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07월02일 제466호 |
기사검색 
[김재관 · 조미옥] “농한기엔 농민운동 해야지요”

밭 갈아엎는 농업 현실을 갈아엎고픈 자랑스러운 농민부부 김재관·조미옥씨

후배를 만나러 전북 부안까지 가는 고속도로에는 신기할 정도로 계속 장대비가 내렸다. 서울 사무실 직원들이나 부안 후배와 가끔 통화하면서 물으면, 그곳에는 그렇게 계속 장대비가 오지는 않는다고 했으니, 아마 그날 내가 비구름을 계속 따라다녔지 싶다. 부안 톨게이트에 들어서서야 빗발이 좀 가늘어졌다. 농사를 짓겠다고 농촌에 내려가 열심히 살다가 그곳의 처자와 결혼하고 이제 20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말씨까지 그곳 사람이 다 된 자랑스러운 후배, 부안군농민회 김진원 회장의 소개로 조미옥(34) 사무국장을 만났다.


△ 들녘에 선 조미옥·김재관씨 부부. 김씨는 부안군 농민회 사무국장을 일찍이 거쳤고, 조씨가 지금 그 뒤를 잇고 있다.

100여개 농민회 중 유일한 여성 사무국장

운동단체의 사무국장이라면 조직, 투쟁, 정책을 총괄하는 직책이다. 본인이 역량을 갖추고 있어도 가정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여성이 하기에 어려운 일이다. 조미옥 사무국장의 남편 김재관(44)씨 역시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부인의 활동을 잘 이해하는 “한마디로 열심히 일하며 사는 농촌 부부”라는 것이 김진원 회장이 굳이 자기 대신 두 사람을 추천한 이유다.

우리나라 100개 가까이 되는 농민회에서 조미옥씨는 유일한 여성 사무국장이다. 지난 6월20일, 농민회가 전국에서 1만대 차량을 동원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을 저지하는 상경투쟁을 벌였을 때, 부안 톨게이트 앞까지 220대의 차량을 이끌고 온 사람이 조미옥씨다. 집행부와 함께 그 투쟁을 조직하고 지회별 동원차량 대수를 점검하고 선전선동으로 대중집회를 진행했다. 얌전하고 조신해 보이는 조미옥씨의 가녀린 몸 어디에서 그런 능력이 뿜어져나오는지 놀랍다.

밖에서 일을 마치고 조금 늦게 농민회 사무실에 들어선 김재관씨는 인사를 나누면서 “도대체 우리를 인터뷰할 게 뭐가 있다고…”라고 멋쩍어했다. 김재관씨는 부안군농민회 산하 3개 면을 묶은 남부안지회 회장이다.

일찍이 변산의 박형진씨에게 따로 풍물을 배웠던 두 사람은 부안사랑청년회의 풍물교실에서 처음 만났다. 배우라는 풍물은 안 배우고 연애를 했다고 짐작하겠지만 절대로 아니다. 두 사람을 맺어준 사람이 김진원 회장이다.

“사모님과 같이 식사나 하자고 전화를 하셨어요. 평소 존경하는 분이 부르니까 좋아서 가슴 설레며 나갔지요. 저만 특별히 부르신 줄 알았는데, 이이가 소매가 다 터진 옷을 입고 같이 나와 있는 거예요. 솔직히 그때까지 저는 아무 느낌이 없었어요. 청년회 회원들이 뭐 부탁하면 잘 들어주는 편안한 농민회 아저씨였거든요.”

내가 김재관씨에게 “그날 옷이라도 좀 제대로 입고 나가시지. 왜 터진 옷을 입고 나가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선하게 웃으며 답한다. “못 입을 정도로 뜯어지던 안 했으니까….” 나는 이런 사람 정말 존경한다.

청년회 활동을 거쳐 부안군농민회 간사 일을 시작한 조미옥씨가 마음을 정하고 김재관씨에게 연락을 해서 두 사람은 맺어졌다. 결혼식은 부안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추수대동제 행사 중에 전통혼례 의식으로 치렀다. 청첩장도 없이 포스터나 홍보지에 전통혼례식이라고만 알렸기에 진짜 결혼식인 줄 모른 채 전통혼례 구경하자고 온 하객이 많았다.

농민회 입회, 눈물나는 사연

김재관씨가 농민회 활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농활 온 학생들과 같이 마을에 들어온 농민회 사람들을 알게 됐지요. 집집마다 돌아가며 월례회의가 열리는데 1년 동안 쫓아다녀도 농민회에 넣어준다 만다 아무 말이 없어요. 뒤에 앉아서 얘기 듣고 있다가, 끝나서 술 한잔 주면 받아먹고, 제 발로 간 사람에게 돌아가란 말은 안 하니까…. 다음달에 어느 집에 모인다고 일러주면 잊지 않고 있다가 또 가고, 그러다가….”

조미옥씨가 옆에서 “본인이 할 수 없는 얘기가 있다”며 거들어준다. “길에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았을 때였어요. 이이가 농민회 모임에 가는 버스를 놓쳤대요. 시간에 맞춰 가려고 포장도 안 된 길을 막 뛰어가니까 발에 땀이 나서, 신고 다니던 검정 고무신을 벗어 양손에 들고 한참 뛰어갔대요. 그렇게 가서 헐레벌떡 앉았는데 그 때 입회원서를 내주더래요. 1년 만에 그걸 받는 순간 눈물이 나더라는 얘기를, 2년 전 어느 술자리에서 후배한테 얘기하면서 울더라고요. 결혼하고 7년 만에야 그 얘기를 듣는데 나도 눈물이 나왔어요.”

김재관씨는 부안군 농민회 사무국장을 일찍이 거쳤으니, 부인 조미옥씨가 남편의 뒤를 잇고 있는 셈이다. “남편은 선전선동도 참 잘해요. 그런데 저는 원래 수줍음이 많아서 제대로 못했어요. 남편이 ‘처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며 잘 지도해줘서 요즘은 웬만큼 해요. 지난번 서울에서 지하철 선전전을 나갔는데, 각 지회 회장님들과 집행부를 다 모시고 올라간 사무국장이 뒤에 물러서 있으면 안 되잖아요. 지하철에 있는 무표정한 서울 시민들에게 계속 큰 목소리로 알리고 전단지 나누어주고 그랬어요.”

이제는 우리 농업문제에 대한 얘기를 들어볼 차례다.

“어머니가 2월부터 고추 농사를 지으셨어요. 모종을 사오면 비싸니까 씨앗을 사다가 직접 싹을 티워서 모종을 하셨어요. 겨우 내내 비닐하우스에서 진짜 어린아이 키우듯이 추우면 덮어주고 바람 안 통하면 열어주고, 겨울부터 여름 지나 9월까지 일하셨는데, 그렇게 300평에서 수확한 고추로 50만원밖에 못 받으셨어요. 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실무자 한달 임금도 그만큼은 더 되잖아요. 노인양반이 몇 개월 열심히 일하고 겨우 그거 버셨다니까 정말 서글프더라고요.”

“그 정도도 안 돼서 도저히 손익계산조차 불가능할 때 사람들이 밭을 갈아엎는 거예요. 지난해 가을에는 무금이 비쌌는데 지금 밭에 있는 무는 다 갈아엎는 수밖에 없어요. 수확비용도 안 나와요. 아는 형님 한분이 양배추 농사를 5천평 지었는데 그걸 모두 100만원에 팔라고 해서, 요즘 날마다 술만 마시고 있어요. 종잣값도 안 되니까.”

여름엔 아르바이트, 겨울엔 막노동

“저희가 지급보증 섰다가 지금 대신 빚을 갚아주고 있는 사람도 특작으로 피해를 본 사람이에요. 열심히 벌어서 갚겠다는 의지도 상실한 채 자포자기 상태가 되는 농민이 많아요. 농산물 가격은 계속 하락하지, 뭘 해도 할수록 손해지. 남의 빚 1500만원, 그 이자를 갚을 때마다 얼마나 속이 답답한지.”

농업문제에 무식한 나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냐?”고 턱없이 물었다.

“국제협약을 잘 맺어야지요. 관계자들이 우리나라 중심으로 고민을 좀 해야지요. 세계무역기구(WTO)에 휘둘리면서 요구하는 대로 받아주고 있잖아요. 한-칠레 협정에서 무너지면 다른 나라에도 그것이 표본이 되는 거예요. 외국에서 들어오는 오렌지 때문에 제주감귤 망하는 거 보세요. 이제 외국에서 들어오는 쌀에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될 거예요. 농업을 살릴 수 있는 정책을 세워서 정부가 협상에 임해야 하는데,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미리 몇%다, 이렇게 다 내주기로 안을 세우고 시작하잖아요.”

“여름에는 해수욕장 가서 아르바이트하고 겨울에는 노가다하는 농민들도 많아요. 그렇게 돈 버는 것이 당장 생활에 작은 도움은 되겠지만, 우리 생활을 바꿀 수 있을 만큼 큰돈은 절대로 안 돼요. 농번기에는 열심히 일하고 농한기에는 농민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전체 농민이 사는 길이고, 우리 농업을 지키는 길이에요.”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온몸이 흙투성이가 된 회원이 사무실에 들어섰다. 김진원 회장이 “논은 어떻디?” 하고 물으니 “아까 가봤을 때 막 넘치고 있었으니까, 지금쯤 다 물에 찼을 거요”라고 답하면서 소파에 털썩 주저앉는다. “농사일은 이래서 슬퍼…”라고 중얼거리며 피곤에 지친 듯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농민회 사무실을 떠나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그 회원의 얼굴이 눈에 선한데, 라디오 음악프로그램 진행자는 살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커피 한잔을 들고 창가로 가서 내리는 빗줄기를 바라보세요. 잠시 생활의 여유를 느껴보세요. 사랑은 비를 타고 온다고 했던가요.” 듣고 있다가 입에서 저절로 욕이 나온다. 에라 이….

하종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