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특집 > 특집1 기사목록 > 기사내용   2004년03월24일 제502호
국회가 확 뒤집힌다

민노당의 원내 진출이 가져올 변화들… 민주적 당구조 정착과 지역주의 몰락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

민주노동당에는 ‘공천’이란 말이 없다. ‘선출’이 있을 뿐이다. 비례대표도 전 당원이 투표로 직접 뽑았다. 그것도 사회적 소수자인 여성을 앞세웠다. 1·3·5·7·9 등 홀수는 모두 여성 몫이다.

3월14일 오후 2시 비례대표 후보들의 마지막 유세가 서울 경희대에서 열렸다. 단병호 후보가 나섰다. “지금 이 자리는 누구를 국회로 보낼 것인가를 논하는 자리가 아니라 얼마나 더 많이 (국회로) 보낼 것인가를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비방은 없었다. 몇명을 빼놓고는 자신을 찍어달라고 내세우는 후보도 없었다. 제주도 여성농민, 현대미포조선 해고노동자, 20대 대표라고 내세우는 학생 대표, 여성 소설가…. 그야말로 생활인들이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날 압권은 최순영 후보의 연설이었다. “여러분, 개하고 달리기하지 마십시오. 개보다 못 달리면 개만도 못한 놈이 됩니다. 오늘 정치판을 보십시오. 완전히 개판입니다. 우리는 대안의 정치 모델을 이미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진성당원만 4만5천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돈줄’입니다. 우리는 정치의 희망입니다.”


△ 민주노동당에는 '가짜 당원'이 없다. 3월17일 거리입당식을 열고 있는 환경미화원과 도로보수원. 당 관계자들.(류우종 기자)

3월17일 오전 11시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맞은편에서는 색다른 ‘입당식’이 열렸다. 350여명에 이르는 전국의 환경미화원, 도로보수원, 준설원 등이 이날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용인시청에 근무하는 송익석(49)씨는 “지금까지 여러 당에 실망했는데 노동자의 문제는 노동자가 해결할 수 있다”며 “새로운 당에 기대를 걸어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당비는 계좌로 보낼 준비를 끝냈다”며 “경제적 부담이 있지만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겠다”고 강조했다.

당원이 ‘물주’가 되는 정치

얼마 전 민주노동당 홈페이지에는 애교 섞인 항의글이 올라왔다. “총선 때문에 특별당비를 걷는데 계좌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당에서 한번 더 알려주는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글이었다. 당원들의 계좌가 유일한 정치자금인 민주노동당의 현실이 자연스럽게 ‘폭로’되는 장면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한국 정치의 오랜 숙원인 정당 민주주의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라는 핵폭풍의 여진이 가라앉지 않은 기존 정당들이 정치자금의 조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를 고민할 때 민주노동당이 오래 전부터 보유하고 있는 ‘당비 내는 진성당원’이라는 모범답안을 베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현재 당원 수는 4만5천명 정도이며, 총선 때까지는 5만명 정도로 늘어날 것으로 당에서는 보고 있다.

국회의 모습도 변할 전망이다. 유시민 의원이 혼자 면바지에 넥타이를 매지 않고 등원했을 때의 반응과 민주노동당 의원 여러 명이 잠바를 입고 등원했을 때의 반응은 상당히 다를 것이다. 다른 당의 국회의원들이 과연 이들에게 고함을 지를 수 있을까. 17대 국회가 구성되면 자못 궁금해질 대목이다. 민주노동당은 여러모로 정치문화 변화의 진원지가 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 민주노동당은 정당 역사상 처음으로 비례대표 후보를 전체 당원들의 직접 투표로 뽑았다. 후보들의 기자회견 장면.(진보정치)

민주노동당은 ‘완전히 새로운 국회의원의 상’을 구현하기 위한 작업도 진행 중이다. 서울에서 지역구 후보로 출마하는 후보들은 당선될 경우 노동자 평균 임금이나 도시거주자 생활비에 해당하는 액수 등 당이 정하는 돈만을 받고 나머지는 모두 당의 정책기금이나 복지기금으로 쓰자고 서약했다. 단병호 비례대표 후보는 최근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가 “의원 개인이 세비를 임의적으로 관리하는 게 아니라 의원의 임금과 보좌관 문제까지 당에서 책임을 지고 운영할 것”이라며 “기존의 의원들이 세비를 받아 마음대로 쓰는 방식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공언했다. 신선한 변화를 추구하는 민주노동당의 도전이 알려지면 기존의 방식을 고집하던 다른 정당들을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새의 왼쪽 날개가 돋아난다

정치이념의 지도도 새롭게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자민련의 몰락과 민주노동당의 진출이 동시에 나타날 경우 ‘극우 반공주의’와 ‘지역주의’의 파산과 함께 죽산 조봉암의 진보당 이후 실로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죽어 있던’ 진보정치의 제도권 진입을 뜻하게 된다. 민주당마저 몰락한다면 지역주의의 검은 그림자가 절반 이상 걷히는 것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이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가보안법의 폐지 방법이 거론되고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위협 등이 토론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바야흐로 오른쪽 날개만을 지니고 있던 대한민국이라는 새에 왼쪽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장상환 교수는 이와 관련해 “이제 우리는 한 시대를 마감하는 시점에 서 있다”며 “지역주의 보수정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철저하게 몰락하고 다소 합리적인 행태를 보이려는 보수정당인 열린우리당과 민중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양립하는 국면으로 급속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된 ‘진보야당’의 구실을 해내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여러 개 있다. 무엇보다 당 안에 모인 여러 운동조직과 정치적 분파들이 화학적 결합을 할 수 있도록 정치적 지도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당의 도덕성을 일신하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최근 불거진 이영순 비례대표 후보의 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민주노동당의 진보적 색깔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누가 ‘사표’를 말하는가

안정적 지지도로 정당명부제에 유리…두 곳의 지역구 당선 가능성 높아

“민주노동당에 던지는 표는 사표(死票)가 아니다.”

요즘 민주노동당 간부와 비례대표 후보, 지역구 후보들이 어디를 가든 강조하는 말이다. 지역구도 지역구지만, 정당투표에서의 투표율에 따라 국회에 진출하는 의원 수가 달라지기 때문이다(10% 이상일 경우 5~7명). 득표율은 의원 수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정치적 성장 가능성을 보여줄 것이다. 자민련이나 민주당보다 높은 정당득표율이 나온다면 민주노동당은 비약적으로 당세를 확장할 전망이다.

당의 인지도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민주노동당 서울 구로을 지역구 후보인 정종권(38)씨는 “2001년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을 때와 비교해볼 때 민노당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또 “당시에는 민주노동당이라고 하면 민주당과 혼동하는 유권자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탄핵 바람이 불어와도 괜찮을 정도로 당에 대한 인지도나 지지도가 안정적”이라고 덧붙였다.

민주노동당은 2002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정당 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서 후보를 낸 지역구의 경우 예상을 뛰어넘어 평균 8.13%의 표를 얻었다. 3당 구도로 치러진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전국적으로 3.9%(98만여표)의 득표율을 보였다. 그러나 이번 총선의 경우 1인2표제로 정당 투표가 있기 때문에 30대와 40대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부채 의식’이 득표율을 올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조선일보> 3월18일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노동당의 정당지지도는 4.4%(민주당 6.8%, 자민련은 1.3%)였다.

지역구의 경우 창원을(권영길 후보)과 울산북구(조승수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3월17일 한국방송 창원총국이 창원대 사회과학연구소에 의뢰해 전화 여론조사를 실시한 결과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가 28.0%로 1위로 나타났다. 이어 열린우리당 구명회 후보가 22.2%로 2위, 현역인 한나라당의 이주영 의원은 14.8%로 크게 밀려났다. 권 대표는 두달째 계속 1위를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