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수사의 목표는 선거철만 되면 기업들이 불법자금을 조성해서 정치권에 전달하는 뿌리 깊은 관행을 수술하자는 데 있다.”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은 11월 초 검찰이 대선자금 수사를 주요 재벌기업으로 확대하는 배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또 수사의 기본구도를 두고 ‘제한적 전면수사’라는 표현도 썼다. 불법 대선자금에 대해서는 전체적인 규모와 사용처를 철저히 규명하되, 지구당 단위 사용처나 합법적인 정치자금의 출처까지를 캐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사진/ 검찰의 수사 행보가 ‘푸른 신호등’으로 변한 것은, 이회창 전 후보의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가 체포되면서부터였다.(한겨레 황석주 기자)

기업들은 한나라당이 무서웠다

수사의 목표와 기본구도에 비춰볼 때 현재 대검 중수부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7부 능선’을 넘어서고 있다. 재벌기업들의 불법자금 규모가 대략 잡혀가고 있고 정치자금을 받은 정치인들에 대한 처벌도 구체화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불법자금 규모가 상상을 초월해 수백억원 단위로 밝혀지면서 검찰의 발걸음은 더욱 가벼워지고 있다. 국민여론을 등에 업은 검찰을 향해 정치권 전체가 무릎을 꿇고 바짝 엎드려 있는 형국이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백척간두의 싸움에서 지렛대를 쥐고 있는 쪽은 아직까지는 검찰인 셈이다. 정치적 배경이 어떻든지 간에 12월15일에는 유구무언으로 일관하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후보까지 스스로 검찰청사를 찾았다.

검찰의 수사 행보가 ‘푸른 신호등’으로 변한 것은, 이 전 후보의 측근인 서정우 변호사가 체포되면서부터였다. 그를 통해 검찰은 한나라당의 불법자금 규모를 100억원(SK)에서 502억원(삼성·LG·현대자동차 포함)으로 단박에 늘렸다. 검찰의 이같은 개가는 사실 뜻밖의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재벌기업으로 수사를 확대한 지 한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거액의 불법자금 규모를 캔 배경을 두고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검찰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사실 수사팀은 수사대상 기업과 관련해 단서가 거의 없었다. 불법 정치자금의 원천인 비자금 조성 경위를 확인하고 그를 근거로 다시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실을 캐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 짧은 기간 안에 이 정도 액수를 확인할 수 없다. 비자금 관련 장부를 파악하고 자금 흐름을 확인하는 데만 몇달이 걸릴 수도 있다. SK 수사를 보면 알 수 있다. 올해 초 기습적인 압수수색을 해서 짭짤한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본격적인 내사를 한 것이 6~7월 정도였고, 수사 결과 최돈웅 의원을 부른 게 10월이다. 검찰이 비자금 단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 중수부장의 언급도 사실은 과장돼 있었던 것이다. 사실 기업쪽 얘기를 들어보니까 SK 외에 다른 기업들은 한나라당이 무서웠다고 한다. 비록 대통령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압도적인 제1당의 지위를 차지하고 의회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한 한나라당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검찰의 애초 수사 협조 요청에 미지근하게 대응한 것이다.”

사진/ 기업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전격적으로 실시된 검찰의 압수수색을 전후한 시기였다. 검찰의 현대캐피탈 본사(오른쪽 위,한겨레 김경호 기자)와 롯데그룹(오른쪽 아래,한겨레 김종수 기자) 압수수색 장면.

기업들의 태도가 바뀐 것은 전격적으로 실시된 검찰의 압수수색을 전후한 시기였다. 기업들로서도 일정한 ‘모양새’를 간절히 원했다는 게 수사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우리가 이렇게 압박을 당하니 밝힐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분위기를 검찰이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실제로 문제된 기업의 관계자들은 검찰 출두 직전 한나라당쪽에 “이번에 (대검 중수부로) 들어가면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미리 알렸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때문에 이번 압수수색은 변죽만 울린 것이었고, 실효성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검 중수부의 한 검사는 “공개하기 쑥스럽지만, 얼마나 (압수수색을) 급하게 했는지 ‘헛발질’을 한 경우도 있었다”며 “실제로 거의 재미를 보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노 대통령, 뜻밖의 ‘복병’ 만날 수도

모양새가 갖춰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기업 관계자들의 ‘입’이 열렸다. 12월 초를 전후한 시점이었다. “돈을 받은 이가 서정우 변호사였다는 사실을 알아내는 과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수사기법’이 활용됐다”고 검찰의 한 관계자는 전했다. 거액 전달 진술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검찰로서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둔 셈이다. 검찰 안팎에서는 이 과정에서 기업 관계자들 사이에 어떤 형태로든 일종의 ‘교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번 수사에는 ‘지그재그식 수사’라는 별칭도 붙어 있다. 이회창 캠프와 노무현 캠프 사이를 오가면서 형식적으로나마 ‘형평성’을 유지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검찰은 한나라당의 불법 뭉칫돈을 캐는 동시에 노 대통령의 측근비리 수사에도 박차를 가해왔다. 측근비리와 관련해서는 일부 인사를 ‘별건구속’(별개의 범죄 수사를 위해서 이와는 관계가 없는 다른 범죄 혐의로 피의자를 구속하는 일)했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심하게 진행해온 측면도 있다. 정치적 편향성 시비가 생길 가능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검찰은 앞으로도 지금까지의 행보를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한나라당과 관련해서는 현재까지 502억원에 이른 불법자금 규모가 더 커질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서는 “5대 기업 이외에 한나라당에 수십억~100억원대의 자금을 준 기업이 더 있다”는 소문이 계속 나돈다. 구체적인 기업 이름까지 거론되는 실정이다. 불법자금 수수의 핵심인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중견기업이라는 구체적인 전망도 나온다.

노무현 캠프쪽 역시 의외의 변수가 생길 가능성은 있다. “액수의 차이는 있지만, 노무현 캠프쪽의 불법자금에 관한 수사 단서도 몇개 더 있다”는 수사팀 관계자의 고백은 이같은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불법자금의 액수는 앞으로 더 큰 폭발력을 지닐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른바 ‘10분의 1’ 발언 때문이다.

현재 노무현 캠프쪽의 불법자금 액수는 정확히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다. 강금원·선봉술·안희정씨 등 관련자들의 진술이 뒤엉켜 있어 가닥을 잡기 어렵다. 한나라당쪽에서 나온 ‘차떼기’ 형식의 대규모 자금이 밝혀질 가능성도 지극히 낮아 보인다. 지금까지의 검찰 수사내용에 비춰보면 노 대통령쪽의 불법자금 규모는, 여권 핵심 관계자들이 어렴풋이 추산하는 불법자금 규모인 20억~40억원 정도를 뛰어넘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실무자들의 일을 꼼꼼히 챙기지 않았던 노 대통령의 스타일로 미뤄볼 때 단일화 이후의 자금 흐름을 살피는 과정에서 ‘복병’을 만날 수도 있다.

이회창 검찰청사 방문에 내심 불쾌

이회창 전 후보의 형사처벌 여부는 수사가 정상에 오르기 직전에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12월15일 느닷없이 이뤄진 검찰청사 방문에 대해 검찰은 ‘한 겨울날의 소동’ 쯤으로 여기며 내심 불쾌해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선수를 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관련자들의 진술이나 입증자료가 없으면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면서 이 전 후보가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 무리한 출두를 강행했다”고 검찰의 한 관계자는 말했다.

어쨌든 수사는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검찰이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무기는 불법자금의 사용처에 대한 수사다. 세풍사건 수사와 관련해 검찰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대선 잔금을 개인 용도로 쓴 사실을 확인했지만, 이를 기소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의 경우 검찰은 불법자금 규모가 큰 만큼 개인적인 사용 부분이 튀어나올 것으로 확신하는 분위기다. 막바지 수사과정에서 정치권에 또다시 회오리가 몰아칠 가능성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김창석 기자 kimc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