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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따라 뒤바뀐 역할 박정희 시절 진보적 외국영화 차단하려 도입… 영화시장 개방과 함께 ‘지킴이’로
스크린쿼터는 복잡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스크린쿼터는 애초 1966년 박정희 군사정권 아래서 제2차 영화법 개정과 함께 등장했다. 당시 정부는 한국 영화산업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실제로는 비교적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담은 서구 영화를 차단하기 위해 이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 영화를 일정 편수 이상 만들어야 외국 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도록 했고, 영화 배급업자이자 극장주, 제작자들은 외국 영화 수입편수를 늘리기 위해 새마을 영화, 반공 영화 같은 ‘날림’ 국산 영화를 양산했다. 한 감독이 1주일에 두편을 찍었다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정치검열도 이 영화법 안에서 합법화됐다. 군사정권이 휘두르던 칼날인 스크린쿼터가 한국 영화를 지키는 수단으로 변한 것은 88년부터 미국 직배영화가 허용된 것이 계기가 됐다. 미국이 86년 한국이 수출한 자동차에 대해 슈퍼 301조 발동을 위협하면서 정부는 영화시장 개방과 보험시장의 단계적 개방을 약속했고 88년 UIP 직배영화가 허용됐다.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산업·예술적으로 고갈된 한국 영화가 갑자기 완전 개방된 시장에서 완전히 고사하겠다는 위기를 느낀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감시단을 결성해 한국 영화를 상영한다고 가짜로 신고한 뒤 직배 할리우드 영화를 틀고 있는 극장들을 감시하고 위반사례를 신고했다. 94년 서울 반포의 한 극장에서는 한국 영화를 실제로는 1년에 6일밖에 상영하지 않고도 버젓이 서류로는 146일 상영했다고 신고한 사례를 적발하기도 했다. 스크린쿼터 감시 활동이 활발해지자 94년 극장주들은 스크린쿼터가 부당하다며 헌법재판소에 제소했지만, 95년 헌재는 스크린쿼터가 합헌이라는 판결을 했다. 그 뒤부터 국내법으로는 스크린쿼터에 대항하기 어려워진 미국 영화회사들이 미국 정부에 막강한 로비를 벌여 미 상공회의소, 무역대표부를 통한 압력이 강해졌다. 특히 98년 외환위기 직후 외국인 투자가 아쉬운 상황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하자 미국은 BIT 체결의 선결조건으로 스크린쿼터 폐지(이후에는 축소)를 강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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