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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난센스”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휴대전화 소지 문제 등 상세한 조문이 만들어진 건 직접적인 현장을 담았기 때문”
등록 2010-01-14 14:13 수정 2020-05-03 04:25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김상곤 경기도 교육감과 소주잔을 나눈 적이 있다. 2008년 봄, 어느 포장마차였다. 어묵 국물을 앞에 놓고 10여 명의 교수들이 둘러앉았다. 여러 토론으로 포장마차가 들썩였다. 당시 한신대 교수이던 그는 유독 조용했다. 일행 가운데 가장 말수가 적었다. 옅은 미소만 지었다.

얌전한 선비 같던 그가 경기도 교육감 후보로 나섰을 때, 적잖이 놀랐다. 교육자치단체의 수장이 치러야 할 간난신고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선 이후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무상 급식, 시국선언 교사 징계 거부, 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 등을 통해 교육자치의 지평을 넓히며 한국 교육계의 한복판에 섰다. 1월7일 오후, 경기도교육청에서 그를 만났다. 옅은 미소는 그대로인데, 말수는 늘었다. 문장마다 힘을 실어 말했다.

- 교육 현안이 많다. 그 가운데 특별히 학생인권조례에 열의를 보이는 이유가 있나.

= 교실이 붕괴하고 있다. 즐거운 배움의 장소가 아니라 아픔을 주는 장소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학교 관리 방식으론 이를 해결할 수 없다. 교육 공동체를 혁신하려면 교장·교감 등 리더십의 스타일도 바뀌어야 하지만, 학교의 모든 구성원이 제 역할을 소중하게 여기고 서로 존중하는 풍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서로 존중하는 유기적 관계를 이루면, 공동 목표를 달성하는 데도 최고의 효율을 발휘한다. 이는 경영학 이론의 기본이기도 하다(김 교육감은 경영학 교수 출신이다). 학생인권조례는 그런 맥락에 있다. 학생에 대한 존중감 위에서 교육 현장을 혁신하자는 것이다.

- 학생인권조례 초안은 대한민국 헌법, 교육기본법, 유엔아동권리협약 등에 명시된 조항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규범력을 갖춘 상위법이 이미 있는데, 여기에 더해 조례를 만들 필요가 있을까.

= 학교 밖에서 일어나는 청소년 문제는 경찰 등 여러 곳에서 관여한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는 기존의 법과 제도로 재단할 수 없는 구체적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지금 학생들이 여러 폭력에 시달리고 있다. 목숨을 스스로 끊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친구를 존중하는 게 아니라 경쟁 상대로 여기면서 배척하고 있다. 이를 해결하는 출발점은 학교 안에 있다. 학생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학교에서 지내야 한다. 짧은 기간 안에 학교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인권조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학생 인권이 왜 중요한지를 공유하고 나누는 일이다.

- 조례의 취지에 반하는 교장·교사·학부모·학생이 있다면 교육청이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있나.

= 조례는 그 자체로 학생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는 선언적 의미가 있다. 아울러 법과 제도의 연속선에서 규범적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는 조례에는 강제적 제재·징벌 조항이 없다. 조례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 각 학교에서 활발하게 토론한다면, 그것이 징벌 이상의 효과를 가질 것이다.

- 예를 들어, 어느 학교의 교장이 학생 두발 규제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린다면 어떻게 되나.

= 학교 구성원들이 완전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모아 나름의 생활규칙을 따로 정할 수 있다. 다만 교육청은 학교 현장에 대해 ‘장학 활동’을 해왔고, 할 수 있다. 올바른 의견 수렴 없이 일방적 기준을 만들었다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각 학교를 유도하는 역할을 교육청이 맡게 될 것이다.

- 교육청 조례는 도의회 의결을 거쳐야 한다. 한나라당 의원이 다수인 경기도의회가 이번 조례를 부결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 실제로 그런 우려를 하는 분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결국엔 공감대가 상당히 확산될 것으로 본다. 지금 나온 것은 자문위원회 초안이다. 여러 공청회를 거쳐 2월께 자문위 최종안이 교육청에 정식 제출될 것이다. 교육청 차원에서 다시 검토해 3월 무렵 도 교육위원회와 도의회에 제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문안을 조정하고 여러 교육위원 및 도의원과 긴밀히 소통할 계획이다.

- 도의회 의결을 거쳐야만 하는 ‘조례’가 아니라 교육청 차원에서 ‘학생인권선언’ 등을 채택해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우회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나.

= 선언이나 헌장은 학교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자세하게 담기 어렵다. 다만 학생인권조례와 별개로 그 문제의식을 헌장의 형태로 내놓는 방안을 함께 검토하고 있다. 동시에 교권 보호 헌장도 준비하고 있다. 학생과 교사가 서로 존중하는 미래 지향적 학교를 만들자는 취지를 두 헌장에 각각 담을 것이다.

- 조례가 지나치게 상세해 불필요한 논란을 자초한 것은 아닌가.

= 모두 48개 조항 가운데 구체적 사안을 다룬 것이 30여 개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소지 문제를 짚은 조항이 있다. 학생의 휴대전화 사용 문제는 학교 현장의 실질적 사안이다. 자문위원들은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느낀 직접적인 문제는 조문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

- 조례 초안은 집회·양심의 자유, 자치의 권리 등을 명시했다. 그런데 학내 폭력을 일삼는 학생들이 징계에 항의하는 집단시위를 벌인다면?

= 자문위 초안만 나온 단계이므로, 교육감인 내가 개별 조문을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다만 조례 역시 대한민국 법률의 테두리 안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일반 법률이 제재하는 부분은 그것에 의거해 조례를 해석해야 한다.

- 보수 언론은 중·고등학교에서 운동권을 키우려 한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문제’로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고 있다.

= 학생 인권 문제를 종합적·정책적으로 다룬 것은 우리 교육청이 처음이다. 당연히 여러 이야기가 나온다. 언론이 관심을 갖는 것도 바람직한 공론화 과정이다. 노파심을 갖고 여러 제안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난센스다. 우리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자유권 가운데 학교 현장에 필요한 내용을 추린 것이 학생인권조례다. ‘자유주의적’ 기초 위에서 학생 존중의 정신을 담으려 한 것이다. 이를 진보·보수의 잣대로 접근하면 불필요한 소모적 논쟁으로 흐르게 된다.

- 학생 인권 보호는 현장 교사의 인권 감수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 아무리 바람직한 조례가 만들어진다 해도 교장·교사·학부모가 인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공염불이 된다. 조례에 담긴 정신과 개별 조항에 대해 앞으로 교사·학부모와 많은 소통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그동안 한국 사회가 민주화됐다. 학생을 돌보고 이끄는 방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전근대적·강압적·통제적 요소를 씻어내지 못하면 우리 교육의 발전에 걸림돌이 된다. 통제 방식으로 학력을 향상시켰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 방식 자체가 이제는 한계에 달했다.

- 경쟁교육 방식을 신봉하는 교장·교감·교사에게 이번 조례가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 교육감이 되고 난 뒤, 학교 현장에서 많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게 됐다. 교장·교감들도 오늘의 교육 현실, 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적절한 방안을 덧붙이면 학교 현장을 변화시킬 수 있다. 다만 학력을 높이는 일과 학생 인권을 존중하는 일 사이에 미묘한 지점이 있다. 이를 조정하는 것도 결국 학생·교사·교장·학부모가 서로 존중하며 해결책을 함께 찾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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