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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선 승려가 무당?

고승대덕 자격 요건이 ‘신비체험’, 통치자도 수용 조건으로 ‘기적’ 내세워
등록 2009-03-19 13:41 수정 2020-05-02 19:25

종교는 인류와 함께 탄생했다. 이미 구석기에 곰 등 특정 동물로 표현되는 신들에게 보호를 빌고, 죽은 자의 주검 옆에 붉은 흙을 발라 사후 신앙의 맹아를 나타내는 일이 있었다. 구석기에 인류와 함께 태어난 종교는 그 뒤로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오늘날 이북과 같은 일부 스탈린주의적 사회에서 전통적 종교의 역할을 극도로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만큼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유사 종교’의 모습을 띠게 됐다. 종교는 새로운 종교로 대체될 수 있어도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극도로 발전되고 안정된 복지사회라 해도 종교적 심성은 여전하다. 예컨대 전통적 루터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하는 이들이 3~4%도 되지 않는 오늘날 노르웨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초능력자’ 요랄프 야르스타에게 다른 이도 아닌 의료보건부 장관(!)이 전화해 자기 아들의 쾌차를 위해 ‘노력’해주기를 부탁할 정도다. 즉, 약사여래 불상 앞에서 자신의 아들을 낫게 해달라고 빌었던 7세기 신라인과, ‘초능력자야말로 노르웨이 민중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존재’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21세기 복지국가의 노동당 소속 의료보건부 장관 사이에 종교라는 차원에서 이렇다 할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둘 다 기적의 힘을 믿는다.
21세기 복지사회에서마저 초능력부터 점까지 별의별 기적을 믿는 이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상한 것은 전혀 없다. 초자연적 힘을 신앙하려는 욕망은 종교의 본질과 직결돼 있다. 레닌을 비롯한 수많은 20세기 사상가들이 이야기했듯이, 사회현상으로서의 대부분 종교들의 본질이란 공포, 즉 겁이다. 역사적으로는 사회적 공포가 진화해왔다. 예컨대 가물 때 큰스님을 모셔 같은 ‘나라를 수호하는 경전’을 강론케 하여 비를 빌었던 6세기 이후의 신라인들이 한발 등을 가장 무서워했다면, 오늘날 유럽인들은 예측이 불가능한 ‘시장’, 언제 닥칠지 모를 경제위기를 가장 공포스럽게 여긴다. 일부의 공포 대상들은 바뀌지도 않는다. 사후와 저승에 대한 공포나 아픔에 대한 공포 등은 인간이면 떨쳐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그 공포를 잠재울 초자연적 힘에 대한 신앙, 그리고 그 힘과의 소통을 담당할 성직자가 필요하게 된다. 즉, 아무리 ‘근대적’인 종교라 해도 초자연적 현상을 무시하는 ‘합리적 종교’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약사불(왼쪽). 약사불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불경인 <약사경>은 승려들의 ‘신통력 치료’의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경주 부근의 금곡사(오른쪽). 불교와 토착 신앙의 혼합을 이끌었던 원광대사의 부도가 여기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통일신라 시대의 약사불(왼쪽). 약사불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불경인 <약사경>은 승려들의 ‘신통력 치료’의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경주 부근의 금곡사(오른쪽). 불교와 토착 신앙의 혼합을 이끌었던 원광대사의 부도가 여기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현대에도 이어지는 종교와 무속의 결합

근대 교육과 의료 등 ‘합리적 앎’에 의존해 조선에 들어온 개신교를 보라. ‘근대’를 표방하는 종교임에도, 이미 식민지 시대부터 각종의 ‘신비로운 체험’을 포용해야 했다. 예컨대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이용도(李龍道·1901~33) 목사라는 위대한 부흥사는 ‘울음과 통곡, 눈물의 기도’나 장기간 금식은 물론 ‘마귀를 이기는 신비한 체험’으로까지 이름난 일이 있었다. 여기에서 ‘마귀’란 어떤 비유적 표현도 아니고 말 그대로 ‘까만 몸집, 삼지창처럼 날카로운 손톱, 사자와 같은 이빨, 머리에 나는 두 개의 뿔’의 실물로 묘사된다. 이용도가 그 마귀를 성전에서 쫓아냄으로써 ‘신비의 부흥사’로서 그 위상을 확립했다.

식민지 시대에 기승을 부렸던 신비주의적 ‘체험 신앙’은 지금도 일부 교회에서 ‘안수 치료’ 등의 형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성령의 은사’를 믿는 기독교인과 전혀 다르지 않게 많은 불자들은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 등 ‘기도발이 센’ 도량의 ‘힘’을 믿고, 어떤 종교단체에 소속됐는지와 무관하게 다수의 한국인들은 무속인과 점을 믿는다. 근대가 되든 탈근대가 되든 마음속의 ‘본원적 공포심’을 달래기 위해 ‘기적의 힘’을 찾으려는 심리에 하등의 변화도 없다.

지금도 대다수 한국 종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중심에 초자연적 힘에 도움을 청하는, 즉 ‘기적’을 바라는 기도가 자리잡고 있는데, 고대는 더욱더 그랬다. 사실 고대 불교의 고차원적 교의나 윤리 등을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고승대덕이 되는 자격 요건 중 하나는 바로 ‘신이’(神異·신비한 체험이나 기적) 경력 혹은 이와 같은 경력에 대한 소문이었다. 큰스님이란 기적을 일으킬 줄 아는, 또는 기적을 일으킬 줄 안다고 알려진 스님이었다. 순교 과정에서 기적을 일으켜 신라에서 불교 공인(527년)을 이끈 이차돈부터 자신이 죽을 날을 알아맞힌 진철(眞澈)대사 이엄(利嚴·870~936), 죽었을 때 땅이 흔들리고 산이 무너지는 이변을 일으킨 진공(眞空·855~937)대사, 태조 왕건의 귀의를 받은 신라 말기의 유명한 선사들까지 신라 불교사 전체를 보면 ‘신이 기록’이 없는 ‘큰 불제자’는 없었다.

한반도 수용 전부터 신비주의화

그 이유로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불교가 새로이 들어온 고대 한반도는 기적을 철석같이 믿는 공간이었다. 토착 종교의 성직자는 물론 일부 종교적 기능을 맡았던 고대 군주들까지 초자연적 힘을 보유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주몽이나 박혁거세에 대한 신비스러운 이야기야 우리로서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왕을 신비시하는 관습은 꽤 늦게까지 존재해왔다. 예컨대 화랑 출신으로서 무속 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경문왕(재위 861~875)에 대해 ‘잘 때마다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가슴을 뒤덮는다’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됐다. “나는 뱀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왕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신라인들이 숭배했던 신 중 하나인 바다와 강의 용을 뱀들이 상징했으며 뱀과 같이 자는 행위가 용에게 가뭄 등을 막아달라고 비는 기우제 성격의 성사(聖事)였다는 것은 하나의 해석일 수 있지만, 좌우간에 임금이 초자연적 힘과 통했음을 신라인들이 믿었던 사실은 분명하다. 경문왕의 아들인 헌강왕(재위 875~886)에게 동해 용이 그 아들 처용을 보내 신하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보면 농경국가인 신라 왕실은 물의 신인 용과 긴밀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됐다.

그렇다고 산신들이 무시된 것은 아니다. 상심(詳審)이라는 이름의 남산 산신도 헌강왕에게 내려와 춤을 춰주고, 북악의 산신이나 지신 등도 춤을 춤으로써 국운이 위태로움을 경고하려 했다고 한다(, 권2). 임금이나 일부 고급 귀족이 신들과 통한다는 걸 당연시했던 신라 사회에서 불교라고 해서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둘째, 불교 자체가 한국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신비주의적 색채를 띠기 시작했다. 석가모니의 근본 가르침인 공(空)과 연기(緣起)야 어떤 신비로운 힘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윤회의 늪을 떠나기 위한 방편인 팔정도(八正道)의 가장 핵심적 부분인 정정(正定·삼매 또는 참선)은 고대 인도에서 자못 신비화돼 있었다. 삼매에 잘 드는 수행자가 신들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고대 인도인들의 ‘상식’이었는데, 바로 그 ‘상식’은 초기 불교에도 적용됐다. 석가모니 자신이야 꼭 원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와 그 제자들이 신비한 ‘신통력’(神通力·abhijnna)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승단 안팎의 통념이 됐다. 보통 불(佛)이나 나한이 된 이가 여섯 가지 신통력(육신통·六神通)을 지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여기에는 ‘물 위나 벽을 통해 걸어다닐 수 있는 힘’(신족·神足)과 요즘 말로는 ‘텔레파시’(telepathy)라고 부를 ‘모든 중생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힘’(타심통·他心通) 등이 포함돼 있었다.

초기 불교 입장에서야 신통력이란 수행의 부속물이고 도를 닦는 보조 수단일 뿐이었지만, 불교가 대중 종교로 그 교세를 확산시킬수록 신통력 신앙의 역할은 중요해졌다. 자연재해나 전쟁, 죽음이 두려운 대중이 ‘기적’에 굶주린데다 많은 통치자들이 ‘기적’이 일어나는 걸 호법(護法)의 조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기적을 일으키는 ‘신승’(神僧)이 국왕 옆에 있다는 것이 국왕의 권위를 높였기 때문이다. 특히 3~6세기의 중국이 그랬다. 유목민 추장들이 통치하는 북방 왕조에 불교를 전파했던 서역 출신 승려들은 거의 ‘무당’과 같은 역할을 맡아야 했다. 예컨대 당시 중국 북방 불교의 아버지로 불린 서역 승려 불도징(佛圖澄·232~348)은 후조왕(後趙王) 석록(石勒·274~333)을 ‘기적’을 통해 교화하고 그 왕조의 후원을 얻은 일은 유명하다. 즉, 한반도에 들어온 중국화된 불교는 이미 ‘신통력 신앙’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는데, 한반도에서 정착·발전될수록 그 특색은 공고화됐다. 교리적으로 신통력 보유가 당연시되는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왕부터 필부까지 신심을 얻는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천왕사 유적터. 사천왕사는 ‘신들이 노는 숲’(神遊林)이라는 신라 고유의 성지에 679년 세워진 사찰로 ‘불교와 토착 종교의 결합’을 대표하는 절이다. 여기에서 밀교의 대덕 명랑이 ‘문두루법’을 행해 당나라 침략 분쇄를 위한 주술적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사천왕사 유적터. 사천왕사는 ‘신들이 노는 숲’(神遊林)이라는 신라 고유의 성지에 679년 세워진 사찰로 ‘불교와 토착 종교의 결합’을 대표하는 절이다. 여기에서 밀교의 대덕 명랑이 ‘문두루법’을 행해 당나라 침략 분쇄를 위한 주술적 노력을 기울였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전형적인 ‘기적’의 유형들

‘기적’이 고승의 자격 요건이던 시대에, 대표적인 ‘신이 행적’들은 무엇일까? 로 알 수 있는 가장 전형적인 ‘기적’의 유형들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토착 신격들과의 ‘소통’이었다. 고유 신들의 존재가 당연시되는 풍토에서 승려들은 이 신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성직자로서의 자격을 입증해야 했다. 대표적으로 원광(圓光·6~7세기)이 중국 유학을 갈 때 그 모습을 여우로 나타내곤 했던 삼기산(三岐山·경주 안강)의 산신에게 도움을 받고, 나중에 다시 태어날 때마다 그 신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한 이야기가 유명하다. 산신이 원광에게 귀의하고 윤회를 면하기 위해 그 도움을 청하는 것은 토착 종교보다 불교가 우위에 선 것을 의미하지만, 주술만 일삼아 토착 성직자들과 경쟁을 하려 했던 다른 승려를 삼기산의 산신이 죽였다는 이야기로 봐서는 토착 종교와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승려들의 말로는 어떨 때에 비참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권4).

둘째, ‘신통력 치료’였다. 원래 귀신을 내쫓는 ‘치료’를 담당해온 이들은 토착 종교의 무의(巫醫)들인데, 승려들이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이 부문도 장악하려 했다. 예컨대 선덕여왕(재위 632~647)과 나중에 고구려 정벌에 큰 공로를 세울 김양도(金良圖·?~670) 장군에게 을 읽어 병귀(病鬼)을 쫓아내 그 완쾌를 이루게 한 밀본(密本·7세기)은 이런 기능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권5). 후대적 설화로 여겨지지만 이미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향을 피워 왕녀의 병을 고쳐준 이야기가 있는데, 이런 전설들이 유포되는 것은 불교 위상의 확립 과정에서 ‘신통력 치료’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셋째, ‘신통력으로 국가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국난이 닥칠 때 토착 신격들에게 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고대 한반도에서 다반사였다. 불교도 한반도에 도착하자마자 그 기능까지 맡게 됐다. 645년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요동성을 포위했을 때 시조 주몽의 사당에서 예쁘게 꾸민 미녀를 부녀신(婦女神)으로 만들고 주몽에게 바침으로써 재앙을 면하려 했다는 것(, 권21)은 ‘백성과 나라의 보호자’로서 토착 신격들의 역할을 보여준다. 불교가 상대적으로 위기에 처했던 후기 고구려는 이렇게 주몽에게 구원을 빌었지만, 자국 영토가 ‘부처님과 인연이 있는 불국토’라고 확신했던 7세기 말의 신라에서는 당나라의 침략을 분쇄하기 위해 문두루(文豆婁·만다라) 비법이라는, 에 의거한 밀교 의례를 행했다(, 권2). 부처가 ‘나라를 보호해주는 신’이 된 것이다.

왕경(王京)의 일곱 가지 토착 종교 성지에 사찰을 세워 불교를 토착화한 신라에서 승려 집단이 무속인의 고유 기능까지 겸비하게 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불교가 한반도라는 토양에서 뿌리를 내릴 방도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공포 심리로 보나, 공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무한 경쟁의 정글’인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로 보나, 불교의 기복적 요소들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기복에 매달릴 텐가

그러나 고통의 기원과 고통을 지양해 안락의 열반 세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자비와 선행, 자리이타의 길을 보여줘야 할 공포 극복의 위대한 교리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과연 오늘날에 와서도 각종 ‘대입 기도’에 의존하고 ‘영험’에 대한 이야기로 보살님들의 마음을 잡는 등 ‘공포를 잠깐 잠재우는 진통제’의 역할만을 계속해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공포의 기원 중 하나인 탐욕을 극복하고, 사회적으로 탐욕과 공포를 부추기는 자본주의를 극복해 경쟁이 아닌 상생의 사회를 건설하게끔 도움을 줘야 할, 원리원칙상 초자연적 요소를 꼭 필요로 하지 않는 가르침이 불교가 아닌가. 공포심이란 인간의 영원한 한계지만, 불교 등 한국 종교가 이 한계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대중의 공포 심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석가모니와 예수에 대한 모독이자 배신이다. 언제까지 고대의 ‘신이 신앙’과 다를 게 없는 기복 행위에 반성 없이 매달릴 것인가.

참고 문헌

1. ‘신비주의의 선구자 이용도’ 허명섭, , 2006년 4월19일: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173609
2.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혜안, 1996, 상권, 27~39, 57~67쪽
3. 김복순, 경인문화사, 2008, 167~192쪽
4. 이기백, 일조각, 1986, 2~51쪽

사진 자료

1. 사천왕사는 ‘신들이 노는 숲’(神遊林)이라는 신라 고유의 성지에 679년 세워진 사찰로 ‘불교와 토착 종교의 결합’을 대표하는 절이다. 여기에서 밀교의 대덕 명랑이 ‘문두루법’을 행해 당나라 침략 분쇄를 위한 주술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주술화된 불교’는 오늘날에 적합한 것일까.
http://www.shilla.or.kr/historic-remains/rang_san/sa_chun_wangsaji.asp .

2. 신라의 고유 신앙은 우주의 중심축으로 파악됐던 신수(神樹·신성한 나무)와 영혼·생명을 상징했던 새 등을 중심으로 조직돼 있었다.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솟대들은 이 고대 신앙의 상징 세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 기원을 따져보면 시베리아 무속 신앙의 신수·새 숭배와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와 같은 고유 신앙을 배경 삼아 불교가 토착화된 것이다. http://blog.ohmynews.com/js1029/14722

3. 경주 부근의 금곡사. 불교와 토착 신앙의 혼합을 이끌었던 원광대사의 부도가 여기에 있다. http://kr.blog.yahoo.com/ahrdls03070/5398.html?p=3&pm=l&tc=82&tt=1158976554 .

4. 통일신라 시대의 약사불. 약사불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불경인 은 승려들의 ‘신통력 치료’의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7/1020/IE000820477_STD.jp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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