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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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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백제와의 친밀도에 외교적 판단 더해 구원 나섰으나 ‘백강 전투’에서 참패…
이후 ‘대륙 불간섭’ 정책 뿌리내려
등록 2009-06-12 08:48 수정 2020-05-02 19:25
백제 계통의 귀족들과 절친했던 일본 고대 율령국가의 ‘아버지’ 덴지 천황.

백제 계통의 귀족들과 절친했던 일본 고대 율령국가의 ‘아버지’ 덴지 천황.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는 ‘우리’ 영토에서 이뤄지는 외국군과의 싸움은 늘 의미심장하다. ‘무장된 타자’에게 저항하다가 짓밟혔다면 ‘국치’를 중심으로 하여 ‘피해자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고, 외국군을 이겼다면 ‘국민적 자랑’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된다. 예컨대 제국주의 시대 일본 국사 교과서들은 ‘신들의 나라인 일본’의 영토가 외국군에 의해 더럽혀진 적이 없었다는 주장을 군사주의적 선전의 한 요점으로 삼았다. 실제로는 상고시대에 수많은 무장집단들이 한반도를 건너서 일본으로 진출했지만, 4세기 초 부여 계통의 ‘기마민족’이 일본열도로 들어가 ‘일본열도 정복에 착수했다’는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1906∼2002) 교수의 대담한 학설은 패전 뒤인 1948년에 와서야 발표됐다. 그만큼 ‘남의 군인’들의 ‘우리 땅 유린’이란 민족주의 사학으로서는 민감한 문제다.

교과서에 딱 한 줄 언급된 ‘백강 전투’

일본뿐인가. 우리 국정 국사 교과서(2002년판)를 봐도 ‘외침’에 대단히 신경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싶은 외침, 예컨대 수나라와 당나라의 1∼3차 침략(645∼648) 같으면 고구려의 승리가 ‘당의 동아시아 지배 야욕을 좌절시키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중국 침략을 저지했다’는 식으로 적극적 의미를 부여한다. 물론 한반도의 대표적 세력인 신라와 함께 당시 일시적으로 신라와 친했던 왜국이 당의 고구려 1∼3차 침입을 지지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 잘 명기되지 않는다. 그래야 고구려의 ‘외침 격퇴’에 어떤 ‘민족적 의미’를 소급해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가 막지 못한 외침은 비통한 어조로 서술되지만 자세한 부분을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예컨대 러일전쟁을 기회로 한국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일본이 대한제국과 맺었던 한일의정서(1904년 2월23일)나 한일협약(1904년 8월22일)이 대한제국에 ‘강요’됐다고 옳게 지적됐지만, 왜 대한제국의 군대가 하등의 저항도 없이 일군 점령을 받아들였는지, 그리고 왜 고종과 그 대신들은(이용익 등 소수를 제외하고서) 그 ‘강요’에 별다른 저항을 시도하지 않았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당시 군인을 포함한 고급 관료 사이에 미치던 친일파의 영향력이라든가 일본을 이용해서라도 권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고종의 자기중심적 외교 방침 등을 자세히 파헤치기 시작하면 ‘저들의 침략’에 ‘일심단결로 맞서는 우리’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04년 2월 초까지만 해도 ‘애국의 화신’ 민영환(1861∼1905)마저도 모종의 한-일 제휴 협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해왔다는 사실을, 교과서로만 역사를 배운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면 그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우리로 하여금 ‘튼튼히 뭉치게끔’ 만드는 ‘성공적’ 외침의 수치나 격퇴된 외침의 자랑이면 일단 교과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돼 있지만, ‘외침’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외국군의 한반도 진입은 비교적 소홀히 다뤄진다. 식민화가 입힌 상처 때문인지 특히 고대·중세 왜국·일본과의 각종 군사적 관계들은 무시된다. 예컨대 663년 백제 부흥 운동을 도와주려던 왜국의 시도, 그리고 그 시도로 촉발된 663년 8월27∼28일의 ‘백강 전투’에 대한 국사 교과서의 기록은 단 한 줄로 처리된다. 신라-당 연합군과 백제-왜 연합군의 대대적인 싸움이었는데도 왜 수군이 금강(백강) 입구까지 왔다가 패하여 쫓겨갔다는 간단한 서술로 끝난다. 약 4만2천 명의 왜인이 참전하고 1만여 명이 전사한, 고대사를 통틀어 왜국·일본이 외부에서 당한 가장 큰 규모의 패배였는데 우리 국사 교과서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숙적’ 왜국이 ‘침략’이 아닌 동맹국 백제에 대한 원조를 단행한 것인데, 이는 우리의 통상적 일본관과 배치된다.

1만여 명 전사한 왜의 가장 큰 패배

그런데 당시 일본은 무엇 때문에 동아시아 최대 강자인 당나라와의 일전까지 불사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을 도우려 했던가? 650년대∼660년대 초의 백제와 왜국 사이에 어떤 관계가 존재했기에 당나라의 일본열도 침략을 초래할 수 있는 위험까지도 무릅쓰고 백제 구원에 나섰던가?

6세기 초부터 일본열도로의 선진 문물 수입 통로가 된 백제는 왜국의 ‘으뜸가는 대륙 파트너’로서 자리를 굳혔지만 양쪽 지배층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되는 왜국과 백제의 우정은 꼭 ‘영원불변’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6세기 말에 수나라의 천하통일로 위기에 빠진 고구려는 왜국과의 관계 강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 승려 혜자를 그 유명한 쇼토쿠(聖德·573~621) 태자의 스승으로 파견하는 등 ‘대왜 관계 관리’에 열심이었는데, 왜국 지배층은 이 움직임들에 일면으로 관심 있는 태도를 취했다. 또 645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급진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당나라의 동맹국인 신라를 중앙집권화 지향의 개혁 모델로 삼아 신라 지배자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일 관계라면 일단 소홀히 다루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고토쿠 천황 3년)에 따르면 647년에 신라의 실세인 김춘추(602∼661)가 직접 도일해 일본 귀족들에게 ‘아름답고 쾌활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백제를 없애려는 김춘추·김유신 일파로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국을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일본 〈NHK〉에서 재현해본 백강 전투(왼쪽). 덴무 천황(재위 672~686)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고분. 덴무 천황은 당나라와의 관계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신라의 관료체제는 당시 일본에서 개혁의 한 ‘모델’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 〈NHK〉에서 재현해본 백강 전투(왼쪽). 덴무 천황(재위 672~686)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고분. 덴무 천황은 당나라와의 관계에 소극적이었지만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신라의 관료체제는 당시 일본에서 개혁의 한 ‘모델’로 작용했다는 시각도 있다.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 외교가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왜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수의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긴밀한 통혼 관계를 가진, 그리고 나중에 덴지(天智·재위 661∼672) 천황 으로 등극된 나가노 오에(中大兄·626∼672)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어 친백제 경향은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졌다. 나가노 오에 뒤에 있는 소가씨 등의 호족들에게 백제란 ‘우리 조상의 땅’이었을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나라의 너무나 빠른 ‘친해지기’는 왜국 지배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649∼651년에 당나라 관복 제도와 궁중의례 등을 빨리 받아들인 신라의 사절인 사찬 지만(知萬)이 651년 왜국에 오자( 고토쿠 천황 백치 2년) 왜국 지배자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신라 침공’까지 들먹였다. 저들이 제 딴에는 왜국 중심의 질서의 일부분으로 파악하려 했던 신라가 이미 왜국의 국력을 무한히 능가하는 당대 동아시아의 ‘중심’ 당나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었다는 게 못마땅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백제 계통 소가씨와 통혼관계의 덴지 천황

660년 9월 신라와 당나라의 공격에 백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이 왜국에 전해지자 ‘공포의 무드’가 조성됐다. 한반도를 왜국·일본의 ‘피해자’로만 생각하는 데 익숙한 우리로선 다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660년대 왜국 지배자들은 당나라와 신라가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일본열도까지 침공할 것을 두려워해 각종 방어시설의 축성에 애를 많이 썼다. 일본에서 한반도 국가를 ‘잠재적 침공세력’으로 생각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처럼 왜국으로선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 다음의 군사적 목표로 일본열도를 정할 것도 두려웠지만, 300여 년 동안 왜국에 온갖 선진 문물을 보내준 ‘세계로의 창’ 백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어로 백제를 ‘구다라’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일본어에서도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사소한, 별로인, 좋지 않은, 하찮은)라는 말이 있다. 속설이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지만 이 단어의 어원을 ‘백제의 것이 아닌 하찮은 물건’이라는 표현과 연결시키려는 이들도 있다.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그 속설이 전해온 것 자체는 ‘백제’에 대한 일본인의 특별한 태도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아온 백제가 돌연히 국망을 맞이한 것은 일본 지배층으로서는 충격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들은 당장에 백제 부흥 운동의 지원에 나서지는 않았다. 백제 부흥 운동의 지도자인 복신(福信)이 이미 660년 10월 왜국에 ‘인질’(즉, 백제 왕실의 상주 대사)로 잡혀 있던 왕자 부여풍(扶餘豊·?∼669)을 저항운동의 상징으로 삼으려고 그 귀환을 요청했지만, 왜 조정이 661년 9월에야 부여풍을 백제 땅으로 보내주었다. 그만큼 천하 최강의 세력인 당나라에 도전장을 던지는 것은 왜국으로서 쉽게 내릴 수 없는 결단이었다.

그러나 일단 정치적 결단이 내려진 뒤 왜국은 백제인들의 저항운동에 파격적으로 큰 원조를 해주었다. 662년 1월에 화살 10만 척과 종자용 벼 3천 석을 보냈는가 하면 같은 해 3월에 피륙 300단을 추가로 보냈다( 덴지 천황 원년). 왜국 외에 외부 후원을 받을 길이 없었던 백제 부흥군으로서는 귀중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왜국이 백제 지원에 나서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연개소문의 군대가 660∼662년 당나라와 신라의 침입 시도를 좌절시켰다는 소식을 빠르게 접한 부분도 있었다. 동북아의 정통 ‘노(老)강대국’ 고구려와 같이 벌이는 작전이라면 크게 손해를 볼 일이 없다는 게 왜국 지배층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왜국에서는 부흥운동 내부의 각종 내홍과 모순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등 상황 전개를 신중히 예의주시했다. 당시에 수집된 정보의 일부는 에 등장한다. 에 없는 이야기지만, 에 따르면 부여풍에게 잡혀 손바닥을 가죽끈으로 꿰여 묶인 복신은 반대파 귀족에게 침을 뱉으면서 ‘썩은 개’ ‘미친 노예’라고 크게 욕하는 등 겁 없이 장렬하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맞이했다. ‘좋은 장군’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복신의 죽음이 백제 부흥 운동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란 게 왜국 쪽 판단이었지만 백제 원조 계획은 바뀌지 않았다. 그만큼 왜국 지배층으로서 백제의 생존은 생사 문제로 인식됐던 것이다.

백제 저항운동에 파격적인 원조

663년 8월27∼28일 백강 전투에서의 패배는 왜국으로서는 ‘참패’에 가까웠다. 왜국의 전선 800여 척은 170여 척도 되지 않는 당나라 수군을 감당하지 못해 전선의 절반 정도를 잃고 말았다. 불타는 왜국 전선에서 나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환하게 하고 바닷물을 붉게 했다’는 게 (28권)의 평이다. 수적으로 우세한 왜의 수군이 당나라와 신라에 이렇다 할 만한 손실을 입히지도 못한 채 궤멸되고 만 것은 선박 건조 기술이나 해군 전략, 군사 훈련 차원에서 그 당시 왜국이 동아시아에서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더 이상 왜국의 지원 능력을 믿지 못하게 된 부여풍은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사면초가에 빠진 고구려도 그에게 현실적 지원을 해줄 여력은 없었다. 백제 부흥운동의 가장 큰 기대는 역시 왜국의 지원이었는데, 왜 수군의 완패로 그 기대가 무너져 부흥운동의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왜국도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 대륙으로의 출병이 백해무익하다는 교훈, 둘째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당나라와 신라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교훈이었다.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원효와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패전 교훈으로 신라와 관계 정상화 나서

한국사에서 ‘외침’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무장해서 한반도에 들어오는 모든 ‘타자’들이 꼭 ‘침입자’만은 아니었다. 이미 고대부터는 한반도의 여러 정치세력들이 외부의 군사적 지원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다. 이런 지원에 엄청난 기대를 걸었다가 파산을 당한 경우가 바로 663년의 백강 전투다. 나중에 식민 모국이 된 일본의 전신인 왜국이 참전한 전투라고 해서 그 의미를 과소평가해야 하는가. 사실 백강 전투야말로 일본의 대륙 간섭 중지와 신라의 한반도 패권 등 이후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확정되는 계기가 됐다.

참고 문헌

1. 현광호, 신서원, 2002, 173∼185쪽

2.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동북아역사재단, 2009, 45∼59쪽

3. 노중국, 일조각, 2003, 139∼173쪽

4. 정재윤, 주류성, 2007, 152∼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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