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2 ] 2003년06월12일 제463호 

도시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꾼다

출판·예술인들의 역량이 모인 테마 도시이자 살아 있는 건축 전시장, 파주 북시티와 헤이리를 가다

신도시 건설계획 발표 뒤 연일 땅값이 들썩들썩한다는 경기도 파주. 하지만 파주엔 이미 몇년 전부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새 도시의 꿈을 향해 달려온 ‘자매 도시’가 두곳 있다.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이하 출판도시 또는 북시티)와 헤이리아트밸리. 출판도시가 책의 출판·인쇄·유통 전 과정이 이뤄지는 산업단지라면, 문화·예술인들이 주민이 될 헤이리아트밸리는 작품의 제작과 전시가 이뤄지는 창작마을이다. 출판도시가 심학산이라는 야산을 빼면 평지로 판판히 닦여진 광활한 들에 세워지는 것에 비해, 헤이리아트밸리는 작고 낮은 5개의 동산으로 둘러싸여 소쿠리처럼 오목한 생김새의 땅에 앉혀진다. 출판도시의 길은 필지를 바둑판처럼 가르며 반듯반듯 나 있지만 헤이리아트밸리의 길은 둥글게 휘어 있다. 그러나 출판도시와 헤이리에 집을 짓는 건축주와 건축가들의 상당수가 겹친다는 점에서, 출판도시와 헤이리는 부모는 같되 얼굴과 성격은 다른 이란성 쌍둥이와도 같다.

더딘 걸음이지만 꾸준히 제 궤도 밟아


사진/ 헤이리아트밸리를 흐르는 시냇물은 농수로도 쓰였던 물길을 자연형하천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초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목덜미를 뜨끈하게 달구던 6월3일 출판도시와 헤이리를 찾았다.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자유로를 달려 일산을 지나 15분쯤 달리면 출판도시 건설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파주시 교하면 문방리·신남리·서패리·신촌리 일대 48만평에 걸쳐 있는 이 땅에선 16채의 건물이 준공을 마쳤고 25채가량이 골조를 올리고 있다. 지난해 여름 보진재가 첫 입주를 시작한 뒤부터 화성프린원, 태평양그랜드, 도봉금장, 한길사 등 인쇄업체와 출판사가 둥지를 틀었다. 파주출판도시의 공공 지원시설이 될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1단계 공사를 마치고 사업협동조합이 2월 초 입주했고, 지난 1월엔 출판단지의 물류유통을 전담하는 출판물종합유통센터(설계 민현식) 공사가 첫 삽을 떴다. 게다가 북시티 진입로엔 영화관·스포츠몰·세계음식전문점 등이 있는 에듀테인먼트 쇼핑몰 ‘이채’를 선전하는 큼지막한 간판이 서 있어 앞으로 이 땅이 겪을 큰 변화를 예감케 했다. 4년 전 허허벌판에 처음으로 인포룸이 세워졌던 때를 떠올려보자면, 출판도시는 더딘 걸음마지만 꾸준히 제 궤도를 밟아온 셈이다.


사진/ 갈대샛강 주변 습지에 들어선 아시아출판정보문화센터는 북시티의 핵심시설 가운데 하나다.


이날 오후 북시티 아시아출판정보문화센터에선 ‘도시건축 한마당’이 열렸다. 샛강 습지에 놓인 이 건물(설계 김병윤+시명건축)은 앞쪽에 길다란 램프를 두어 샛강을 조망케 하고, 앞뜰엔 전라북도 정읍에서 옮겨온 김동수가 별채가 있어 자연과 전통이 함께 어우러지도록 했다. ‘다시 파주북시티를 말한다’는 주제가 말해주듯, 지금까지 북시티의 건축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여 본래의 목표를 재확인하고 중간점검하는 자리였다. 이 심포지엄엔 출판인들을 포함해 건축가, 공무원 등 30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이기웅 출판도시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가장 성공한 비정부기구(NGO)의 작품”이라는 김윤기 전 건설부장관의 말을 인용해 북시티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했다. 특히 파주출판도시의 건축 지침을 마련하는 과정에 참여한 영국인 건축가 플로리안 베이겔(북런던대 교수)은 주제발표를 통해 “민감한 땅에 첫발을 디디는 것은 기린이 높은 풀숲을 가로질러 걷는 것과 같이 조심스러워야 한다”며 ‘생태도시’라는 목표가 제대로 이행돼야 함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출판도시가 만들어져온 과정을 돌이켜보면, 생태와 환경은 절대로 뺄 수 없는 키워드다. 본래 출판도시가 자리잡은 땅은 한강 하류의 너른 저습지였던 곳인데 자유로를 닦느라 쌓은 제방에 가로막혀 폐천부지로 남게 됐다. 이곳에 출판단지를 세우는 계획을 세운 뒤 토지공사쪽에선 터를 고르고 길을 내고 필지를 분할했다. 이 과정에서 한강의 흐름과 나란히 흐르던 홍수방지 수로가 덮혀 땅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하지만 가능한 한 본래 땅의 모습을 복원하길 바라는 출판조합의 바람에 따라 이 물길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갈대가 무성히 자라는 개울로 제 모습을 찾았다. 이후 갈대 샛강은 ‘습지도시’라는 도시의 성격을 가늠하는 결정타가 됐고, 북시티 주민들의 일상과 함께 흐르는 친근한 친구가 됐다(2000년엔 강 주변에 보리를 심어 이를 수확하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심학산과 한강, 그리고 갈대 샛강


사진/ 북시티에 들어선 ‘쌍둥이건물’ 기한재와 동명사. 김원씨가 설계한 이 건물은 태양열을 최대한 받아들이기 위해 지붕을 가파른 경사로 만들었다.


도시 전체 건축물을 조율할 코디네이터로 승효상·김영준 두 건축가가 선정된 뒤 이들은 플로리안 베이겔을 비롯해 민현식·김종규씨 등과 함께 건축지침을 마련했다. 도시의 건설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세 가지 환경 요소는 출판단지 중심에 자리잡은 심학산과 자유로 너머 도도히 흐르는 한강, 그리고 갈대 샛강이었다. 건축가 정기용씨는 “이 땅에선 건물이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자연물들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에 초점이 맞춰진다”고 설명한다.

이를 위해 코디네이터들은 건물의 용도와 땅의 조건에 맞춰 각 지역을 5가지의 유형으로 나눴고, 그에 따라 건물의 생김새를 결정했다. 가령 자유로와 맞닿은 땅에는 ‘고속도로 그림자’(hignway shadow)라는 이름처럼 도로변에 길게 누운 모양의 2층 이하 공장들이 지어지도록 했고, 공장 뒷열 출판사들은 ‘서가유형’(bookshelf unit)으로 정해 반지하에 주차장을 넣고 위층에는 한강 조망권을 해치지 않도록 사이공간을 주도록 했다. 샛강 주변습지엔 “긴 다리로 가볍게 걷는 듯” 기둥에 의지해 공중에 떠 있는 모양의 건물을 제안했다. 외장재료도 엄격하게 제한해 알루미늄판·화강석·타일·붉은 벽돌·유리커튼월은 사용을 금지함으로써 전체 도시 색깔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어 2000년엔 입주사와 건축가가 건축지침을 지키자고 약속하는 ‘위대한 계약’이 맺어졌다.

북시티 프로젝트엔 김원·김영섭·김인철·승효상·민현식·조성룡·정기용 등 국내 유명 건축가들과 플로리안 베이겔을 비롯해 세지마 카즈요·니시자와 류에·자에라 폴로 등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외국 건축가들도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북시티의 이상은 이들 건축가가 제 실력을 유감없이 뽐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이웃을 고려한 통일된 틀 안에서 개별 건축가가 개성을 발휘하는 건축 공동체다. 이 때문에 출판도시는 ‘윤리성’을 주제로 열린 2000년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에 초청받기도 했다.


사진/ 헤이리아트밸리의 ‘마을회관’, 커뮤니티하우스, 완만한 곡선으로 처리된 지붕이 옆 도로와 자연스럽게 만난다.


97년에 사업이 시작된 탄현면 법흥리 통일동산 안에 자리잡은 헤이리아트밸리도 최근 들어 부쩍 공사에 진전을 보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김언호 헤이리아트밸리 이사장(한길사 대표)은 “2~3년 뒤면 입주자의 상당수가 집을 짓고 들어와 마을의 꼴이 갖춰지게 될 것”이라며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난해 말 완공한 커뮤니티하우스를 비롯해 강우석 감독이 대주주로 참여한() 영화종합촬영소 ‘아트서비스’가 준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사진작가 배병우씨의 스튜디오, 소설가 정한숙 기념관, 방송인 황인용씨의 음악감상실, 책방으로 쓰일 한길 북하우스 등이 뼈대를 세우고 있다.

헤이리, 건물층수도 2~3층 이하로 제한

파주 농요 ‘헤이리소리’에서 이름을 따온 헤이리아트밸리는 생산성 높은 작업이 이뤄지는 신명나는 예술인마을이 꿈이다. 350여 가구에 이르는 입주자의 조건도 문화·예술·창작 종사자로 정했다. 이 때문에 사무국에서 내는 소식지의 회원 동정란은 웬만한 문화 정보지를 방불케 한다. “윤도현 회원 ‘윤도현의 러브레터’ 진행자로 입성”, “정태춘·박은옥 회원 골든앨범 출시”, “이주헌 회원 미술책 출간”, “조덕현 회원 프로젝트전시회 열어” 등 문화계를 움직이는 중요한 소식들이 담겼다. 김언호 이사장은 “예술인마을이라는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건물의 3분의 2는 문화공간으로 쓰도록 정했다”고 말한다. 주거전용지역에 집을 짓는 100여 가구를 제외한 나머지는 공간의 60% 이상을 갤러리·작업스튜디오·콘서트홀 등으로 꾸며야 한다. 건물들이 제맘대로 삐죽삐죽 올라서지 않도록 주거지역은 2층 이하, 나머지 구역은 3층 이하로 건물 층수도 제한했다.


사진/ 헤이리아트밸리는 개울 위에 놓여질 다리들을 현상공모로 선정했다.


15만4천평에 이르는 헤이리아트밸리 역시 땅의 생김새를 마을이 들어서는 기본 조건으로 보고 건물이 땅을 거스르지 않도록 했다. 김준성(범건축 대표)씨와 공동으로 코디네이터를 맡은 김종규(마루건축 대표)씨는 “땅에 카페트를 깔아놓는 것처럼 건물들이 무리를 지어 들어서는 영역을 만들어 그 위에 집을 세우고 나머지는 철저히 비움으로써 건물들이 어지러이 놓이는 것을 막았다”고 설명했다. 마을터가 경사가 많은 산지라는 특성을 감안해 집의 유형도 경사지형, 평지형 등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맞춰 집을 설계하도록 정했다.

마을의 심장부에 들어선 공원은 손이 간 듯, 안 간 듯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방문객을 맞았다. 이곳은 최대한 인공성을 배제하고자 잔디도 심지 않고 마사토로 표면을 덮었다. 택지개발 전에는 모두 논이었던 이 땅에 본래 있었던 작은 늪지도 그대로 두었다. 갈대 무성한 연못가로 나무다리를 놓아 물과 좀더 가까이 마주하도록 배려했다. 소나무 등 몇 가지 수목과 우리 꽃을 심어 토종공원다운 모습을 지켰다. 마을을 돌며 흐르는 개울 또한 원래 좁은 논수로였던 것을 넓게 파내고 자연형 하천으로 가꿔낸 것이다.

폐쇄도시가 될 것인가, 활기가 넘칠 것인가


사진/ 출판도시의 가로등. 철근이 ㄱ자로 구부러진 모양으로 통일했다.


건물만 짓는 것으로 마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에, 헤이리에선 매달 마지막 토요일마다 노을이 질 무렵이 되면 작은 음악회가 열린다. 커뮤니티하우스 개관을 맞아 지난 4월 처음 시작된 ‘노을음악회’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그것이 잘 되기를 기원하는 비나리굿으로 막을 올렸다. 임진강과 한강이 합쳐지는 너른 물길 아래로 떨어지는 붉은 태양의 장관을 감상할 수 있는 노을동산 위에서 관객들은 군사적 긴장이 가시고 평화의 시대가 찾아오기를 소망했다. 9월까지 계속될 노을음악회는 양성원·이성우의 첼로와 기타 연주회(6월), 소리꾼 김용우의 ‘통일아리랑’(7월) 등을 앞두고 있다.

북시티와 헤이리는 각각 우리나라 출판인·예술인들의 역량이 집중된 테마 도시이자 살아 있는 건축 전시장이 될 것이다. 환경과 이웃과의 공존이라는 이상을 위해 세심하게 계획된 이 도시가 과연 부동산의 물욕에 휘둘리지 않고 기존 도시개발의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성공사례로 남을 것인가. 근사한 건물 속에 갇혀 자기들끼리만 교류하는 폐쇄도시가 아니라 사람의 활기가 넘치는 살아 있는 도시가 될 것인가. 이런 물음들은 여전히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아마도 이런 여백들은 아마도 정기용씨의 말마따나 “사람이 채울 몫”일 것이다.

파주=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 한길사, 건물이 책이네
  • “파주는 불확정적 공간”
  • 낮에만 살고 밤에는 죽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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