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 인터뷰에 출연하려고 대선 후보가 지하철 5호선을 타고 가던 때가 있었다. 그를 수행했던 스물일곱 살 청년은 방송사 위치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할 만큼 어리바리했다. 대선 후보는 생방송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잘못 내린 지하철역에서 방송사까지 아파트 화단과 횡단보도를 10여 분간 전속력으로 내달릴 만큼 절박했다.
방송사 못 찾던 대선 후보와 수행 비서
그들에겐 검은색 리무진도, 차 문을 열어줄 운전기사도 없었지만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는 독자적인 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열정 하나로 마음만은 충만했다. 훗날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과 ‘박용진 민주노동당 대변인’이 된 두 사람을 비롯해 열정으로 뭉친 ‘진보 정치인’들은 2000년 1월30일, 마침내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다며 민주노동당의 문을 열었다. 창당 선언문에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80%를 대변하는 정당으로서 노동자와 소외계층의 이익을 지키고 참된 정치개혁을 실현하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제도권 정당으로서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해 총선에서 득표율이 2%에 미치지 못해 정당 등록이 취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전국연합 등 사회단체의 적극적인 동참과 지속적인 당원 확대 사업으로 2002년 당원은 2만 명을 넘어섰다. 그해 6·13 지방선거에선 기초단체장 2명, 광역의원 11명, 기초의원 32명을 당선시켰고, 처음 실시된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전국 득표율 8.13%(134만여 표)를 기록해 광역시도 9곳에서 비례대표 의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2004년 총선에선 국회의원 10명을 국회에 입성시켜 창당 이후 최고의 ‘황금기’를 맞았다.
“2004년 총선날, 개표 방송을 보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당사가 좁아 국회 앞 사거리에 대형 화면을 설치하고, 빔프로젝터를 쏴 방송을 봤다. 권영길·조승수 두 사람이 지역구 당선이 확정됐을 때 환호성이 터져나왔고, (비례대표 순번 10번으로) 개표 막판까지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했던 노회찬이 당선됐을 땐 흥분 그 자체였다. 당원은 물론, 직장을 마치고 늦게 합류한 지지자들까지 국회 앞 한 맥줏집을 ‘점령’한 채 밤새 기뻐했다. 그날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다.”(민주노동당에서 탈당한 진보신당의 한 당원)
누구도 예상 못한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지지는 신기루였을까? 2004년 총선 직후 20%를 넘나들었던 당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떨어져 이듬해부턴 내내 한 자릿수에 머물렀다. 2005년 10월 재·보궐 선거에선 조승수 의원의 울산 북구를 한나라당에 내줬다. 2006년 지방선거에선 모두 801명이 출마해 광역·기초의원 81명이 당선됐지만, 단체장 당선자는 없었다. 10월엔 전·현직 당 간부가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일심회 사건’이 터졌다. 2007년 대선에서 받아든 성적표는 3%(71만여 표). 참담했다. 선거 참패의 책임을 놓고 민주노동당은 엄청난 분란을 겪었고, 결국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분당으로 이어졌다.
지난 10년 동안 겪었던 진보 정당의 이런 부침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노동운동가 손낙구씨는 민주노동당이 계층적 지지 기반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 부자·고학력층은 한나라당, 서민·저학력층은 민주당이라는 구분이 가능하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지지층은 자산·거주형태·학력 등 계층별 특성과 정당 지지 사이에 뚜렷한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는다.
손낙구씨의 저서 을 보자. 2004년 총선에서 서울·경기 등 수도권 읍·면·동 1164곳에서 민주노동당이 얻은 평균 득표율은 13%였다. 이 가운데 평균 이상으로 민주노동당에 지지를 보낸 동네는 501곳(평균 지지율 15%)인데, 이들 지역 거주 가구의 56%가 주택 소유자다. 반대로 민주노동당 득표율이 평균에 미치지 못하는 동네 663곳(평균 지지율 11%)의 주택 소유자는 55%다. 주택 소유자 비율이 거의 같다. 거꾸로 주택 소유자의 비율이 수도권 평균인 56%보다 높은 617곳에서 민주노동당의 득표율은 전체 평균 득표율과 같은 13%였다. 주택 소유자 비율이 평균보다 낮은 547곳의 득표율은 14%였다. 민주노동당을 많이 찍은 곳이건 적게 찍은 곳이건 주택 소유자 비율은 별 차이가 없고, 집을 가진 사람이 많건 적건 민주노동당 지지율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정치 상품에 대한 기대 충족 실패”서민층 분포와 관련 있는 지표인 1인 가구와 지하·반지하 거주 가구 비중으로 따져보면 어떨까? 민주노동당을 평균보다 높게 지지한 501곳과 평균 미만으로 지지한 663곳의 1인 가구 비중은 19%로 같고, 지하·반지하 가구 비중은 각각 8%와 10%로 2%포인트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또한 지하·반지하 가구가 수도권 평균보다 많은 498곳과 평균보다 낮은 555곳에서 민주노동당에 보낸 지지율에도 차이가 없다. 서민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도 민주노동당에 ‘유별난’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런 현상은 아파트 거주 여부, 학력 수준, 종교, 투표율 등의 변수로 분석해도 마찬가지다. 계층적 특성과 민주노동당 득표율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는 이런 현상은 2004년 총선과 2006년 지방선거에서 반복됐다. 달라진 건 서울에서 3%포인트, 인천에서 2%포인트씩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빠졌다는 것뿐이다.
민주노동당 당직자 출신의 한 인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풀이했다. “2004년의 높은 득표율·지지율은 ‘탄핵 후광 효과’와 민주노동당이라는 ‘새로운 정치 상품’에 대한 기대에 크게 힘입었다. 이후 지지율이 하향 곡선을 그린 건, 이런 거품이 빠진데다 진보 정치를 맛보게 해달라는 기대감을 당이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민주노동당 지지율은 민주당(참여정부 당시 열린우리당) 지지율과 동반 상승하거나 동반 하락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2004년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한 열린우리당 역시 2006년 지방선거에선 지고 말았다. 민주노동당 내 일부 세력조차 창당 시기엔 ‘시기상조론’을 근거로 민주당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했을 만큼, 두 당의 정체성 차이는 크지 않은 것으로 비쳤다. ‘보수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한나라당에 반대한다는 명분이 같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개혁 세력’이 잘 하면 ‘진보 세력’도 따라 지지받고, 못하면 같이 비판받는 상황이 전개됐다. 문제는 민주당에 비해 민주노동당의 지지기반은 확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원내 진출 2년 동안 민주노동당은 지지층이 누구인지, 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파악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지지층 이탈을 불러왔다는 진단이다.
물론 고민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2007년 초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은 “당이 원론에만 맴돌 뿐, 서민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당 정책을 구체화하지 못했다. 서민 생활 속으로 더 들어가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현장과 당 활동을 일치시켜야 한다”며 ‘반성과 청산’을 주장한 바 있다. 노회찬 당시 의원도 “당장의 현실이 버거운 사람, 월소득 150만원 이하의 사람들 사이에서 민주노동당 지지율이 한나라당에 밀린다. 비정규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민들에게 희망을 못 주고 있다”는 지적을 반복했다. 하지만 ‘실천’은 뒤따르지 않았다. 건강한 리더십도 구축되지 못했다.
조현연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부소장)은 저서 에서 “‘좋은 정치’의 실현이란 민중들의 삶의 문제를 구체적인 정책 대안으로 조직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파라는 이름의 ‘운동권 동창회’ 집합소였던 민주노동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한마디로 민주노동당은 ‘대중 정당’이 아니라, 자주파(NL)와 평등파(PD)가 노선 투쟁이나 당내 소권력 투쟁을 벌이는 ‘운동권 단체’였다는 통렬한 비판이다. 자기 정파의 지지를 얻어 주요 당직을 맡거나 정파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골몰한 나머지 ‘보통 사람’의 생각과 동떨어진 일들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분당 뒤에도 운동권만의 관심사에 골몰대표적인 게 민주노동당이 국가 비전으로 내세운 ‘코리아 연방공화국’ 논란이다. ‘코리아 연방공화국’은 경제가 최대 화두였던 2007년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이 처음으로 발표한 공약이었다. 다수파인 자주파의 목소리가 관철된 결과였다. 평등파는 “통일보다 자녀 교육비나 돌아오는 카드 결제일이 더 큰 관심사다. 현 단계의 통일은 떡도 밥도 아니다”(조승수 당시 진보정치연구소장)라고 반발했다. 언론은 ‘코리아 연방공화국’의 내용보다 두 정파의 다툼을 보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당연히 ‘표’를 쥔 대중의 관심에선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지적엔 민주노동당도 공감한다. “소외된 계층에 관심을 갖지 못한 채 내부 정파 갈등, 내부 정치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원내 진출이라는 하늘이 준 기회를 놓쳐버렸다”는 게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위원장의 얘기다.
운동권만의 관심사에 골몰한 건 분당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명박 정권 퇴진 운동’을 당론으로 확정한 민주노동당 방침을 놓고선 핵심 당직자조차도 “황당하다. 정당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들이라면 정책으로 승부하고 선거에서 심판받아야지…”라며 혀를 찬다. 진보신당은 “새로운 진보, 진보의 재구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재벌 비판에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뻔한 원인과 대안을 내놓는 데 그치고 있다고 지적받는다. 어느 쪽도 서민이 믿고 의지할 대안 정당, 찍으면 내게 이익이 될 정당이라는 믿음은 주지 못한 채 한 자릿수 지지율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진보 정당은 지역에서 주민의 삶과 호흡하는 데도 서툴렀다. 박용진 진보신당 강북구위원장은 두 당 모두를 비판했다. “당원은 집회 때 ‘머릿수’를 채워주는 존재밖에 안 됐다. 당이 지역 주민들이 뭘 원하는지 늘 귀기울이고, ‘손에 잡히는 복지정책’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진보 정당이 이렇게 힘들어졌을까? ‘우리가 당신들 편입니다, 입당하세요’라는 ‘5천원(최소 당비)의 신뢰’조차 만들지 못한 정당이 무슨 진보 정당이냐.”
진보 정당엔 미래가 없는 걸까? 대선 이후 분당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선택은 크게 네 가지였다. 남아 있거나, 떠나 진보신당·국민참여당으로 옮겨가거나, 아예 정당에 가입하지 않거나. 다들, 대중 정당으로 길을 잡지 못한 결과물인 분당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서민의 이해를 진짜로 반영해줄 진보 정당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무당파’로 남은 광주의 전 당원은 “진보적 가치를 대중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된 건 민주노동당 활동의 큰 성과다. 이젠 그 가치를 어떻게 실현할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도부의 복잡한 셈법과 달리 당원 혹은 당원 출신들은 이번 지방선거가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으니 정책에 기반한 선거 연합을 통해 ‘진보 정당표 정책’을 국민이 경험하도록 하고, 실력을 인정받으면 한발한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당원들은 지방선거를 기대하고 있어
이들의 기대가 현실이 될지, 꿈에 그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살아남으려면 이겨야 하고, 이기려면 자신들이 누구의 대리인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기러기떼의 선두는 뒤따르던 기러기들이 자기가 가는 방향과 조금 떨어진 방향으로 이동하면 즉시 그 쪽으로 이동해 앞장선다고 한다. ‘20 대 80’ 사회인 이 땅에서 80%가 과연 어디를 보고 있는지, 진보 정당이 다시 살펴야 할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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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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