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2 ] 2003년10월30일 제482호 

누가 스크린쿼터를 흔드나

노무현 대통령의 ‘축소’ 지향 발언으로 공방전 가열… 문화다양성 국제협약 맞물려 한국시장 집중 공격

노무현 대통령의 ‘축소’ 지향 발언으로 공방전이 불붙었다. 한-미 투자협정 체결에 목을 맨 정부가 스크린쿼터를 협상카드로 제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은 문화다양성 국제협약 발효에 앞서 한국시장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타이 방콕을 방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0월19일 방콕 샹그릴라 호텔에서 미국 경제인들과 만났다. 이 자리는 미국 경제인들의 요청으로 마련됐고 사전 조율이나 질문지도 없이 그룹토론식으로 진행됐다. 미국의 거대영화사인 타임워너의 휴 스티븐 아태 부회장이 첫 질문에 나섰다. “스크린쿼터(국산영화 의무상영일수) 문제를 어떻게 해나갈 것이냐.” 노 대통령은 “경제·무역 종사자들은 줄여나가길 바라고, 영화와 영화산업 종사자들은 강력 반대하고 있다. 이 문제가 외국인 투자에 장애가 안 되도록 설득 노력을 계속해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도록 하겠다”고 답변했다.


사진/ 스크린 쿼터 공방이 영화계를 강타할 조짐이다. 2003 부산영화제 폐막식에서 <아카시아>를 상영하고 있다.(연합)

“축소 의사 불확실한데 언론이 호들갑”

노 대통령의 갑작스런 이 발언은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맹렬한 공방전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올해 4월부터 외교통상부와 재경부, 산자부 등이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축소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펴온 데 이어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사실상 축소쪽으로 기운 듯한 공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은 곧 국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스크린쿼터문화연대가 21일 내놓은 논평은 미묘하다. “우리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휴 스티븐 타임워너 아태 부회장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발언으로 지금까지 견지해온 원칙적인 입장을 재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외교적인 발언과 수사를, 마치 축소를 전제로 발언한 것처럼 예단하고, 스크린쿼터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될 것이라고 보도하는 일부 언론의 모습은 국익을 위해서도 신중하지 못한 태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축소’ 의사를 분명히 하지 않았는데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축소로 몰아가려 한다는 비판이다.


사진/ APEC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 기업인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러나 행간에는 사실상 축소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발언을 그냥 넘어갈 수도 없지만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든든한 우군’ 노 대통령을 ‘적’으로 몰아가고 싶지 않다는 고민이 드러난다. 양기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사무처장은 “대통령이 경제관료들의 논리에 밀려 축소쪽으로 기운 듯한 발언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자유치가 절박한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스크린쿼터를 지켰는데, 어떻게 노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공약을 뒤집을 수 있는지 많이 섭섭하다. 그러나 30% 정도는 아직 기대와 여지가 있다. 당장 노 대통령을 적대시하는 것은 오히려 이 문제를 풀기 어렵게 만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 직을 걸고 스크린쿼터를 지키겠다”며 경제부처의 ‘맹공’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쿼터 축소 불가 입장을 분명히 해온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장관과 가까운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 장관도 언론보도를 접하고 이게 뭐냐며 당혹해하고 있다. 아직 뭐라 할 수는 없고 대통령의 진의를 알아본 뒤 대책을 정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대통령이 (방콕에 가기 전) 이 장관과 미리 협의하지도 않았고, 귀국 뒤 아직 만나지도 못했다. 문화부의 스크린쿼터 현행 유지 입장은 변화가 없다. 대통령이 얘기했다고 무조건 쿼터 축소에 나설 수는 없고 장관으로서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도 없고 난감해하고 있다”고 전한다.


사진/ “투자 협정을 빌미로 한국 영화를 죽일 것인가.” 지난 6월12일 스크린쿼터 축소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한겨레 김정효 기자)

지지층 이탈 도미노에 문화인도 합류?

이처럼 스크린쿼터 발언을 접하는 노 대통령의 전통적 지지자들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드러난다. 대등한 한-미 관계를 주장하다 방미에서 보인 언행에 시민단체와 젊은층들이 실망하고, 노조에 대한 비판으로 노동자들이 떠나가고,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사태로 전교조가 떠나간 ‘지지층 이탈의 도미노 현상’이 문화인들에게서 재현될 조짐이 보이는 것이다.

한편 노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은 미국 영화계와 재계 인사들이 한국의 스크린쿼터를 줄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압력’을 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미국 영화업계는 지난 9월23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16차 한-미 재계회의에서 “한국의 스크린쿼터 비율을 현재의 40%에서 20%로 낮춰달라”고 요청하고 방콕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외국인 투자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설득하겠다”는 발언을 끌어냈다. 이어 지난 22일에는 웬디 커틀러 미 무역대표부(USTR) 북아시아 담당 대표보가 한국을 방문해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국이 스크린쿼터 문제에 융통성을 보이지 않으면 한미투자협정(BIT) 협상 재개는 어렵다”며 노골적으로 스크린쿼터 축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1년 전체 매출이 1조원도 안 되는 한국 영화시장이 한해 600조원 이상을 벌어들인다는 미국 문화산업 관계자들의 모임 ‘자유무역을 위한 문화산업연대’(EIC)와 미국영화협회(MPAA), 미국 경제부처의 집중 포화를 맞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 공략 교두보… 결전은 이제부터

할리우드의 문화상품이 세계 영화시장의 85%, TV 프로그램 수출의 70%, 음반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국영화를 지키고 있는 한국은 국제 문화전쟁의 상징으로 주목받는 동시에 미국 영화계의 ‘눈엣가시’인 것이 사실이다. 특히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문화산업은 무역에서 고유한 예외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가운데, 한국에서 스크린쿼터를 축소한다면 이를 선례로 유럽 국가들과 유리한 협상을 이끌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문화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런 점에서 미국의 문화산업계를 초조하게 하는 일이 있다. 2005년 발효될 예정으로 유네스코가 문화다양성 국제협약을 추진하고 있는데, ‘문화가 일반 상품과 구분되는 재화라는 점에서 각국 정부가 문화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보호할 수 있으며 자유무역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이 협약이 제정되면 국제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게 돼 스크린쿼터 같은 자국 문화사업 보호장치는 국제법으로 보호받게 된다.

지난해 유네스코는 우리나라 스크린쿼터운동을 문화다양성 지키기의 성공사례로 평가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협약의 초안 마련을 위해 이달 초 파리에서 열린 제32차 유네스코 총회를 압두고 미국은 9월29일 19년 만에 부랴부랴 유네스코에 복귀했다. <르몽드>는 9월29일치에서 할리우드 영화 등 문화상품 최대 수출국인 미국이 업계의 로비를 받아 이 협약 제정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 나선 것이 이번 복귀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가 국내 영화산업과 세계문화 다양성이라는 막중한 사명을 어깨에 지고 다시 ‘결전장’으로 향하고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스크린쿼터 무용론의 함정
  • 세월따라 뒤바뀐 역할
  • 외자유치 ‘자승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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