네 10곳과 가장 낮은 동네 10곳이 있다(표1 참조). 이를테면 2004년 총선에서 양천구 목6동은 동네 유권자의 4분의 3이 투표에 참여했다. 강남구 논현1동은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투표를 포기했다. 2006년 지방선거에서 송파구 잠실7동은 동네 유권자의 3분의 2가 투표한 반면, 논현1동은 3분의 2 이상이 투표를 포기했다. 두 집단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투표율 높은 동네, 한나라당 지지도 높아투표율이 높은 10개 동네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부자 동네’라는 사실이다. 84%가 자기 집을 갖고 있었다. 송파구 잠실7동과 문정2동은 동네 사람 가운데 90%가 주택 보유자다. 무주택자는 1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투표율이 가장 높은 10곳 중 무주택자가 가장 많은 강동구 둔촌1동에서도 무주택자 비율은 27%밖에 되지 않았다. 주택 소유 여부와 함께 거주하는 주택의 종류도 계층을 나누는 주요 기준이다. 투표율이 높은 10개 동네 가운데 6곳이 100% 아파트 동네였다. 전체 아파트 비율은 98%로 나타났다. 그 밖에도 이들 10개 동네는 대체로 1인 가구(7%)도 적고 (반)지하 등 열악한 거주 환경의 가구(1%)도 드물었다.
투표율이 낮은 10개 동네의 사정은 정반대였다. 가구를 기준으로 했을 때 무주택자 비율이 평균 74%였다. 강남에 있지만 논현1동은 전체 가구의 75%가 무주택자이고 1인 가구 비율이 48%에 이르렀다. 역삼1동도 전체 가구의 80%가 무주택자였다. 이들 지역은 아파트보다 단독주택이 압도적으로 많고, (반)지하 주거 비율도 10~13%로 투표율이 높은 10개 동네의 평균(1%)보다 월등히 높았다. 주택 소유자가 그나마 많은 동네인 강북구 미아2동도 무주택자가 절반을 넘었다(55%).
주거 형태도 투표율에 따라 천양지차였다. 투표율이 낮은 10곳에 사는 사람 가운데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율은 5%에 불과했다. 서민의 보금자리는 단독주택이었다. 76%가 단독주택 아니면 다세대주택에 살았다. 17%는 (반)지하나 옥탑, 쪽방에 살고 있었다. 전체의 43%가 1인 가구였다.
학력과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투표율이 높은 동네일수록 학력이 높고 종교 인구가 많았다면(64%), 반대의 경우 학력이 낮고 종교 인구 비율도 낮았다(49%).
투표율에 따른 주거 및 학력의 양극화는 그 범위를 518개에 이르는 서울 모든 동네로 넓혀도 비슷했다. 남승우씨는 강남구 논현1동과 역삼1동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낮은 투표율을 기록한 구로구 가리봉2동에서 구의원을 두 차례 지냈다. 남씨의 투표율 분석이다.
“지역 주민 가운데 건설 일용직 노동자가 많아요. 하루하루 일해서 수입을 얻어야 하니까 투표에 참여하는 게 쉽지 않죠. 또 하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좀 큽니다. 상대적으로 소득과 생활 수준이 워낙 낮아 정치를 통해 자신의 소득이 올라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아예 하지 않는 겁니다.”
특히 관심을 가질 부분은 투표율과 정당별 득표율의 관계다. 결과적으로 말해 2004년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 등 두 차례 선거에서 투표를 많이 한 동네일수록 한나라당 득표율이 올라가고, 투표를 적게 한 동네일수록 민주당(열린우리당 시절 포함) 득표율이 올라갔다. 무주택자 비율이 높고, 주거 환경이 열악하며, 주민의 학력이 낮은 지역일수록 민주당 득표율이 높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저소득층이 보수 정당에 투표한다는 ‘계급 배반 투표’ 이론을 뒤엎는 결과다.
서울의 전체 동네를 투표율순으로 나열해 다섯 묶음으로 나눠, 투표율이 가장 낮은 묶음을 1분위(하위 20%), 가장 높은 묶음을 5분위(상위 20%)라 정하면 좀더 이해하기 편하다(표2 참조). 한나라당은 투표를 가장 적게 한 1분위 104개 동네에서 가장 낮은 득표율을 보였는데, 2·3·4분위로 투표율이 올라가면서 득표율도 함께 증가하다가 투표를 가장 많이 한 5분위 104개 동네에서 최대 득표율을 올렸다. 민주당은 그 반대였다. 1분위 동네에서 가장 득표율이 높았고, 5분위 동네에서 표를 가장 적게 얻었다. 한나라당을 많이 찍은 동네는 투표도 많이 했고, 민주당을 많이 찍은 동네에서는 투표를 포기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투표 않는 동네엔 셋방 떠도는 사람 많아”민주당으로서는 아주 고약한 일이다.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2008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였다. 당시 진보·개혁 진영이 지지한 주경복 후보는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17곳에서 이겼다. 반면 공정택 후보는 강남·서초·송파 등 이른바 강남 3구에서 몰표를 얻었다. 최종 승리는 공 후보 몫이었다.
서울에서 민주당 득표율이 높은 대표적 동네가 종로구 창신2동이다. 이곳에서 민주당은 2004년·2006년 선거에서 평균 56%를 얻었다. 서울에서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문제는 투표율에 있었다. 창신2동의 투표율은 2004년 60%, 2006년 51%에 그쳤다. 전국 평균 수준이거나 약간 못 미치는 결과였다. 최악은 아니었지만 ‘표밭’에서 최대한 차이를 벌려야 하는 선거의 속성상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임성수 민주당 창신2동 당원협의회장은 정작 정권을 잡은 뒤가 문제였다고 진단했다.
“창신2동은 호남에서 올라온 저소득층이 모이는 동네였습니다. 1997년 DJ를 당선시킬 때까지만 해도 그야말로 호남향우회를 중심으로 끈끈하게 뭉쳤죠. 그런데 DJ 당선시키고, 이어서 노무현 정권까지 출범시켰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2006년 지방선거 때였나, 여당은 개헌이다 뭐다 정치 논리만 앞세우고 대신 한나라당이 민생을 강조하고 다녔어요. 그러니까 지지층이 떨어져나간 면이 있다 이겁니다.”
창신2동에 대거 들어서 있던 봉제공장이 경기를 탄 것도 한 이유였다. 지난 2005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창신동 일대를 재개발촉진지구로 지정했다. 그런데 후속 조처가 나오지 않았다. 사업이 차일피일 미뤄지며 상권이 죽어나갔다. 임 회장은 “창신2동 젊은 사람들이 대개 거기서 밥 벌어먹고 살았는데, 일이 끊기니까 급속하게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거래에 익숙한 ‘적극 투표층’를 보면 민주정부 10년을 거치면서도 수도권 주민의 주거 현실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수도권에 집 가진 사람의 절반은 평균 5년에 한 번씩, 셋방 사는 사람의 절반은 2년에 한 번씩 이삿짐을 싸고 있다. 전체의 3분의 2가 평균 5년에 한 번씩 이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이상 한집에 사는 사람은 100가구당 17가구에 불과했다. 손낙구씨는 “수도권에서 무주택자 비율이 평균 이상인 547개 읍·면·동에 사는 선거권자 768만 명 가운데 투표에 참가한 사람은 442만 명으로 투표율이 58%에 못 미쳤다”며 “수도권에서 투표에 잘 참여하지 않는 동네가 있다면 분명 집 없이 셋방을 떠도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가 주목한 지점은 바로 여기다. 수도권 하층의 불안정한 주거 현실이 정치의식 성장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요인이라는 주장이다.
“정치 공동체로서의 ‘마을’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정주 시스템이 필요하다. 복지든 교육이든, 아니면 일자리 정책이든 자기 마을에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논의할 수 있는 구조가 있어야 하는데, 2년에 한 번씩 다른 지역으로 셋방을 옮겨가야 하는 현실이라면 공론 형성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가 바빠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면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배제되는 면도 있다.”
이런 가운데 ‘얼굴 없는 시민’을 대변해줄 유력 정당은 없었다. 2005년 뉴타운 지구로 지정된 뒤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창신2동 사례가 그랬다. 임성수 회장의 증언이다. “2008년 4월 총선 때였죠. 내가 증거도 가지고 있는데, 그때 박진 한나라당 의원이 선거를 이틀 앞두고 막판 굳히기 작전에 들어갔어요. 그때 내놓은 게 ‘뉴타운 용적률을 높여주겠다’ 이거였습니다. 집 가진 사람들의 뉴타운 분담금을 덜어주겠다는 소리잖아요. 막말로 여기 집 가진 사람이 많습니까, 보증금 없이 월세 15만원을 주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까. 대다수 세입자를 위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대다수 세입자’에 해당하는 창신2동 주민은 정치적 요구를 조직하는 데 익숙지 못했다. 대신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밥 먹여준다’는 확신을 가진 이들이 등장했다. ‘이해관계’를 매개로 똘똘 뭉쳐 투표에 열심히 참가하는 사람들이다. ‘적극 투표층’으로 분류되는 이들은 ‘거래’에 익숙했다.
강남 부유층으로 대표되는 이들에게 한나라당은 종합부동산세와 양도소득세 감면으로 보답했다. 2009년 세제 개편안을 내놓을 때도 정부는 서민·중산층에 감세 효과가 더 많이 돌아갈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조승수 진보신당 의원이 국회 예산정책처에 의뢰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감세 혜택을 가장 많이 입는 쪽은 고소득층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나라당은 대신 저소득층 복지 정책에는 인색했다는 평가다. 2009년 12월 경기도 교육위원회가 초등학교 무상 급식 예산을 전액 삭감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모두 11명인 경기도 교육위원은 전원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서울 중랑구 면목2동에 사는 이명수(55·가명)씨는 폐가전제품을 매입해 재활용업자에게 넘겨 생계를 꾸리고 있다. 1t짜리 고물차 한 대가 유일한 재산이다. 3층 다가구주택의 반지하 방 2칸에서 부인과 아들 둘, 그렇게 네 식구가 살고 있다. 보증금 1천만원에 월세는 25만원이다.
이씨가 사는 면목2동에는 9780가구 2만8517명이 산다. 이 가운데 전체의 18%인 1768가구가 이씨와 마찬가지로 반지하에 산다. 2008년 총선에서 이씨와 그의 이웃들인 면목2동 유권자는 절반 이상이 투표를 하지 않았다. 이씨는 민주당을 찍었다.
“우리 같은 서민을 위한다고 하니까 찍었죠. 물론 민주당이 꼭 서민을 대표한다고는 안 봅니다. 그래도 한나라당보다는 서민을 좀더 위해주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반영이 안 돼 그렇지 정치에 대한 기대가 없는 건 아닙니다. 당장 우리 아들도 한 놈은 군대에 있고 한 놈은 대학생인데, 취업 제대로 하려면 중소기업을 살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려면 대기업 중심인 한나라당보다 민주당이긴 한데, 모르겠습니다. 투표를 한다면 민주당 찍을 확률이 80%는 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바로 헌법 1조의 내용이다.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는 대표적 수단은 투표다. 그래서 투표율은 민주주의의 건강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지표다. 2008년 4월9일 치러진 18대 총선의 투표율은 46.1%였다. 2004년 17대 총선(60.6%)에 비해 14.5%포인트 떨어진 수치다. 17대 때보다 유권자가 220만 명 늘어났지만 투표에 참여한 국민은 되레 421만여 명 줄었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국민이 모두 2042만여 명이었다.
2010년 6월2일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이씨는 투표를 하게 될까? ‘얼굴 없는 시민’의 경계를 오가는 이씨에게 꼭 맞는 정당이 나타나느냐 여부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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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진 기자 csj@hani.co.kr·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 민주당 지지층 이사가고 쫓겨나고▷ 계급정당, 계급색이 없네
▷ “비투표자를 대변할 차이를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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