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조용한 교정에 ‘뻥뻥’ 소리가 울려퍼진다. 경기 고양시의 한 중학교 교문 앞에는 20여 명의 학생이 일렬로 ‘엎드려뻗쳐’를 하고 있다. 학생주임 선생님은 땀까지 흘려가며 학생들의 엉덩이를 때리는 중이다. 그가 손에 쥔 것은 두께 2cm, 길이 1.2m의 오동나무 주걱이다. 주걱은 엉덩이에 맞춤하게 들러붙는다. 얇은 교복 치마와 바지가 허벅지에 휘감기며 살이 부르르 떤다. 가끔은 선생님의 손이 학생 뺨을 때리기도 한다.
7조 2항 학교에서의 체벌은 금지된다
선도부장인 김명진(15)군에겐 매일같이 반복되는 악몽 같은 순간이다. 중학교 3학년인 그는 매일 아침 7시50분부터 ‘감시’를 시작한다. 뒷머리가 셔츠 깃에 닿거나 앞머리가 눈썹을 넘어선 남학생을 잡아내야 한다. 머리가 어깨에 닿는데도 하나로 묶지 않았거나 염색을 한 여학생도 놓쳐선 안 된다. 가슴에 명찰을 차지 않았거나 교복을 줄여 입은 이들도 호출이다. 아무 죄 없는 학생까지 고개를 숙인 채 교문을 들어서며 선도부원의 시선을 피한다. 뭐라도 걸릴까 가슴이 뛴다.
선도부장을 시작할 때만 해도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심정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청소년인권활동가로 활약해온 그는 선도부장 활동을 통해 학생 인권 문제를 더 잘 살펴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막상 매일같이 ‘인권침해 가해자’로 살자니 힘들었다. 그는 “인권 의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친구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선도부장으로 살아가니 이율배반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광주에서 한 여중생이 자율학습을 빼먹었다는 이유로 발바닥을 지시봉으로 110대 맞은 뒤 집에 돌아와 자살했다. 신체적·정신적으로 직접적인 학대를 가하는 방식인 체벌은 학생인권 침해의 대표 사례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지난 1997년과 2003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의 학교에서 공식적인 체벌이 이뤄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고, 정부가 나서 학교에서의 체벌 금지를 위한 구체적인 이행 절차를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2006년에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 아동폭력에 관한 유엔보고서를 채택하며 “학교, 가정, 사회, 일터 등에서 아동에게 폭력이 만연한 이유는 폭력을 훈육의 한 형태로 관대하게 바라보기 때문”이라며 “아동 폭력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폭력이 일어나기 전에 막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선도부장 일을 하며 괴로워하던 김군은 지난해 4월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을 공약으로 내세운 교육감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다. 5월 말에는 학생인권조례안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2학기가 되자 관련 홈페이지도 생겼다. 11월 초, 홈페이지에 ‘학생참여기획단’ 모집 공고가 떴다. 그즈음 그는 학생부장 선생님 책상 위에서 경기도교육청이 발송한 ‘체벌 금지 공문’을 발견했다. 공문보다 힘이 센 걸 만들어야 학생주임 선생님의 매질이 멈추리라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는 곧바로 기획단에 참여했다. 모집 공고가 나간 지 일주일 만에 경기도 내 초·중·고 학생 4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지난해 12월17일 경기도교육청이 발표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초안)’은 이렇게 모인 학생참여기획단이 교장·교사·교수·인권단체 활동가 등 13명으로 구성된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제정 자문위원회’와 함께 만든 것이다.
학생참여기획단은 카페(cafe.daum.net/youthhuman)를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기획단의 역할은 ‘의견 제시’와 ‘조례 홍보’였다. 자문위원회가 미션을 제안하면 기획단이 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활동이 이뤄졌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을 읽고 소감 쓰기, 우리 학교 인권 점수 매기기, 학생인권조례 기초안 읽고 의견 달기 등의 미션이 ‘의무’이자 ‘권리’였다. 학생들이 제시한 의견은 한데 모여 자문위원회로 전달됐다.
학생참여기획단 안에서 학생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서로의 비슷한 상처였다. 사는 곳과 학교는 달라도 고민은 닮은꼴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동갑내기 김근영양과 정우미양은 ‘심화반’에 상처를 받아왔다. 경기 안양에 사는 정양은 전교 30등까지 들어가는 심화반 학생이다. 경기 수원에 사는 김양은 전교 40등까지 들어가는 심화반에 들어가지 못했다. 심화반과 평반을 가르는 복도에는 싸늘한 공기만 가득했다.
심화반에 들어가지 못한 김근영양은 얼마 전 심화반에 있는 친구와 싸웠다. 봉사활동에 대한 ‘고급’ 정보나 교육청에서 내려오는 공문 등이 심화반 게시판에 먼저 걸리는 것이 못마땅했는데, 수학 보충수업 교재까지 다른 것을 확인하니 화가 났다. 심화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자 친구는 “나는 뭐 좋아서 있는 줄 아느냐”며 화를 냈다. 한참을 싸우다가 결국 둘 다 울어버렸다. 심화반 때문에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김양의 꿈은 간호사다. 원래는 의사였다. 아직 수능까지 1년이 남았지만 의대는 꿈꾸지 않는다. 심화반에 들지 못한 채 살았던 지난 1년은 그에게 체념하는 법을 가르쳐줬다. “학생인권조례가 생겨도 선생님들의 마인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성적 차별은 계속될 것 같아요.” 김양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는 학생인권조례를 통해 성적으로 차별받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정우미양은 “1년 동안 심화반 학생으로서 다른 친구들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순간에 특권을 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심화반은 다른 반보다 모든 면에서 쾌적했고 수업의 깊이도 달랐다. 그러나 복도에 나가면 늘 평반 학생들의 기분 나쁜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게다가 심화반이라는 이유로 선생님들은 학생 관리를 더 철저하게 했다. 심화반 학생이 야간자율학습을 한번 빠지려면 ‘담임·담당·학생부장’ 3명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담임 선생님의 허락만 있으면 야자를 빠질 수 있는 평반에 비해 부당하다고 항의하자 “너네는 심화반이잖아”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다음 학기부터 심화반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생님한테 말한 상태다. “솔직히 심화반에 있는 아이들도 괴로워해요. 다들 있고 싶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모여 있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는 것도 아니에요. 서로 상처만 받고, 누구를 위한 심화반인지 모르겠어요.”
18조 3항 학교는 학생회의의 소집 및 운영 등 학생들의 자율적인 자치활동을 보장하여야 한다
학생들은 자치권에도 목말랐다.
얼마 전 경기 파주시에 사는 고등학교 1학년 장혜린(16)양은 큰맘 먹고 학교 선생님에게 따져 물었다. “선생님, 0교시 참가신청서 받으면 뭐해요? 어차피 전부 강제로 하게 되는 것 아니에요?” 그의 질문에 선생님은 아무런 답을 해주지 않았다. 다른 선생님을 잡고 다시 물었다. 그 선생님은 “대학 가고 싶으면 잠자코 따라오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0교시는 강행됐다. 정시에 온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졸고, 지각한 학생들은 매를 맞는 악순환 속에서도 0교시는 유지됐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학생들의 자치활동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인권이 보장되리라 기대하기는 어렵다”며 “자치 활동을 통해 학생들은 민주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수 있고 자신들의 참여를 통해 학교가 변화하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은 학교에 주인의식을 갖게 되고 자율과 책임을 지닌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치권도 자율권도 초라하다. 장양의 학교는 방학 중에도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의 보충수업과 오후 1시부터 5시까지의 자율학습을 실시했다. 학원에 다니는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참석해야 한다. 그나마 학기 중에는 실시되던 급식이 방학 중에는 없다. 매점도 문을 열지 않는다. 학생들은 12시 점심시간이 되면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라면이나 김밥으로 한 끼를 때운다. 이것 또한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학급 반장인 장양은 0교시와 보충수업 문제에 대해 학생회 차원에서 문제제기를 했으면 한다.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 학교 쪽에 전달하고 싶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학생회는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은 지 오래다. 학생들의 의견이 학교에 반영되도록 하는 장치가 아무것도 없다. 그는 “반장을 계속하고 싶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반장이라면 무엇 때문에 존재하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조례에서 학생 자치권을 보장해주길 열망했다.
12조 1항 학생은 복장·두발 등 용모에 있어서 자신의 개성을 실현할 권리를 가진다학생인권조례 초안이 발표된 뒤 논란의 초점은 △체벌 금지 △휴대전화 소지 허용 △학내 집회의 자유 보장 △야간자율학습 강제 금지 △두발 자유 등에 맞춰지고 있다. 이 다섯 가지 주제는 자문위원회 안에서도 논란이 많은 항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학생들의 초미의 관심사다.
조례 초안은 ‘학교는 두발의 길이를 규제하여서는 아니된다’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마저도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두발의 길이만을 명시해 아쉽다”는 것이다.
경기 수원시의 고등학교 2학년 김유라(17)양은 학교의 복장 검사에 분통이 터진다고 했다. “하루는 교문을 들어서는데 머리를 제대로 안 말리고 왔다고 한 친구를 잡아내는 거예요. 스타킹을 안 신고 온 친구도 벌점을 받았고요.” 이상한 마음에 교칙을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머리를 말리고 등교해야 한다거나 교복에는 스타킹을 착용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그는 “모호한 두발·복장 기준으로 선생님들이 마구 벌점을 주고 체벌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교칙을 만드는 데 학생이 참여할 수 없으니 분통을 터트리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과거 월요일에 국민교육헌장 낭독과 국기에 대한 맹세로 시작하는 애국조회, 학교와 거리에서의 두발 단속 등은 국가가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규제하고 훈육하는 병영국가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장발 단속이 횡행하던 1970년대 길거리에서 가위로 머리를 잘리던 풍경은 2010년에도 교문에서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두발 제한은 한국 인권침해의 오랜 숙제다.
지난 2008년 2월, 경기 광명시의 한 기숙고등학교 옥상에서 수백 개의 종이비행기가 날아올랐다. 두발 규제, 소지품 검사 등 인권침해에 반대하는 학생 200명의 시위였다. 종이비행기에는 “당연한 권리가 지켜지지 않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겁한 침묵이 아닌 용감한 저항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에 학교는 교내 방송을 통해 두발 제한 방침에 변함이 없음을 알렸다. 경기도 학생들 사이에서는 ‘아름다운 시위’로 손꼽히지만, 당시 학부모와 교사들은 “징계받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라”고 했다. 학생인권조례에서 학생들의 집회결사권을 보장한 내용은 보수 언론이 가장 많이 공격하는 부분이다.
17조 2항 학생은 수업시간 외에는 평화로운 집회를 개최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보수 언론의 공세는 노골적이다. 초안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해 12월19일, 는 1면 기사에서 “전교조의 지지로 당선된 경기도교육청 김상곤 교육감이 추진하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에 교내 집회를 허용하고, 학생들 두발 길이를 규제할 수 없도록 하는 내용 등이 담겨 논란이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학생인권조례와 전교조, 김상곤 교육감을 묘하게 엮는 내용이다. 하지만 김상곤 교육감은 투표 당시 42만2302표(40.81%)를 얻었으며,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제정 자문위원회에 참여하는 교장·교감·교사 등은 모두 전교조가 아닌 교총 소속이다.
지난해 12월25일 는 보수 학부모 단체로 알려진 ‘좋은 학교 만들기 경기학부모모임’ 등이 조례 제정 반대 기자회견을 연 것을 ‘학생인권조례로 아이들을 모두 운동권 만들 셈인가’란 제목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세간의 뜨거운 관심에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학생참여기획단 카페에는 “이해할 수 없다. ‘학생 인권, 두발 자율화, 체벌 금지’라는 말에 조례안은 읽어보지도 않고 ‘뭔 소리야! 학생은 무조건 공부지’라고 생각해서 반대하는 건 아닌지? 정치적 이유로 학생인권조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나가 죽으세요”(comora)라는 격앙된 글까지 떴다. 학생참여기획단에서 활동 중인 고등학교 1학년 박성용군은 “이번 인권조례가 교권을 약화시킨다고 보는 어른들의 시각을 극복하는게 가장 시급하다”며 “학생들을 아직 정신적·신체적 미성숙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집회의 자유와 인권을 주는 것에 교사들의 지도권이 약해진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활동가는 “모든 사람이 집회·결사의 자유를 갖는데, 여기에 학생은 빠져있다”며 “학생들이 자신들의 요구에 대해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도 학교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을 듣지 못할 경우 평화적인 집회를 열어 의견을 개진하는 일은 민주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좋은 경험이 된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생각은 어른들보다 이미 한참 앞서 나가고 있다. 심화반이 고민이었던 정우미양은 “조례 초안에 5명의 인권옹호관을 둔다는 조항이 있는데, 경기도 학생 수를 생각할 때 고작 5명이 학생들을 위한 실제 업무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저소득 가정 학생, 장애 학생 등의 인권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인 조항을 요구했다. 그는 “조례를 만드는 데 참여해보니 ‘현실의 벽’과 동시에 ‘미래의 가능성’을 느끼게 됐다”며 “조례가 당장 제정되지 못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0조 2항 학교는 학생에게 야간자율학습, 보충수업 등을 강제하여서는 아니된다
박성용군은 0교시 직후 친구들이 모두 엎드려 자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었다. 사용자제작콘텐츠(UCC)를 만들어 10월 말 경기도교육청이 주최한 학생인권조례제정 학생 작품 공모전에 출품했다. 상은 못 탔지만 작품을 준비하면서 학생 인권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심화반 수업을 강요하지 않고 강제 야간자율학습도 금지하는 ‘방과후학교 운영계획’까지 내놨지만, 일선 학교의 강제 야간수업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조례가 제정되면 야간자율학습 등을 강요한 학교는 신고를 받은 인권옹호관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된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과정에서 박군은 또 다른 색다른 경험을 했다. 경기도 내 9개 지역별로 학생·학부모·교사·관리자 등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만든 ‘학생인권조례제정 사전협의회’에 지난해 10월 말 어머니 이종희(52)씨와 함께 참석한 것이다. 어머니 이씨는 보수적인 편이다. 집에서는 와 를 구독하는데 는 부모가, 는 아들이 주로 본다. 2008년 아들이 촛불집회에 간다고 할 때도 위험하다며 말렸던 이씨다. 이번 학생인권조례도 탐탁지 않다. 는 조례가 아이들을 ‘정치꾼’으로 만든다고 했다. 아들이 정치적 문제에 휩쓸려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까 걱정이다.
그는 학부모 사전협의회에 참석해 “체벌 금지는 찬성하지만 야간자율학습이나 보충수업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학내 집회 허가는 어린 학생들에게 시기상조인 것 같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반면 아들은 사전협의회에서 “현재 두발과 복장을 규제함으로써 개성을 실현하지 못하고, 자율학습은 자율이 아니며, 집회 금지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는 의견을 냈다.
집에 오는 길, 아들은 어머니에게 “지금의 교육이 학생들에게 획일화된 생각을 가지게 한다”고 말했다. 논쟁이 오고 간 뒤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다.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이제 보니 많이 컸구나.” 어머니는 조금씩 아들이 뭔가를 선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이후 모자는 함께 학생인권조례와 관련한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토론도 자주 한다. 그 자체가 모자에게는 큰 변화다.
1조 이 조례는 학생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각 학교의 자율적인 교칙에 맡겨도 될 것을 왜 굳이 ‘조례’까지 제정하려는 것일까? 자문위원회는 그 이유를 “수사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하더라도 고문·불공정 수사를 해서는 안된다는 등의 ‘기준’은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한다. 학생 인권이 계속 침해당하는 상황에서 모든 학교의 환경을 인권친화적으로 만드는 데 있어 학생인권조례는 ‘기본’이 되어 줄 것이다.
2010년 1월, 한국의 학생 인권은 기로에 섰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다면 우리나라에선 첫 학생인권조례가 된다. 하지만 경기도의회가 조례안을 통과시킬 확률은 희박하다. 한나라당이 장악한 경기도의회는 김상곤 교육감 당선 이후 교육청이 낸 예산안과 법안 등이 지나가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12월30일 도의회는 ‘행정사무조사 특위 조사계획서’를 채택했다. 급식 지원 확대, 학생인권조례 제정, 시국선언 교사 징계 유보 건 등에 대해 도의회가 직접 교육청을 조사하겠다는 내용이다. 교육청은 “이번 조사특위는 조사 한계를 벗어난 월권행위로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곽노현 학생인권조례 자문위원장은 “20년 전 ‘교사도 노동자’라고 외칠 때와, 2010년 ‘학생도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같은 분위기”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가시밭길을 내다보며 하는 말이다. 동시에 가시밭길 끝에 이르러 당연히 쟁취하게 될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히 해주는 말이다.
눈 내린 운동장이 새하얗다. 학생들이 뛰어다니며 눈싸움을 한다. 하늘에서 내린 눈은 평등하게 아이들 어깨에, 발등에 와닿는다. 성별, 종교,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장애, 용모, 임신 여부, 성적 등에 관계없이 머리 위에 내린다. “우리도 사람”이라는 학생들의 외침은 어느새 눈처럼 소복히 쌓이고 있다.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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