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회- 본능적 정의감이 핏속에 흐르는 노동자들과의 만남, 그 못다 한 이야기

△ 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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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여 전 <한겨레21>로부터 기사 연재를 처음 부탁받았을 때, 이유를 묻는 내게 고경태 팀장이 해준 설명은 간단했다. “잘 쓰시잖아요.” 그 뒤 두 번째 기사를 쓰고 나서 “비운동권에서도 한번 찾아보세요”라고 고 팀장이 슬쩍 던진 말이 이 기사를 쓰는 2년8개월 동안 내가 받은 참견의 전부다. 나는 그 단 한번의 지적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이틀이 멀다 하고 전국을 싸돌아다니는 사람이 제대로 해내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었다. 원고에 쏟은 정성과 수준으로 따진다면 나는 진즉 잘렸어도 아무 할 말이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정하는 기준은 비교적 간단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 사람, 운동권 내에서조차 중심에 우뚝 서 있지 않은 사람…. “정의감은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진화돼온 본능적 특성”이라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라는데,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 본능적 정의감이 핏속에 흐르는 사람들이었다.
“그 손을 자른 건 우리들의 편견이었다”
녹음해온 내용들을 다시 들으면서 아무리 줄여서 원고를 정리해도 매번 정해진 분량의 몇배가 넘었다. 감히 견줄 수 없지만, 비전향 장기수 김선명 선생님이 “어느 한쪽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한쪽을 버리는 것이 바로 선택”이라고 말씀하신 교훈은 진리다. 버릴 내용을 선택할 때마다 손발이 잘려나가듯 안타까웠다.

△ 이종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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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 30m 철탑 농성의 주인공 이종선씨(☞2001년 7월 · 제369호)가 했던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빠진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다. “밤새도록 불 밝히고 소리를 내며 차량을 고치는 모습들을 철탑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노동자가 사회의 기둥이고 생산의 주역이다’라는 상투적인 표현이 정말 실감났어요. 깊은 밤 환하게 불이 밝혀진 공작창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맞아, 우리가 저렇게 밤새도록 일하면서 세상을 이끌어가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새벽에 기차가 미끄러지듯이 역구내로 들어오는 모습을 탑 위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멋있게 보이는지 모르실 거예요. 아, 내가 바로 저 기차를 움직이게 하는구나, 그런 뿌듯한 생각으로 새벽마다 일어나서 한두 시간씩 기차가 움직이는 걸 넋놓고 내려다보곤 했어요. 먼동이 틀 무렵, 기차가 선로를 따라 들어오는 모습, 얼마나 멋진 장면인지 모르실 거예요.” 이종선씨는 아직도 복직되지 않은 채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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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순애씨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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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방직 해고노동자 출신 알짜배기 농사꾼 안순애씨 부부(☞2001년 8월 · 제373호)는 요즘 거의 매일 서울에 올라와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관련 집회에서 경찰의 물대포와 맞서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다. 여의도 근처를 지날 때마다 안순애씨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채소값이 떨어질 때는 밑도 끝도 없이 떨어져. 그런데 올라갈 때는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절대로 안 올라. 예를 들어 고추가 6천원까지 올랐다, 그때는 정부에서 ‘큰일났다’고 반드시 중국산 고추를 수입해서 풀어요. 떨어질 때는 한없이 떨어지고, 올라갈 때는 일정한 한계 이상 안 올라가고…. 이런 불합리가 어떻게 가능한지 내 꼴통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니까….” 며칠 전, 안씨에게 전화를 해 “한번 찾아가지도 못해 미안하다”고 했더니 “젠장, 찾아오면 누가 반가워한대?”라고 대뜸 받아친다. 그 성질머리는 여전하다.

△ 박성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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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 출신 무용인 박성혜씨(☞2001년 9월 · 제377호)의 이야기 중에서도 다음과 같은 어릴 적 추억이 미처 활자화되지 못했다. “내 짝꿍이 육손이었어요. 간단한 성형수술이지만 난지도에 살면서는 그 수술 못해요. 육성회비도 못 내는 판인데…. 나뿐만 아니라 다들 그 아이의 손 잡기를 꺼려했어요. 4학년 때였나, 그 애가 아버지한테 수술 안 해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도 떼를 쓰니까, 어느 날 그 애 아버지가 낫으로 그 손을 내리쳤어요. 어린 나이에도 나는 ‘그 손을 내리친 것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 손을 한번도 잡아주지 않은 우리들의 편견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인터뷰하기를 한사코 마다했다. “나 그럴 만한 사람이오”라고 처음부터 내대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한겨레21> 여성 독자들에게 공개 구혼을 했던 한혁씨(☞2003년 5월 · 제458호)는 너무 완강하게 거절한 것이 미안했던지 나중에 내게 편지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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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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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회에서 설거지 등 갖은 뒤치다꺼리를 도맡아하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각종 행사 사진들 어느 곳에서도 그 녀석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간혹 그 녀석이 출연한 장면이래야 친구들이 사진 찍느라 온갖 폼을 다 재며 서 있는 한쪽 귀퉁이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우연히 잡힌 모습 정도였습니다. 저는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과 ‘사진에 찍히지 않는’ 사람. 혹여 사진에 찍히는 일이나 자리를 탐하며 살진 말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세상을 만들어가는 삶을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소장님(필자)께서 ‘왜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건방 떤다고 혼날 것 같아서 차마 드리지 못했던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했던 사람들
“나 도와주는 셈치고 만나달라”고 거듭 부탁하면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 조금이라도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했다. 그러나 기사의 관심은 언제나 ‘사건’보다 ‘인간’에 맞춰져 있어서 그 바람은 무시당할 수밖에 없었고, 당사자를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그의 활약이 너무 간단히 생략됐다”고 불평했다.

△ 심재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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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회 민주노동당 의원 심재옥씨(☞2004년 2월 · 제496호)의 경력들 중에서 “노동단체의 간부를 두루 거쳤다”고 단 한줄로 뭉뚱그려진 사연도 책 한권은 너끈히 된다. “1998년에 동아엔지니어링노조 신길수 위원장이 조합원들의 체불임금을 받지 않는 대신 고용을 보장받기로 회사와 합의했어요. 그 뒤 정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퇴출 기업에 포함되면서 조합원들은 고용 보장은커녕 퇴직금과 체불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나게 된 거예요. 이분이 너무 괴로운 나머지 야산에서 엽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했어요. 유서에 ‘노동자는 경영에 단 한번도 참여해볼 수 없는데, 그 책임을 다 져야 한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너무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쓴 채…. 꽤 많은 나이에도 집회에서 늘 연맹 깃발을 들던 분이었어요. 그 뒤로 저는 하루에 세번씩 머리띠 매고 싸웠어요. 목소리가 이렇게 나빠진 것도 다 그 탓이에요. 원래는 예뻤죠. (웃음)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자본의 손아귀에서 놓여날 수 없는 보수정당들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 우리 스스로 사회적 힘이 되고 정치적 힘이 돼서 길바닥에서 머리띠 매고 하는 우리의 얘기를 생 날것 그대로 국회에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깨달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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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미옥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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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군 농민회의 조미옥씨(☞2003년 7월 · 제466호)는 기사가 나간 며칠 뒤 <한겨레>에 “규탄집회에서 머리를 깎은 한 여성이 울음을 터뜨리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가슴 철렁하게 만드는 사진이 실리더니, 요즘 핵폐기장반대투쟁 선봉에 서서 여념이 없다. 조미옥·김재관씨 부부를 나에게 소개했던 김진원씨는 일찌감치 수배돼 “성당밥 먹은 지 벌써 8개월째”라고 안부를 전한다.
내가 전혀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불굴의 의지를 가진 활동가가 아니라, 망설이면서 노동운동에 끼어들었다가 그 경험을 평생 동안 짐으로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 활동 때문에 고통받으면서 열등감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의 활동 범위 밖에 있지만 여전히 역사의 주인인 사람들을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어쩌다 어렵게 만나도 자신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많이 만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까운 동료나 친척들에게조차 자신의 직업을 감추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이댈 수 없었다.

△ 한 노동자집회에 참석한 필자 하종강씨(앞줄 왼쪽에서 두번째). ‘진짜 노동자’들은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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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에 대해 “늘 그렇듯 삶의 진정성이 보인다”고 극찬을 해준 어느 독자편집위원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하종강의 진짜 노동자’를 끝맺는다. 내가 만났던 예순여섯명의 노동자들에게, 인터뷰 약속을 받았으나 미처 찾아가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 활동 범위 밖에 있어서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글을 읽어준 독자들에게…. 빚만 잔뜩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