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02월18일 제49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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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함 ‘한나라호’는 침몰하는가

‘서청원 석방결의안’으로 창당 이래 최악의 위기… ‘과거’ 깨부수지 않으면 희망 없다

1월 이후 추락한 지지도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한나라당은 서청원 의원 석방결의안 통과로 창당 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하였다. 총선을 앞둔 그들에게 희망은 있는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 컴퓨터그래픽/ 장광석

지역구가 수도권인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최근 의정보고서를 만들면서 당명을 감췄다. 지역구 주민들은, 자신의 사진이 크게 실린 1면을 앞으로 나눠주면 받아갔지만 뒤집어서 “한나라당을 개혁하겠습니다”라고 쓰인 쪽을 내밀면 아예 손을 거뒀다. 그는 “한나라당에 몸담은 뒤 처음 느껴본 참담함이었다”며 “사실 나 자신도 지금 모습의 한나라당을 지지해달라고 유권자들을 설득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이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위기라는 데 이견을 다는 이는 없다. 당 내부에서조차 “이번 4·15 총선에서 좀더 처절하게 깨져야 폐허 위에 새 집을 지을 수 있다”며 “이젠 유지하거나 보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지난 2002년 대선 이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한 ‘거함 한나라호’의 침몰에 가속도가 붙은 형국이다.

정당지지도, 추락…추락…추락!

한나라당의 위기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드러난다. <동아일보>가 2월14일 코리아리서치센터(KRC)에 의뢰해 전국의 20살 이상 남녀 154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조사 결과, 정당지지도는 열린우리당 21.8%, 한나라당 15.5%, 민주당 8.1%, 민주노동당 3.5%, 자민련 0.7% 순(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4%포인트)으로 나타났다. 다음날 <문화일보>가 테일러넬슨소프레스(TNS)에 의뢰해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우리당 30.6%, 한나라당 18.4%, 민주당 11.8%의 순(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포인트)이었다. 지난 1월 열린우리당의 전당대회를 즈음해 뒤집힌 정당지지도 순위는, “민주당의 ‘조순형 효과’와 같은 전당대회 특수로 오래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라는 한나라당의 바람과 관계없이 굳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 한나라당의 위기는 곧 최병렬 대표의 위기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단식농성 당시 최 대표를 중심으로 한 구심력은 최대치로 올라갔으나 2개월 만에 퇴진 압력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이용호 기자)

한나라당의 위기를 급속히 증폭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2월9일 서청원 의원 석방 결의안이었던 것 같다. 최근 드러난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 추가 제공이 ‘차떼기’에 큰 혹 하나 더 붙은 정도이고 검찰의 편파 수사라는 반격의 여지가 있는 반면, ‘서청원 탈옥사건’은 한나라당 스스로 만들어낸 악재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축구로 치자면 자살골인 셈이다.

김형준 박사(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부소장·정치학)는 “이번 사안은 단순한 민심 이반 정도가 아니라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내걸 수 있는 중요한 화두를 상실해버린 치명적 악재”라며 “노무현 정권을 견제해야 할 한나라당이 1당이 되면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딴 짓’에만 몰두할 것이기 때문에 찍지 말아야 한다는 확신을 유권자들에게 심어준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한나라당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당 안팎에서는 최병렬 대표를 비롯한 당 지도부의 안이한 상황 인식과 리더십 부재를 우선적으로 꼽는다. 서 의원 석방 결의안 통과 직후, 남경필·원희룡·오세훈 등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미래연대 회원 11명이 “한나라당의 혁신적 재탄생을 위해 당 지도부의 자기희생적 결단”을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 지도부의 자기희생적 결단을 촉구하는 미래연대 의원들.(한겨레 김봉규 기자)

남경필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 한나라당은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다. 존재 이유 자체가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서 전 대표의 석방결의안 처리 과정을 보면 국민의 시선보다는 당내 갈등을 두려워하는 지도부의 안이한 상황 인식이 드러났다. 환골탈태니 공천혁명이니 수많은 말을 쏟아냈지만, 한나라당이 적극적인 변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느끼는 국민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대선에서 2번이나 졌으면 그에 대한 진단을 하고 해법을 모색해야 했는데, 괜찮겠지 하다가 결국 ‘암덩어리’를 키운 꼴이 됐다.” 남 의원 등 소장파 의원들이 총선을 두달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해당 행위”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사실상 당대표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데는 이런 절박감이 깔려있는 것이다.

‘수구냉전’으로 고착화된 정체성

오세훈 의원은 “최 대표 체제 출범 당시 제기됐던 불안감이 현재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과거 구태정치와의 절연이 최 대표에게 던져진 핵심 과제였는데, 5·6공 출신인 최 대표가 ‘샴쌍둥이’ 분리수술처럼 자기 살을 도려내는 정교한 수술을 집도할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당내에 팽배했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문제 제기는, 단순히 한나라당의 지도 체제나 최 대표의 리더십 문제를 뛰어넘어 한나라당의 정체성이라는 근본 문제에 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당이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으로서 제 기능을 해왔는지, 앞으로 그럴 가능성은 있는지, 적어도 이번 총선에서 환골탈태의 싹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묻고 있는 셈이다.

최근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소장 윤여준 의원)가 당의 정체성 정립과 정책비전 마련을 위해 개최한 심포지엄에서도, 한나라당의 대변신을 주문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2월3일 열린 1차 토론회에서 기조강연에 나선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끊임없이 보수(補修)하고 개혁할 부지런함과 대범함을 갖추지 못했던 까닭에, 구보수는 권위주의와 부정부패 혹은 기득권과 동일시되는 치욕을 겪었다”면서 기존 보수주의의 성과를 바탕으로 선진화를 위한 개혁의 당위성과 절박성을 인정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개혁적 신보수주의’를 한나라당이 지향해야 할 이념적 좌표로 제시했다.


△ 운영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는 최병렬 대표. 최 대표와 소장파 의원들의 간극은 더욱 벌어지고 있다.(이용호 기자)

전상인 한림대 교수(사회학)는 “우리나라의 보수 기득권 세력은 국제적 냉전과 분단체제, 국가주도 경제성장이란 주어진 조건과 제도에 안이하게 무임승차해 자신의 정체성을 이념적으로 성찰하거나 관리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본 역사가 없다”며 “이념적 정체성과 정책적 차별성이 뒤섞인 상태에서 얻는 다수 의석보다는 차라리 그 반대의 경우가 한국적 보수의 궁극적인 체질 개선을 위해서나 한국 정치의 발전을 위해 지름길이 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전 교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수주의가 무엇인지, 무엇을 지향하는지를 보수정당 스스로 공부하고 연구하고자 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며 “지금처럼 보수 이데올로기의 생산과 전파를 전경련이나 조(조선일보)·중(중앙일보)·동(동아일보)에 맡기고서야 보수정당의 이념적 제도화는 요원하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국사회과학연구소의 김헌태 소장도 전 교수의 지적에 동의하는 쪽이다. 김 소장은 “보수세력을 자처하는 한나라당의 이념적 포지셔닝은 극우이거나, 또는 영남 중심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시대의 인적 구성에 전적으로 의존한다고 볼 때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있다”며 “특히 한나라당의 5·6공 정치세력은 권위주의적 사고 속에서 우리 사회와 국민의 의식 변화에 역행하면서 산업화로 사회적 정당성을 굳건히 확보한 보수세력 자체를 수구화했다”고 진단했다.

이들 전문가의 지적에서 공통점은, 한나라당이 국민들의 변화 욕구와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해 수구냉전적인 세력으로 고착화된 정체성이 한나라당 위기의 본질적인 측면이라고 지적하면서, 합리적 보수세력을 끌어안을 수 있는 정당으로 거듭나기를 주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선대위원장 영입’ 누구로?

최병렬 대표도 한나라당의 정체성과 관련한 당 안팎의 지적에 대해 일정 부분 공감하는 것 같다. 최 대표는 2월17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단순히 과거와 절연하는 정도의 변화가 아니라 과거의 것을 깨부수는 과정을 거쳐 ‘뉴한나라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 한-칠레 FTZ 비준동의안 처리 절차를 놓고 언쟁하는 모습(위)과 석방된 서청원 의원을 반갑게 맞는 모습(아래)은 16대 국회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이용호 기자)

그러나 문제는 한나라당의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시간은 이미 많이 흘러가버렸고, 그나마 총선 전에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인 공천권은 최 대표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게다가 “때묻은 팔다리를 다 자르면 깨끗해지기는 하겠지만 기능 자체를 마비시키는 교각살우의 우를 범할 수 있다”며 최 대표를 압박하는 영남 중진들의 존재도, 최 대표의 운신 폭을 제한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날 최 대표가 내놓은 수습책이 당을 이른 시일 안에 선대위 체제로 바꿔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정도로, 당 안팎에서 요구받고 있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친 것은 이 때문이다.

또 소장파들이 요구했던 ‘희생적 결단’과 관련해서는 당장은 당 문제와 자신의 거취를 결부시키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은 “최 대표를 중심으로 총선을 치른다는 것은 이미 지난 전당대회 때 결정된 안”이라며 “부패 문제로 당이 어려워진 만큼 부패와 거리가 먼 최 대표를 중심으로 부패와 절연하고 정치 및 당 개혁 작업을 벌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위기 타개책이 이도저도 마땅치 않은 가운데 최 대표쪽이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부분은 선대위원장 영입인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들의 신망을 받는 법조계 출신이나 시민단체 인사를 영입해 총선에 관해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는 사령탑으로 세우겠다는 것이다. 선대위원장에게 공천심사위를 거친 단수후보라도 상대당의 후보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질 때는 후보를 교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방안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최 대표의 핵심 측근은 “수세적 입장의 야당은 상대당에서 어떤 후보를 내놓느냐에 따라 후보를 바꿀 수밖에 없다”며 “공천심사위에서 단수후보로 추천됐더라도 그 후보가 승산이 없으면 바꿔야 하고 그 일을 선대위원장이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4월 총선, ‘심판론’으로는 안된다

한나라당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성찰은, 4·15 총선의 기본 전략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대통령의 임기 중에 치러진 역대 총선이 중간평가 성격을 지닌 탓에 ‘심판론’이 야당의 주요 구호였던 반면, 이번에는 현 정권의 실정과 무능에 대한 공격에 주력해 반사이익을 기대하기 보다는 자성 속에서 한나라당이 보여줄 수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잔잔히 설득하는 전략이 더 유효할 것이라는 주장이 당내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쨌든 거듭 재창당 수준의 개혁을 선언하고 나선 한나라당이, 어느 정도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한나라당의 ‘밀린 숙제’가 공천 정국과 맞물려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없진 않다. 또 총선 이후 본격화될 한나라당의 환골탈태 과정에서, 변화를 이끌어낼 성숙한 동력과 조건이 마련될지도 지켜볼 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