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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자유치 ‘자승자박’ 한-미 투자협정 협상 카드로 스크린쿼터 활용…불평등 협정에 목메다 영화산업 위축 자초
10월22일 한국에 온 웬디 커틀러 미국무역대표부(USTR) 북아시아 담당 부대표는 “스크린쿼터 이슈에 대해 만족할 만한 성과가 없을 경우 한-미 투자협정(BIT) 협상이 진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융통성을 발휘해 스크린쿼터 문제를 해결해야만 투자협정 협상이 완료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공은 한국 정부에 넘어와 있다는 얘기다. 그는 “한-미 투자협정 체결은 최근 수년간 감소 추세인 외국인 직접투자를 유도해 한국이 동북아 경제 중심이 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협정 체결을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으며, 외자 유치에 목마른 쪽은 한국이므로 하루빨리 스크린쿼터를 축소·폐지하는 게 한국에도 도움이 된다는 논리다.
투자협정과 스크린쿼터가 맞물린 까닭
한-미 투자협정은 몇 차례의 실무협의 끝에 지난 1999년 대부분의 쟁점이 타결됐는데, 스크린쿼터가 마지막 최대 쟁점으로 남아 지금까지 협상이 중단돼 왔다. 언뜻 보기에 외국인투자 유치를 위한 한-미 투자협정과 스크린쿼터는 전혀 별개의 문제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둘이 서로 직접 맞물려 있는 것일까? 지난 94년 미국쪽이 내놓은 투자협정 표준모델과 이에 기초해 한국과 미국이 맺은 한-미 투자협정 초안 제6조(의무이행 부과 금지)는 해당 국가는 국산 물품과 서비스의 (일정 비율 이상) 사용 의무 같은 “어떤 조건도 명령하거나 강제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미국 투자가가 소유·통제하는 극장에 대해 의무이행을 부과하는 스크린쿼터는 이 조항에 위반된다”며 스크린쿼터의 폐지·축소를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극장에 걸게 하는 제도는 강제적인 이행의무 부과라는 주장인데, 자신들이 만든 투자협정 표준안을 내세워 스크린쿼터 문제를 투자협정 이슈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사실 한-미 투자협정 체결을 먼저 제의한 쪽은 우리다. 외자유치가 절박하던, 외환위기 직후인 지난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 투자협정 체결을 공식 제의한 것이다. 양자간 투자협정은 원칙적으로 내·외국인을 구별하지 않고 투자에 관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으로, 외자유치 활성화를 도모하려는 목적에서 체결된다. 다만, 국방이나 농업 등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분야는 부속서에 유보조항으로 넣어 투자 자유화 대상에서 제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쿼터를 한-미 투자협정의 ‘문화적 예외’로, 즉 투자 자유화 대상에서 뺄 수는 없을까? 그러나 한-미 투자협정과 스크린쿼터의 분리 대응은 아예 불가능하다.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게임인데, 파트너인 미국이 스크린쿼터 폐지·축소가 관철되지 않으면 협정 체결이 불가능하다고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협상 테이블이란 상대편이 요구하는 것이 합당하든 않든 들어주지 않으면 결국 깨질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국 투자자본이 소유·통제하는 국내 극장에만 스크린쿼터를 풀어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자본이 투자한 극장만 스크린쿼터를 풀어준다면 국내 자본이 운영하는 극장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발생하고 스크린쿼터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결국 공이 넘어와 있는 한국은 스크린쿼터를 폐지·축소할 것인지, 아니면 한-미 투자협정 자체를 무산시킬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통상 당국의 선택은 이미 오래 전에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스크린쿼터를 단계적으로 축소·폐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는데, 다만 문화예술계의 반발을 고려해 시간을 끌어온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 놓여… 실익 없을 수도
겉으로만 보면, 미국은 한-미 투자협정이 체결되든 말든 별 관심이 없다는 투다. 그런데 왜 미국은 스크린쿼터 폐지·축소에 그토록 매달리는 것일까? 스크린쿼터를 없애라는 주장에는 한국 영화시장을 노리는 할리우드 자본의 경제적 이익도 있지만 정치적인 이유가 더 강하게 깔려 있다. 산업연구원 구문모 연구위원은 “미국이 한국에서 스크린쿼터 폐지·축소를 관철시키면 중국과 유럽연합 등 스크린쿼터를 갖고 있는 다른 나라와 투자협정을 맺을 때 발언권을 높일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산업도 예외없는 무역 자유화 대상”이란 논리를 확산시키는 데 주력해온 할리우드 자본이 한국을 중요한 첫 단추이자 좋은 발판으로 여기고 있다는 얘기다. 사실 미국영화협회(MPAA)를 비롯한 할리우드 자본은 한-미 투자협정 얘기가 나오기 이전부터 스크린쿼터 철폐를 끊임없이 요구해왔다. 때마침 지난 98년 한국이 한-미 투자협정 체결을 제의하자 할리우드 자본은 이때다 싶어 투자협정과 스크린쿼터를 즉각 연계시켰다. 스크린쿼터 존폐 문제는 세계무역기구(WTO) 서비스 부문의 주요 의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럽연합의 반대 등으로 인해 다자간협상 틀에서는 좀체 협상이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다자간 해결이 한계에 봉착하자 미국은 우회로를 선택했다. 투자협정을 연결고리 삼아 양자간 협상으로 푸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일부에서는 우리 통상 당국이 그동안 협상 과정에서 스크린쿼터를 협상 카드로 써먹었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스크린쿼터를 사수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는데도, 일부러 ‘스크린쿼터 논의 불가’를 의도적으로 흘리면서 협상을 이끌어왔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미국의 집요한 스크린쿼터 폐지·축소 요구가 있었지만 우리쪽도 스크린쿼터를 양보하지 않으면 더 이상 협정이 체결될 수 없는 상황까지 오도록 자초한 셈이다. 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은 한-미 투자협정의 실익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외교통상부는 한-미 투자협정을 체결하면 연간 약 40억달러의 외자유치 효과가 발생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외국인투자를 장려하는 세계은행조차 올해 내놓은 연례보고서에서 쌍무투자협정이 외국인투자를 증대시킨다는 증거가 거의 없다고 인정했다. 흥미로운 건 정부 부처 안에서도 투자협정이 당장 외국인투자 급증을 가져올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산업자원부 관계자는 “협정이 체결되지 않는다고 이미 들어와 있는 미국 자본이 다 빠져나가는 것도 아니고, 협정이 체결된다고 대규모 외자가 바로 유치되는 것도 아니다”며 “한-미 투자협정은 대외개방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상징적 협정’의 성격이 크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도 “양국 정상간에 체결키로 합의한 투자협정을 5년이 지나서도 마무리짓지 못하면 우리 내부의 갈등 조정 능력이 없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협정의 실익보다는 “단지 국제사회에서 불신받는 것이 두려워” 정부가 경제 분야의 ‘또 다른 불평등한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인 한-미 투자협정 체결에 매달리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애먼 스크린쿼터만 두들겨 맞고 있다는 것이다.
줏대 있는 외자유치는 불가능한 건가
주목할 대목은 미국과 투자협정을 체결한 나라가 전세계 45개국인데, 몽골·알바니아·방글라데시·온두라스 등 저개발국이 대부분이고 주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는 전혀 없다는 점이다. 외교통상부는 “주요 선진국은 국가간에 투자 관련 차별이 거의 없어서 양자간 협정을 따로 체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강요하는 투자협정이, 나중에 국민경제적 필요에 의해 투자 제한을 가하고 싶어도 미국 투자자본에는 제한조처를 취할 수 없도록 하는 ‘불평등 협정’이라서 어떤 국가도 협정 체결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장하준 교수(개발경제학)는 “중국의 외자유치 제도가 잘 갖춰졌기 때문에 외국자본들이 대거 중국에 투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며 “한국 시장도 이윤을 남길 만한 장소라고 여기면 투자협정 같은 것이 없더라도 외국자본은 얼마든지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외국자본에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는 나라는 별로 없다. 현행 외국인투자촉진법은 외국투자자본에 대한 △법인세·소득세 등 각종 조세 감면 △국공유 재산 임대료 감면 △들여오는 자본재에 대한 관세·부가가치세 감면 △투자자본과 수익금의 대외송금 등을 보장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 등은 외국투자자에 대한 대표적인 과잉보호 조처라는 비판까지 나오는 판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줏대 있는 외자유치’는 오간 데 없고, 외국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급급해 미국이 요구하는 교육·의료시장 개방을 마구 허용하고 있다. 스크린쿼터 역시 어느새 한국 경제의 두려운 상전 자리에 오른 외국자본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인가?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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