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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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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국민통합을 팽개쳤다”

‘3인의 대부’ 연쇄 인터뷰①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편들기하는 시민단체는 결겨”
등록 2008-11-18 18:16 수정 2020-05-03 04:25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

 11월1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대흥동 ‘시대정신’ 사무실에서 안병직 이사장을 만났다. 2시간여의 인터뷰 말미에 그는 “시간이 좀더 있으니 더 물어보라”고 했다. 일평생 논쟁을 즐겨온 노학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정치사상과 현대사를 오가며 여러 이야기를 했다.

 

-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난 5월에 그만두셨다. 강단을 떠나 정치판에 몸을 담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정치권에서 이루고자 하는 바는 없었나. 뜻대로 정치인들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던지….

= 제도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국회의원 하나하나는 헌법기관으로 자립적 독립권력이다. 자립적 권력이니까 자율적으로 협력하고 경쟁하는 게 정치권의 본모습이다. 권위주의 체제라면 (위에서) 명령하면 움직이겠지만, 권위주의 체제가 아닌 이상, 상명하복관계는 본래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자신이 뭘 하고 싶다고 해서 명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나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이 자각 못하는 것도 그런 것 아니겠나. 자기 마음대로 정치권을 이끌고 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자신과 같이 하는 사람이라도 명령을 해서는 끌고 갈 수는 없다. 민주주의란 자립적인 권력의 연합이라는 점을 제대로 인식해야 정치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으로 영입할 때는 당에서도 바라는 역할이 있었을텐데.

= 연구소에 갈 때부터 누가 와달라고 해서 간 게 아니다. 내가 스스로 도움을 주려고 갔다. 그러니 나올 때도 누가 나가라고 해서 나온 게 아니다. 내가 필요해서 나온 것이지. 이사장은 본래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기본 임무인데, 자금조달능력이 없으니 ‘얼굴’이나 팔아준 것이지. 본래 그런 관계였으니, 그들이 나를 활용할 의사가 없으면, 내가 할 역할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그 자리에 더 머물러 있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내 스스로 내 얼굴을 그 쪽이 활용할 수 있도록 간 것일 뿐이다. 나한테 무슨 (역할을) 이야기한다는 게 어떤 포지션을 준다는 것인데, 나같은 사람을 대접할 그런 자리가 있겠나.

 

- 사상운동을 할 때에는 현실 변화를 도모하려는 뜻이 있었을테고, 정치권은 그것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일 수도 있지 않은가.

= 글쎄…. 여의도연구소에서 나의 뜻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본래부터 생각하지 않았다. 일을 하려면 좋은 생각이 있어도 예산과 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예산과 조직이 없다. 내 나이로 봐도 제도권 정치에 어떤 꿈을 갖고 그런데 가기에는 너무 늙었다. 나에게 할만한 일이 주어진다면야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없겠지만, 이 세상에 점잖게 앉아 있는 사람에게 그런 것을 가져다 바치는 경우가 있겠는가. 나요, 나요 하는 사람도 한 두사람이 아닌데. 나는 그저 나의 처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만약에 나더러 자리를 주면서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게 있느냐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살아있는 이상, 그게 싫다고, 하지 않겠다고 답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의 지위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을 하는 것이다.

 

- 만일 정치권에서 일을 맡게 된다면, 경제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건가.

= 전공은 경제학이지만, 지금 내 나이로 전공 살려서 일할 곳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경제학을 하면서 동시에 역사학을 공부했고, 사회적 경험도 있다. 거기에서 획득한 것을 쓴다면…, 사회철학에 관한 것, 한국 사회가 전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에 대한 정치경제적 방향 설정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실은 지금도 잡지를 내거나 학술활동을 하면서 그 일을 하고 있다.

 

- 최근 뉴라이트 재단에서 ‘시대정신’으로 이름을 바꿨는데.

= 그동안 뉴라이트 재단이라고 해왔지만 사실상 사단법인이었다. 대선이 끝난 상황에서 새로운 방향을 설정해야 했다. 종래의 운동방향만 갖고는 변화된 상황에서 활동하기 어렵다. 새로운 시민사회운동의 시대적 과제에 맞추기 위해 이름을 ‘뉴라이트 재단’에서 ‘사단법인 시대정신’으로 바꿨다.

 

- 운동 방향의 변화도 있나.

= 뉴라이트를 내걸고 활동했을 때는 진보정권으로부터 보수정권으로의 정권교체가 당면문제라고 생각했다. 이제 정권교체가 이뤄졌으니, 지금부터는 선진화를 이루기 위한 국민통합이 시대정신인 것 같다. 물론 정권교체 전에도 국민통합은 필요했다. 다만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국민을 보수다 진보다 하여 이념적으로 분열시키니 국정이 제대로 수행될리 없었다. 또 진보정권 아래에서는 햇볕정책 등 국정방향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국론을 통일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봤다.

이제 진보정권에서 보수정권으로 바뀌었으니, 국민의 이념적 분열을 치유하는 것이 급선무다. 국민이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갈등하면, 보수정권이건 진보정권이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국민들이 이념적으로 분열되면 정권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도 낮아질 수밖에 없는데, 노무현 대통령 때나 지금이나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율이 20% 전후이니, 정책은 헛돌아간다고 보아야 한다.

내각제에서는 국민지지율이 30% 이하로 장기간 고정되면 내각 총사퇴를 한다. 독재국가도 제대로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국민지지율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독재국가도 지지율이 30% 이하면 내각을 교체 한다. 그 상태로는 무슨 정책을 하건 정부를 백안시한다. 노무현 정권도 그랬지만, 지금은 국민 지지율이 20% 전후다. 이런 지지율 가지고는 어떤 정권도 정책 수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국민의 이념적 통합, 즉 국민통합이 지금의 시대정신이다. 그래서 단체 이름을 시대정신으로 바꾸면서 이념으로서 국민통합을 내세웠다.

 

- 뉴라이트라는 명칭 자체가 부담인가. 뉴라이트라는 기치의 효용이 다했다고 보는 건가.

= 뉴라이트를 기치로 내건 일 자체가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도 그 일은 해야 한다. 뉴라이트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뉴라이트운동은 그 자체로서 매우 의미가 있었다. 우선 뉴라이트는 올드라이트와는 달리 본래 의미의 자유주의를 이 땅에서 실현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그동안 좌파의 공격으로 허물어졌던 우파의 도덕성을 회복했다.

도덕성의 회복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뤄졌다. 첬재는 그동안 좌파의 공격에 의하여 허물어졌던 건국과 산업화의 정당성을 입증한 것이다. 둘째는 이제 결제발전과 민주주의가 실현된 이상 우파도 반공주의적/권위주의적 자유주의가 아니로 본래 의미의 자유주의를 이 땅에서 실천할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요컨대 그동안의 뉴라이트 운동은 건국, 산업화 및 민주화틑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에서도 모범적인 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우파의 도덕성을 회복시킨 것이다 .

그리고 뉴라이트는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반공주의와 권위주의가 극복되어야 하지만, 그것들은 그 시대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본다. 종래의 전통적 보수에서는 반공주의 및 권위주의가 기본적 국정방향이었다. 지금의 민주화 단계에서 그건 안된다. 반공주의적 자유민주주의나 권위주의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이 필요하다.

과거 건국이나 산업화도, 진보진영에서 말하는 것처럼 틀린 방향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도 그 나름의 시대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다만 건국과 산업화 시기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실천한다면서 내용적으로는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를 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있다. 제도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한다고 약속은 했지만 이에 필요한 내적 조건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자유민주주의를 하려면 두터운 중산층이 형성돼 있어야 하고 기업이 발달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조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세계적으로도 좌우 대립의 시기여서, 공산주의자들은 지하활동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전복시키려고 활동하고 있었다. 북쪽에는 (공산주의가) 강력한 세력으로 형성돼 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반공주의가 아니면 국가를 지킬 수가 없었다. 시장경제를 바로 시행하기에는 기업이 너무나 발전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는데, 이게 국가의 주도적 역할이 필요한 권위주의다. 북한을 비롯한 대한민국 전복세력이 강하고 아직도 중산층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반공주의가 불가피했고, 권위주의도 시장경제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상황에서 경제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여하튼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를 내용으로 삼았지만, 이게 본래적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아니다. 이제 건국 과정과 개발에 의한 산업화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성숙했다. 좌우의 사상적 대립도 상당히 완화됐고 두터운 중산층도 형성되고 기업도 발전했다. 그러니 이제 문자 그대로의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자, 이게 바로 뉴라이트다. 그 초점은 우파를 되살려서 정권교체를 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그건 이뤄졌으니까 새로운 정권 속에서 어떤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국민통합이다.

 

- 지난달 20일, ‘보수와 진보의 공생모델은 있는가’를 주제로 시대정신이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결과, 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나.

= 시대정신은 새 운동의 방향으로 국민통합을 내세웠다. 이게 이념통합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이미 국민통합의 조건이 성숙해 있다. 선진 각국의 예를 보면, 성숙된 산업사회와 시민사회를 갖춘 정치경제체제는 세계 어디서든지 자유민주주의(체제) 뿐이다. 예전에는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체제가 경합했지만 공산주의는 결코 완결된 체제가 아니란 게 세계사적으로 이미 증명이 됐다. 이제 한국도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달성해서 성숙한 산업사회와 시민사회가 됐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이외의 체제선택지는 없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내에서는 다양한 사상이 공존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기본사상은 자유주의인데, 자유주의는, 본질적으로 회의주의로서, 자기의 절대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다. 자유주의를 주장하면서도, ‘그러나 자유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옳은가’에 대해 회의하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칸트의 인식론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물의 본질은 신(神)만이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상이 틀렸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는 태도다. 그래서 자유주의 속에서는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이 존립할 수 있다.

그 체제가 자유민주주의 체제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그 체제의 기본이다. 이 기본 체제는 훼손하고 싶어도 훼손할 수 없다. 따라서 성숙된 산업사회와 시민사회가 되면 다양한 사상이 존재할 수 있다. 그 아래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사민주의, 심지어는 공산주의까지 있을 수 있다. 단 그 나라의 사회 기본을 자유민주주의 체제라고 규정한 헌법질서를 음모와 폭력을 통해 전복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은 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헌법체제를 승인하지 않으면 공존할 수 없다.

선진각국의 예를 보면, 정치이념으로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그 중심축을 이루지만, 자유민주주의헌법체제를 승인하는 한 공산주의도 허용된다. 본래의 자유민주주의체제에서 반공주의나 권위주의가 용납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다른 사상과의 공존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정치이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사화민주주의 같은 기본 이념 외에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다양한 사상이 공존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자유주의 세력은 먼저 반공주의와 권위주의를 반성하고 청산해야 한다. 반공주의나 권위주의는 자기와 다른 사상을 배제하니까, 본래 의미의 자유주의는 아니다.

 

- 시대정신으로 명칭을 바꾸기 전인 지난 6월, 뉴라이트 재단은 ‘자유주의 연대’와 통합했다. 통합 직후에는 산하에 선진화위원회와 북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조직 개편도 했는데.

= 우리 시대의 문제가 하나는 선진화이고 하나는 통일이다. 그래서 두 과제를 연구하는 기구를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잘 안된다.(웃음) 시민운동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순수하게 시민운동만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계에 진출하겠다는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게 현실이다. 이제 대선이 끝났고 다음 (선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그런 사람들로서는 힘이 좀 빠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힘이 빠져 있는 상황인 건 속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아직은 운동목표가 뚜렷하지도 않다.

 

- 조직개편과 명칭변경 이후 국민통합을 강조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를 구현할 계획인가.

= 지난번 토론회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참석했다. 국민통합은 그 자체로서도 매우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지만 선진화를 순조롭게 이루기 위한 하나의 필수조건이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선진화로 나아가는 것이 한국현대사의 발전단계인데, 선진화로 진입하기 위한 작은 단계가 국민통합이다. 그런데 나름 기대하고 문제제기했는데 전체적으로는 우리들의 문제제기에 대하여 아직은 반향이 크지는 않다.

지금 보수 진영에서는 국민통합문제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자유주의를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사회주의를 허용하겠다는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것 같다. 그들은 아직도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철현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진보진영에서도 회의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다시 말하면, 사회주의를 자유민주주의체제 내에 가두어 두려는 의도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성숙된 산업사회에서는 정치경제체제로서 자유민주주의밖에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 자유민주주의보다 더 좋은 이상적 체제를 구상할 수 있다고 공상하는 사람들이다. NL이거나 PD이거나 공상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 앞서 헌정체제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국민통합’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는데, 실제로 한국에 그런 이들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 그 숫자는 많지 않다고 본다. 진보진영 안에서도 숫자적으로는 많지 않다. 그러나 공산주의적 폭력음모에 의한 체제전복의 위험성은 아직 작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외부에 핵을 가진 북한이 있다. 김정일이 한번도 적화통일을 하지 않겠다고 공표한 적이 있는가. 여기에 민주노동당은 노골적으로 종북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 당 안에 있는 사람들 스스로 종북주의라고 한다. 얼마나 진정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게 결국은 김정일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을 종북주의라고 비판하고 나온 진보신당은 맑스레닌주의다.

그러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정당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해도 사상적 영향력은 진보진영 내에서 막강하다. 창비 그룹만 해도 체제 부정까지는 몰라도 변혁을 지향하고 있다. 한국에서 창비의 사상적 지도력은 막강하다. 그렇게 간단치 않은 문제다.

또 고등학교교재용 한국근현대사문제도 그렇다. 교과서는 기본체계가 민중운동사로 되어 있다. 민중운동사는 (현재의 남한) 체제는 뭔가 잘못돼 있으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왜 그렇게 보수와 진보간의 적대적 관계를 강조하느냐고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도 많은데, 현실에 눈을 감으면 현실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적대적 관계를) 강조하고 싶어서 강조하는 게 아니고. 현실을 현실대로 인식하지 않으면 문제해결이 불가능하고, 그렇게 되면 우리 모두가 불행해진다.

 

- 그런 세력은 결국 ‘보수-진보 공생’에서 배제되는 것인가.

= 폭력혁명을 시도하지 않는 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 그런 사람들도 다 (공생) 해야 하는데…. 민주주의 국가는 모두 함께 사는 공동체인데, 그 안에는 자유주의도 있고 사회주의도 있다. 다만 그 사람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인정하기만 한다면, 공동체 속에서 우정 관계가 성립한다. 공동체를 수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경쟁도 하고 협력도 할 수 있다. 우정적 관계를 토대로 하는 관용과 설득이 가능해진다. 이게 선진사회의 기본도덕이고, 민주주의적 접근이다. 대한민국 체제에서 합법적으로 존재하는 한, 항상 서로가 관용하고 설득하는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씨나 백낙청씨의 햇볕정책이나 남북간의 국가연합론에는 찬성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창비그룹이나 백낙청 선생이 주장하는 게 (남북) 국가연합인데, 이는 전혀 다른 두 체제가 상호 접근할 수 있다고 전제 하는 이야기다. 세계사적으로 다른 체제를 가진 국가가 연합해서 성공한 적이 없다. 남예맨과 북예맨은 국가연합을 시도했으나 결국 내전으로 끝났다. 그리고 국가연합론은 대한민국 체제의 일정한 변혁을 전제하지 않으면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이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엄청나게 두려운 문제다. 이러한 주장은 대한민국헌법질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질서에 막대한 혼란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그런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 공생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사상 또는 집단에 대한 잣대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 잣대가 가혹한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 어떤가가 문제이다. 생각이란 건 객관적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그걸 갖고 판단 해야 한다. 김정일이 대한민국을 부정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종북주의니까, 대한민국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논리적으로) 이상하다. 진보신당은 북쪽은 싫다는 입장이지만 대한민국을 변혁대상으로 삼는다. 백낙청씨도 변혁이 필요한 때에는 변혁해야 한다고 한다. ‘근대의 수용과 극복의 중도주의적 변혁’이 백낙청씨의 레토릭인데, 그 안에 그런게 내포돼 있다. 근대를 극복한다는 게 결국 대한민국 체제의 극복이다.

다만 현재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틀이 너무나 굳건하기 때문에 언어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변혁하겠다는 것이 말로서 끝나고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다면, 자유민주주의의 틀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 그들은 관용과 설득의 대상은 될 수 있겠으나, 그 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은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음모나 폭력을 통하여 대한민국체제를 부정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공생의 대상에서 당연히 제외될 수밖에 없다.

 

- 보수-진보 공생과 국민통합을 위해 앞으로 어떤 사업을 진행할 계획인가.

= 12월호에 우리의 새 이념을 국민들께 알리는 특집을 준비했다. 20일쯤이면 발간될 것이다. 이 내용을 들고 사회 각 단체들과 협의해봐야지. 우익도 만나고 좌익도 만나고…. 이미 사민주의자들과 공동으로 심포지엄까지 했다. 우리의 생활터전은 대한민국뿐이다. 북쪽은 붕괴되었다. 대한민국은 결함이 많은 사회이긴 하지만, 이걸 개선하는 방법밖에 없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다같이 이 공동체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데 동의해야 하고, 그런 방향으로 국민을 이끌어야 한다. 다양한 단체가 우정적 관계를 기초로 서로 관용하고 설득해야 한다. 대선 때처럼 정권을 두고 다툴 때는 특히 정치적으로는 경쟁이 치열해져서 서로 배제적 관계가 형성되겠지만, 사상에서는 배제적 관계가 있을 필요가 없다. 다양한 단체가 서로 우정적 관계을 가지면서 관용하고 설득하고 그렇게 하면 된다.

 

- 보수 진영 스스로 공생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는 건 어떤가. 진보진영이 계속 요구하는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진짜 헌정체제를 전복하려는 세력은 다른 형법으로도 처벌할 수 있지 않겠나.

= 나도 종래에는 (국가보안법을) 치안유지법 정도로 이해했는데, 알고보니 독일만 해도 체제보호법이 있다. 체제보호법은 사상을 처벌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알기로 현재 국가보안법도 공산주의사상 자체는 처벌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단만 국가전복활동이 문제인데. 남북이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정도는 있어도 괜찮은 것이 아닌가. 한국에서는 준법정신이 약한 것을 특징으로 하는데, 좌파에게 국가보안법이 위협적인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도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수호가 자기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김정일체제 하에서 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지 않은가. 그리고 김정일체제 밑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북한동포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런 정도의 국가보안법을 문제삼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나.

 

-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부자 내각’ 등의 비판을 받은 것은 기득권에 연연하는 기존 보수의 관행이 극복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비판이 있다. 결과적으로는 뉴라이트 운동이 올드 라이트를 철저히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도 있는데.

= 반공주의적·권위주의적 자유주의는 안 된다는 말에 올드라이트에 대한 비판이 다 들어가 있다. 가슴 아픈 일은 이런 주장을 가지고 올드라이트 쪽에서 뉴라이트가 자기들을 배제하려한다고 공격할 때다. 사람이 사람을 배제하는 일은 본래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고, 다만 올드라이트에 속했던 사람들도 변화된 상황 속에서 사상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고를 바꾸라고 했다. (뉴라이트 운동에서) 특정인을 배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진보나 보수가 모두 마찬가지이지만, 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이 사회를 만든 게 아니다. 상당 부분 국제협력에 힘입었다. 저개발 상태에서 ‘캣치업(catch-up)’ 과정을 통해 발전하는 국가는 내부적 역량뿐만이 아니라, 외부의 발전동력을 흡수하면서 발전한다. 이런 사회에는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 본래 제대로 된 지식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므로 그들이 근대화과정에서 발휘한 능력은 선진국으로부터 귀동냥한 것이 많다. 다시 말하면 캣치업에 의하여 형성되는 사회는 근대화 전이나 그 이후에나 전체적으로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이다.

진보진영이 보기에는 보수진영의 기득권이 엄청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는 그러하지 못하다. 이쪽에서는 진보진영이 엄청난 숫자와 튼튼한 자산을 갖고 있어 너무나 두렵다고 본다. 나는 가끔 보수진영의 유력인사들도 만나 볼 기회가 있는데, 그들의 수준은 지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대단한 것이 아니다. 또 보수진영에서도 진보진영을 필요이상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숫적으로는 보수진영보다 진보진영이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그럴만도 하지만, 진보진영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양쪽이 상대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필요한 대립이 격화되는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보수진영에서는 고등학교 교재 한국근현대사가 엄청난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과서는 무슨 대단한 사상적 배경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근현대사가 민중운동사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은, 물론 사상적 편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근현대사가 민중운동사를 중심으로 연구되어왔기 때문이다. 근현대는 결국 경제사회이고 이를 철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있어야 한다. 경제변동, 문화변동, 기술변동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지식이 (한국 역사학계에) 없다. 역사학의 옛 패러다임인 실증주의로 근현대사를 보니까, 결국 운동사의 관점 밖에 내놓을 수 없다. 그래서 근현대사 교과서가 운동사가 됐다. 한국 역사학계는 우리 근현대사를 집필할 수 있는 수준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근현대사를 위한 이론이 없다. 역사학과출신의 한국근현대사전공자는 정치학이나 경제학등 사회과학을 제대로 체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경제사는 쓰지 못하고 민중운동사밖에 쓸 능력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 교과서에 대해 비판하는 보수진영 사람들도 그런 것에 대한 지식이 없다. 양쪽에서 똑같은 기반을 갖고 싸우는 게 아니냐.

 

- 그렇다면 교과서포럼이 내놓은 는 그런 한계를 극복한 것인가.

= 그 책은 그런 걸 다 갖추고 있다.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썼다. 대안교과서는 현행의 검정교과서와는 달리 민중운동사의 체계로 기술된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형성발달사의 체계로 기술되어있다. 상대적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양자의 학문적 격차는 크다. 사회과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썼기 때문이다.

 

 

- 교과서 문제를 포함해 역사 논쟁이 소모적 양상으로 전개되는 면도 있는 것 같다. 예전에 ‘과거사 청산’ 문제에 대해 보수 진영은 소모적 역사논쟁으로 국력을 분열시킨다고 지적했는데, 최근 근현대사 교과서 논쟁도 결국 비슷한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가.

= 사실 관계를 두고 논쟁하면 해결의 길이 있지만 이념 논쟁으로 발전하면 해결이 안 된다. 나는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 시절의 과거사 청산에 대해 반대했다. 청산할 게 없어서 반대한 게 아니라, 청산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과거가 다 잘됐다는 게 아니다. 과거의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울 방법이 없어서 문제다.

우리나라의 근대는 저개발로부터 시작했다. 저개발은 모든 것이 부족한 상태다. 자본, 기술, 개인의 능력과 도덕성까지도 부족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무슨 일을 하려다 보면, 누구든지, 의도했건 안했건, 과오를 범할 수밖에 없다. 단순히 과오만으로 끝난 일이라면 청산하기 쉽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했다가 실패했다면 (그 사람들을) 처벌하는 게 말이 된다. 그런데 정당성이 결여된 사람들이 한 일의 결과가 성공적으로 나타났다. 결국 과오와 성공이 반반씩 섞여 있다. 공과가 섞여있을 경우 과오만을 들추어내게 되면, 국론이 분열될 수밖에 없다. 특히 과거사청산이 순수한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에 공로가 있는 사람을 표적으로 과거사청산이 이루어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과거사청산명분의 하나가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친일파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표적수사라는 혐의를 벗지 못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육군 중위 출신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친일파 사전에도 그래서 들어갔다. 그러면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을 일으킨 산업화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저개발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나라를 건설한 지도자들은 시행착오 때문에 대개가 과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과오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없다. 그 과오만 파내겠다? 이건 마치 어떤 이가 흉터 갖고 있는데, 그걸 낫게 한다고 핀셋 넣어 헤집는 것과 같다. 상처만 덧난다. 박정희대통령의 과오는 일본군 육군중위라는 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또 남노당출신이기도 하다. 왜 이것은 파혜치지 않는가.

모든 인간이 죄를 짓고 산다. 덮어줄만한 건 덮어줘도 된다. 그걸 들춰내지 않아서 국민정기가 상처받고 있다는데, 정말 그런가. 일제 시대의 매국노를 처벌하지 않아서 우리 국민이 무슨 상처를 받았나. 지금 살아있는 사람이 잘 해야지, 모든 허물을 과거의 사람에게 덧씌우는 것은 안된다. 노무현 대통령만 해도 ‘대한민국은 부정이 승리한 역사, 부끄러운 역사’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기 전에 자기가 잘하면 되는 거지.

자기반성 없이 남에게 원인을 떠넘기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 속의 친일파, 친미파가 있다 해도 가슴 아프게 끌어안고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나더러 친일파니 뭐니 하겠지만,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요즘같은 대명천지에 친일파가 어디에 있다는 건지…, 그런 이야기엔 신경쓰지 않는다.

 

- 개인을 처벌하지 않는다 해도 그런 과오가 있었다는 사실은 두루 확인하고 성찰해야 하지 않겠나.

= 그렇기 때문에 과거사청산은 역사학 연구자들에게 맡겨야 한다. 역사학자들에게 맡겨두면 된다. 국가가 도덕적 잣대로 (과거사 청산을) 하면 안 된다. 국가가 그런 능력과 자격이 있느냐.

 

- 최근 역사교과서 논쟁은 어떤가. 역사교과서야말로 역사학 연구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지금은 정부가 나서서 역사교과서를 수정하려 하는 것 같은데.

= 우리나라 국사학계의 형편상 근현대사 교과서를 쓰라고 하면 운동사 밖에 쓸 수 없는 여건이다. 그건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국사학계의 학문수준의 문제다. 지금까지 근현대사를 체계적으로 가장 잘 정리한 것이 북쪽의 민족해방투쟁사이다. 그 체계를 따라간 것이다. 이런 연구상황 하에서 새로운 근현대사의 체계를 세우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교과서 포럼이 펴낸) ‘대안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그런 점에서 새로운 체계로 씌여졌다. 대한민국의 형성·발달사의 체계로 이뤄져 있다. 우리는 지금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모범적 체계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공자에게 맡겨서 새 체계를 형성하기 어렵다. 국사학계에만 맡겨두면, 이러한 한국근현대사를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사학계의 수준이 그렇다. 정부가 나서서 새로운 한국근현대사를 편찬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국가가 개입해서 새 체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부 내부에는 그런 역량이 없으니,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을 발탁해서 교과서를 편찬하면 된다.

 

 

- 이 참에 여러 역사 교과서를 자유롭게 내고 ‘시장’에 맡겨 학교와 교사들이 선택하도록 하면 어떤가.

= 그게 제도적 문제가 있다. 현행 역사 교과서는 검정 과정을 거쳐야 하고 개정하는 단계도 있다. 단순히 시장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학문보다는 제도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정부가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정부가 보기에 교과서가 옳지 않다면 개입할 수밖에 없다. 제도적으로 정부의 지도에 따라서 (역사교과서를 서술)하게 돼 있다.

각 나라의 교과서편찬문제는 그 나라의 학문수준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미국의 경우엔 검인정 제도가 없다. 누구든지 쓰고, 채택하고 싶으면 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현대사에 대한 합의수준이 상당히 높아야 한다. 학문적 수준도 높아야 한다. 미국 같으면 학문적 수준이 높기 때문에 교과서편찬은 시장에 맡겨두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은 아직도 검인정제도이다. 우리나라 형편은 이미 이야기 한 바와 같다. 여러 가지 역사적 원인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인정하기에 주저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한국근현대사학계는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과서편찬을 시장에 맡겨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놔두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간다. 지금보다 더 편향된 교과서가 출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어렵다.

 

- 외부에서 보기에는 뉴라이트 운동을 대표하는 단체들의 차이를 구분하기 힘들다.

= 우리는 이미 단체의 명칭을 바꾸었으므로 이 문제에 대하여 발언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외부에서는 (단체들을) 구분 못할 거다. 그게 (외부자에겐) 당연한 일이기도 하고. 그런 점 때문에 우리 이름을 (뉴라이트 재단에서 시대정신으로) 바꾼 측면도 있다. 우리는 제도권 정치운동이냐 제도 밖의 정치운동이냐 사이에서 후자를 택했는데, 뉴라이트 전국연합은 본래부터 제도권 정치운동을 하려 했다. 그래서 이명박 후보 편에 섰다. 지금도 제도권 안에서 (운동) 한다.

그래도 시민단체인데 (언론에 의견) 광고나 내고 하면 안될거다. 시민운동에서 중요한 것이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고 전파해야지, 광고나 해서 편드는 일을 해서는 시민단체로서 결격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뉴라이트재단하고 뉴라이트전국연합하고 밖에서 구분 안된다고 하니…. 이름 바꾼 것은 그 점이 있다. 편들기 하는 그런 운동은 지양하자는….

원래 뉴라이트라는 이야기는 신지호하고 자유주의연대 쪽이 먼저 했다. 그 뒤에 다른 쪽으로 전파돼 갔다. 전파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으니. 원래 우리는 한반도선진화재단이나 뉴라이트전국연합 등과 공동연구를 한다거나 조직적으로 연계할 생각은 안 했다.

예를 들어 박세일 선생의 공동체 자유주의 이념에 대해 우리는 반대한다. 그게 형용모순이다. ‘뜨거운 냉수’라는 말과 같다. 공동체와 자유주의는 같은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레토릭일 수는 있어도 사상은 아니다. 다만 지금부터는 (연대를) 하려고 한다. 국민통합이라는 이념을 전파해야 할 단계니까, 서로 손을 잡고 시대적 과제로 제시해야지. 이제부터 만나볼 생각이다. 박세일 선생과는 만나서 이야기하려 한다. 다른 사람들은 사상을 창출하는 데 큰 도움이 안될 것 같다.(웃음)

 

-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보수 진영은 시민단체의 권력화와 좌편향을 주로 비판했다. 그 잣대를 현재의 뉴라이트 단체에 적용하면 어떤가.

= 내 원칙은 이렇다. 시민운동 하는 사람 가운데 정치지향적인 인물이 있을 수 있고 이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 자체는 적극적으로 살려주는 게 좋다. 그러나 제도권정치와 시민운동은 완전히 구분해야 한다. 시민운동을 하다가 제도권정치를 하고 싶다 되면 (제도정치에) 들어가서 하라는 것이다. 제도권정치는 편가르기가 불가피하지만, 시민운동은 공정성을 지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두 가지를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러면 시민운동도 안 되고 정치도 안 된다.

나하고 함께 운동하는 사람이 앞으로도 제도정치권에 들어갈 수 있다.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시민운동은 시민운동이다. 시민운동은 편드는 짓을 하면 안 된다. 그건 비판의 자유를 갖자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상은 이념에 기초하지만 이념에 구속되면 안 된다. 이념 때문에 자유를 잊으면 사상이 몰락한다. 사상운동하면서도 자기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 시대정신 그룹이 이명박 정부를 비판한 적이 있나.

= 이명박 대통령이 내건 대선 공약 중의 하나가 국민통합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면, 국민통합을 완전히 내팽개쳤다. 통합하려면 여러 가지 차원의 통합이 있어야 한다. 우선 당 내부의 통합 노력이 있는데, 제대로 안됐다. 보수진영의 통합도 안됐다. 그 다음에 야당과 정책적 협조도 안 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국민통합의 수단인데 안됐다. 각료라든지 청와대 참모 인선에서는 국민대표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하나도 반영되지 못했다. 우리는 그 점을 계속 비판해왔다.

국민통합에 실패한 결과가 광우병 파동이다. 광우병 그 자체는 실체가 없다. 미국은 1년에 소 1천만두 이상을 도축하는데,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수십년에 걸쳐 미국산 쇠고기 먹고 광우병 걸린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광우병 파동이 일어난 이유는 국민 내부의 이념적 분열이 있어서 그렇다. 언론 매체의 선동과 형편없는 쇠고기 수입협상이 광우병파동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 배후에는 국민의 이념적 분열이 있었다. 국민통합을 이루지 못한 것이 낳은 무서운 결과였다.

 

- 그러면 앞으로 국민통합을 이루는 방법은 있나.

= 우리가 지금 그 운동을 시작하는 단계니까 앞으로 어떻게 (국민통합이) 진행될지는 더 봐야 하는데…. 예전에 어느 공개 심포지엄에서 내가 지적한 게 있다. CEO 리더십은 효율성을 가장 존중한다. 일단 일이 주어지면 그 일을 가장 효율적으로 처리하는게 CEO나 행정가의 리더십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거기에 달인이다. 그런데 정치적 리더십은 그런 게 아니다. 국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사업의 효율적 처리가 아니라) 어떤 사업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부터 결정하는 것이다. 근데 이명박 대통령은 CEO 리더십과 정치적 리더십을 구별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민주적 리더십에 대한 개념도 없다. 모든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독립된 권력인데, 상명하복으로는 이끌고 갈 수가 없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그게 가능하지만, 민주사회에서는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민주적 리더십은 독립적 권력간의 연합이라는 사실을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상명하복의 관계로서 국민을 이끌고 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건 전혀 불가능하다.

 

 

- 뉴라이트 운동이 결국 이명박 대통령 당선 운동만 했다는 비판도 있다. 정치를 지망하는 사람들의 집결지 또는 요람 역할에 그쳤다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뉴라이트가 선거운동만 했다는 것은 가혹한 표현인데. (웃음) 뉴라이트 운동 자체가 이명박 후보가 나오기 전에 이미 출현했다. 그리고 뉴라이트 운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반공주의적·권위주의적 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제대로 된 자유주의를 하자는 (한국 사회의) 기본 목표를 구상하여 내놓은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뉴라이트 운동이 했던 핵심적 연구성과인데, 이를 토대로 앞으로는 국민통합의 단계를 설정하고 선진사회를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탐구할 것이다. 단순히 선거운동으로 끝났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예를 들어 대안 근현대사 교과서가 나온 것도 뉴라이트 운동에 의한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기여다.

뉴라이트에 속하는 단체 중에서 그러한 운동을 한 단체도 있다. 그러나, 우리 뉴라이트재단은 진보진영으로부터 보수진영으로의 정권교체운동을 했지 어느 후보의 선거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정부를 편드는 광고활동 같은 것은 일체 하고 있지 않다. 시민단체라는 것이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방향제시를 해야지 이권운동이나 해서 되겠는가. 그래서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단체이름을 바꾼 것이다.

 

- 대선 이후 뉴라이트 운동의 인적 자원이 고갈하고 내부 동력도 약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 시민운동의 모멘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새로운 사상을 창출하는 것이 있다. 단순한 정치적 전망 뿐만 아니라 여러 사회생활의 전망을 열어주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집결할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시민운동하는 사람 중에서 정계에 진출하려는 사람 있을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에게는 정계 진출의 전망이 운동의 모멘텀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역시 진보진영에서는 (정계진출과 상관없이) 실천적 운동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보수진영에 비해 더 강하고 많다. 비교가 안될 정도다. 내가 추측하건대 보수진영의 운동가는 진보진영의 10분의1 정도 될 것이다. 보수진영의 시민단체는 현실적으로 자기에게 이익이 안 되면 (운동을) 안 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진영은 이념에 도취해서, 이념실현을 위해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 보수진영에서 활발히 운동하는 사람의 대부분도 예전에 진보진영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상주의자다.

다만 진보진영은, 내가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이기도 한데, 현실성 있는 사상을 창출하지 못한다. 진보라고 하지만 과거 회고적이다. 옛날 사상만 회고한다. 새 사상을 창출하지 못한다. 진보진영이 시민활동을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는 것은 과거 지향적이고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모델이 없고 남의 결함을 지적하는데서 끝나버린다.

진보진영이 사상을 전환하여 사민주의를 받아들인다면, 거기서 새로운 사상을 창출하는 계기가 주어질 것이다. 왜냐면 (사민주의를) 할 수 있는 현실적 바탕이 있기 때문이다. 선진적 시민사회를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로 더 끌어 올린다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봐도 불가능하다. 현실을 현실대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삶을 영위할 것인가를 연구하면 더 좋은 사상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진영은 그 방향이 틀렸기 때문에 대단히 우수한 인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정체돼 있다.

 

 

- 진보적 인사들은 오히려 한국의 대학이 보수화되면서 보수 인재 및 학자의 풀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생각하던데.

= 그런 사람들(대학 교수 등)이 보수적 이론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선진국에서는 보수 이론이 압도적이니까, 그 곳에서 배우고 온 사람들도 그렇다. 그런데 그들이 사상적으로도 보수냐 하면 그건 꼭 그렇지 않다. 사상적으로는 오히려 중립이 많다. 보수 이론을 갖고 있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중립이니까 시민운동을 하지 않는다. 반면 진보주의자들은 학계에서는 소수지만, 시민운동에서는 다수다. 실은 한국 사회 자체는 이미 자유민주주의가 기본이 됐다. 자유민주주의에 도전하는 것은 (주류가 아닌) 방계일 수밖에 없다. 다만 시민운동에서 뛰는 사람의 분포는 조금 다르다.

 

 

- 진보진영에 계속 남아서 새로운 운동의 방향을 내놓는 활동을 직접 할 생각은 없었나.

= 나는 원래 사회의 발전 동력이 내부에서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외부에서 들어온 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게 내재적 발전론이다. 그런데 그게 저개발국의 실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저개발국의 근대는 역시 ‘캣치업(catch-up)’이었다. 그런 판단이 바탕이 깔리게 되면, 자유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자유주의가 아니면 글로벌리즘을 제대로 수용할 수가 없거든. 그걸 수용 못하면 발전의 동력이 밖에서 안 들어오고…. 결국 자주노선보다는 국제협력노선에 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받아들인 이론은 ‘캣치업’ 이론이었다. 그러나 인간관계라던가 나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전부 진보 쪽이다. 서울대민교협 1,2회 회장을 내가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하고는 일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내재적 발전론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더라. 핵심은 그것이다.

-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최근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포함해 일각에서는 레이건 이후 신자유주의가 한계에 부닥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오바마는 서구 사회의 보수와 진보 기준으로 볼 때 진보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서구 사회에서는 보수와 진보 모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합의하고 있다. 복지에 조금 더 치중할 것인가, 자유에 조금 더 치중할 것인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지 않을까 한다. 부시나 레이건과 비교해 근본적 차이는 있을 수 없다. 그런건 안된다는 게 (세계사적으로) 증명이 됐다. 신자유주의를 흔히 비판하는데, 대처나 레이건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서 현재의 세계체제가 짜여져 있다. 그것에 대한 큰 수정은 불가능하다. 오바마가 됐다고 달리 변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경제위기에 대해서도 신자유주의는 될 수 있는 대로 시장에 맡기자고 하는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시장이 완전하지 않으므로 정부가 항상 통제·규제·감시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런데 시장이라는 게 단순한 자연질서가 아니라 복잡한 제도 위에서 움직인다는 정도는 누구든지 다 안다. 그러니까 시장이 자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신자유주의이건 반대론자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다만 개입하는 방식이 다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끔 돼 있는 제도적 미비점을 보완하는 데서 (개입이) 끝나야 한다고 생각할 테고, 반대론자들은 경제적 목표를 정하고 이를 위해 간섭하고 규율해서 감시해야 한다고 볼 것이다.

 

-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국가의 개입이 필요했고 지금은 자유시장주의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좀 더 설명해 달라.

= 박정희 시대 때는 그런 게(국가의 개입이) 됐다. 지금도 그때처럼 국가가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장하준 박사 정도가 아닐까 한다. 그 사람은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다. 진보 진영은 시장 기능이 불완전하니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민주적으로 조율된 시장경제’나 ‘사회통합적 시장경제’,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결국 시장경제를 규제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시장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계획경제에 가깝게 국가가 시장을 규율해서 끌고가자는 것이다. 복지·교육·의료 등은 시장에 맡기지 말고 강력히 (개입)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그런 주장은 경제학 이론에는 없는 것이다. 시장이 불완전할 때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다. 제도경제학, 조절경제학, 사회적 시장경제 등이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은 모두 시장기능을 원활히 하기 위한 국가의 개입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은 시장에 맡기면 자꾸 계급적 대립이 격화되니까 통제해야 한다는 것인데 시장경제이론에는 이런 게 없다.

물론 소득분배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국가개입) 그 자체만으로는 소득분배가 잘 안된다. 성장이 제대로 되느냐 안되느냐가 중요하다. 성장이 되고 젊은 사람들의 일자리가 창출되면 소득분배가 개선된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성장문제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복지의 문제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 아닌가 한다. 시장통제로 분배를 개선하겠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러면 성장에 타격을 줘서 오히려 분배가 악화된다. 그게 노무현 정부 시절, 분배가 악화된 이유다. 성장이 정지 됐으니까.

 

- 앞으로의 한국 경제 사정은 어떻게 전망하나.

= 어느 정도 경제성장률을 회복하리라 본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경기부양 하려하니까…. 노무현 정부 때는 그런게 전혀 없었다.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2~3년 후에는 (성장) 가능성이 충분하다.

 

- 단체를 운영하는 데 돈이 많이 필요하실텐데. 참여연대 같은 경우, 처장급 활동가들도 월 150만원을 못 받는다. 이 곳은 사정이 조금 나은가.

=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보다 조금 낫다. 정치에 큰 야망이 없는 사람들의 시간을 뺏는데, 어느 정도 보상은 해야된다고 생각한다. 큰 돈은 아니지만 직원들 봉급 줄만한 돈은 있다.

정리/안수찬 기자 ahn@hani.co.kr ·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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