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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자금 삼각관계 기묘하게 진행된다 이회창의 등떼밀린 ‘살신성인’… 최병렬의 장막 뒤 미소… 부담 떠안게 된 노무현
대선자금 정국의 3대 큰손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노무현 대통령 사이의 게임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 전 총재가 불법 대선자금의 책임을 지고 ‘감옥행’을 자처하면서 팽팽한 3자간 힘의 균형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가 젊은 의원들에 물었더니…
애초 이 전 총재는 대선자금 국면 초기부터 막판까지 시종일관 자신이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12월 초 이 전 총재의 서울 옥인동 자택을 방문한 한나라당의 한 소장파 의원은 이 전 총재의 당시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총재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하면 좋을지를 놓고 젊은 의원들의 생각과 당내 여론을 물었다. 이에 나는 ‘총재가 직접 나서서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젊은 의원뿐 아니라 당내 여론이 전반적으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총재는 ‘나도 답답하다. 뭘 알아야 기자회견을 하건 검찰에 출두하건 이야기를 할 게 있을 텐데 정말로 모른다. 서정우 변호사가 왔길래 나한테 모든 것을 이야기하라고 했는데도, 서 변호사는 알면 나중에 부담될 터이니 차라리 모르시는 게 낫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안고 가겠다고 하더라’고 답했다.” 이 전 총재쪽은 진작부터 “책임을 회피할 생각이 없다. 당당하게 책임지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러나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과의 대화처럼 그가 불법자금 모금 내막을 사전에 몰랐다면 그는 책임을 지려 해도 사법적으로는 책임을 지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정치적인 수사(修辭)로 “책임지겠다”고 한다고 해서 사법적 책임이 추궁되는 게 아니라, 범죄를 사전에 인지했거나 지시하는 등의 구체적 개입 정황이 존재해야 형사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대외적으론 책임지겠다는 모습을 부각시키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하고 있다는 관측이 정치권에서 나돈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번에 “내가 시킨 일”이라며 관련성을 전면적으로 시인하는 쪽으로 자세를 180도 바꾼 것은 역시 검찰 수사망이 옥죄어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전 총재가 검찰 출두 기자회견에서 “500억원을 거뒀다”고 밝힌 것도, 이미 검찰 수사결과 드러난 액수를 종합한 것이었다. 이 전 총재의 검찰 자진출두는 또한 한나라당으로부터 끝내 구원의 응답 메시지를 얻지 못한 탓도 큰 것 같다. 이 전 총재쪽은 최근까지 “한나라당이 대선자금 정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왔다. 그의 측근들은 “한나라당 대선자금 대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를 기본 구도로 삼아 정면으로 싸워야 하는데, 엉뚱하게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 특검이나 매만지고 있다”고 최병렬 대표쪽을 비난해왔다. 또한 “한나라당은 일이 터지면 자기 살 궁리만 하는 집단”이라는 불만도 표시했다. 1998년 국세청을 이용한 세금 모금사건이 터졌을 때 총재로서 한나라당을 이끌던 이회창씨가 국회 등원거부와 장외투쟁으로 대처했던 예와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좀더 강력하게 투쟁해주길 기대하는 의사표시로 해석될 대목이었다.
‘10분의 1’ 발언은 왜 해가지고…
그러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는 이 총재쪽의 ‘구원 요청’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는 △한나라당 대선자금 수사에 관해서는 진상규명에 협조한다 △노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도 함께 규명되도록 한다는 양대 해법을 제시했다. 이재오 사무총장이 “독자적으로 대선자금을 조사하겠다”며 490억원의 수수 사실을 공식 시인하고 나선 것도 이 전 총재를 압박하는 의미가 짙었다. 이 총재쪽의 좀더 강력한 투쟁 주문에 대해서도 최 대표는 “한나라당이 예전처럼 대구나 부산에 가서 시위를 하라는 이야기냐”며 부정적 입장을 비쳤다. 대선 이후 새 전당대회를 통해 당권을 장악해, 기본적으로는 전임 지도부의 비리와 무관한 그로서는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가면서까지 전임 지도부의 총대를 멜 이유가 최 대표에겐 없었던 셈이다. 이에 따라 이 전 총재가 모든 책임을 떠안기로 한 것은 일차적으로 최 대표의 ‘정치적 승리’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이로써 한나라당은 두달여 지속돼온 대선자금 수사의 수렁에서 헤어날 탈출구를 찾게 됐기 때문이다. 최 대표쪽은 내년 총선을 어떻게 할 거냐라며 꾸준히 이 전 총재 밀어내기를 시도한 끝에 결국 소기의 성과를 끌어낸 셈이다. 최 대표의 한 측근은 “이제 한나라당이 짐을 벗고 홀가분해졌다”고 말했다.
이런 발언은 이 전 총재의 검찰 출두로 한나라당이 본격적으로 노 대통령을 겨냥한 공세를 강화할 수 있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 전 총재의 ‘정치적 사망’이 한나라당을 벼랑에서 구출하는 동시에 노 대통령을 공격할 발판을 함께 제공하게 된 것이다. 최 대표는 “이 후보가 잘했다”고, 박진 대변인은 “정치개혁을 위한 살신성인의 결단이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에 열린우리당과 노 대통령쪽은 썩 개운하지만은 않은 처지가 됐다.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수사 국면이 차라리 좀더 장기화하면서 최대한 울궈먹었어야 할 터인데, 의도와 다른 쪽으로 상황이 전개됐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정동채 홍보위원장은 12월15일 “이 전 후보의 고백이 진실이길 바란다”면서도 “그러나 부패 수렁에 빠진 한나라당 구하기에 나서서 한 사람이 모조리 책임지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불법 대선자금은 사법적 판단에 의해 죄상이 가려질 것”이라고 논평했다. 노 대통령은 또한 자신의 ‘10분의 1 발언’이 파장을 빚는 것도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검찰이 앞으로 노 대통령 불법 대선자금을 한나라당 것의 10분의 1 이상이 될 때까지 찾아내야 공정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한나라당이 공세를 펼 기세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은 12월15일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우리쪽의 작년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 이상이면 직을 걸고 정계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발언은, 4당 대표들과 대화 과정에서 의혹이나 수사의 불공정성을 제기한 데 대해 불법이 10분의 1도 안 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데 이를 폭탄선언으로 매도하는 것은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창 · 노’ 구별 안 해준다
어쨌든 노 대통령은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해 나름의 정국 주도권을 행사해오던 처지에서, 공·수 양면을 함께 헤아려야 하는 복잡한 처지로 옮겨가게 될 것 같다. 이런 가운데 <한겨레21>의 12월14일 국민 여론조사 결과(노 대통령도 한나라당과 비슷한 규모로 불법 대선자금을 받았으리라고 보는 국민이 38.6%)에서 나타난 것처럼, 양쪽의 비슷한 점과 차이점을 잘 따져가며 구별해주지 않으려는 국민정서도 노 대통령에겐 부담이다. 노 대통령쪽은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해 “우리도 진흙탕에 발을 담다 보니 바짓가랑이에 진흙이 안 묻을 순 없다. 그러나 양쪽 진상을 모두 까면 질과 규모에 차이가 있으니까 우리가 손해볼 것 없다”는 기본 인식을 지닌 터였다. 어쨌든 이 전 총재의 12월15일 ‘감옥행 자처’로 대선자금 정국의 1라운드는 마무리 국면에 들어선 것 같다. 이 전 총재가 버티는 데까지 버티다 결국 ‘살신성인의 길’로 떼밀렸으며, 최병렬 대표가 장막 뒤에서 미소짓게 되었고, 노 대통령이 나름의 전과는 올렸으되 앞길은 불투명하게 됐다는 점을 1라운드의 중간 성적표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대선자금이 수면 아래 잠긴 빙산의 몸통을 통째로 드러내는 문제로 워낙 휘발성이 강한 소재라는 점에서 이번 정국의 2라운드 향배는 누구도 예단하기 어려운 상태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표지사진/ 류우종 기자 · 한겨레 김정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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