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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 힘자랑에 정권이 막간다 불신의 늪에서 혈투 벌이는 민주노총과 정부… 치명적 불안 제거할 진지한 대화는 불가능한가
“노동자정당 집권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노무현 후보에게 일정한 지지를 보냈고, 이런 노동자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한 정권에 일정한 기대를 건 것도 사실이다. 지금 노동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보나 혁신이 아니라 애초 약속했던 노동개혁을 이행하라는 것이다.”(금속노조 심상정 사무처장)
참여정부 10개월, 갈 데까지 간 노-정
‘친노동자’ 성향이라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10개월, 노-정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민주노총은 지난 11월6일 제1차 전면 총파업, 9일 전국노동자대회, 12일 2차 총파업에 이어 연말까지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을 벌여나가겠다고 밝혔다. 매주 수요일 집회, 11월26일 대규모 집회시위, 12월 초 민중대회 등 강력한 대정부 투쟁을 선언해둔 상태다. 김대중 정부 때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겨울투쟁, 즉 ‘불만의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민주노총 손낙구 교육선전실장은 “민주노총과 노무현 정부의 관계가 너무 일찍 틀어지고 있어 걱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어쩌다가 민주노총과 정부가 정권 초기부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험악한 국면까지 와 버린 것일까?
사실 올 초 두산중공업 배달호씨 분신 사태와 화물연대 파업이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되면서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 참여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무현 정부와의 파트너십이 지속될 경우 올 여름 이후 노사정위 참여 여부를 대의원들한테 묻겠다고 한 것이다. ‘노사정위 참가 검토’라는 민주노총의 입장 변화는 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지난 6월 조흥은행노조 및 철도노조 파업 이후 민주노총과 노무현 정부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더 정확하게는 철도노조 파업이 고비였다. 당시 청와대는 ‘철도 민영화 유보’라는 4·20 노정합의가 이뤄진 만큼 파업에 들어가면 안 된다며 “만약 파업에 들어가면 보기 좋게 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 대통령도 철도노조가 파업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막상 철도노조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이 파업을 강행하자 노 대통령은 민주노총이 약속을 깬 것으로 받아들였고, 이때부터 민주노총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진다. 오히려 정부가 민주노총한테 “보기 좋게 배반당했다”는 것이다.
철도노조 집행부의 대량 구속에 이어 정부기관인 철도청이 노조에 75억원의 손해배상·가압류를 제기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악화된 민주노총과 정부와의 갈등은 지난 11월6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화염병 시위까지 등장하면서 더욱 증폭됐다. 급기야 최근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다”고까지 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이런 노정간 대립 국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철도노조 파업 · 대량 구속 · 화염병 등장
물론 철도노조 파업 이후 노-정 관계가 꼬이기 시작했지만, 10월에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 자살, 세원테크 이해남 지회장 분신,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조 이용석씨 분신 사태가 잇따라 터지면서 노-정 관계는 극한 대결 국면으로 치달았다. 민주노총도 노동자들을 극단적인 자살로 내모는 △공공부문 400억원대 손배·가압류 취하 및 민간부문 1천억원대 손배·가압류 취하 ‘유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실태 공개와 차별해소 대책 수립 △장기파업 사업장 현안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금속노조 심상정 처장은 “노 대통령이 인수위원회 시절에 외환위기 이후 일방적으로 희생당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고 노사관계에서 사회적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겠다고 하는 등 노사관계를 정확하게 진단했다”며 “그러나 노동문제가 점차 경제논리에 압도당하면서 정부가 애초 내세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가 왜곡되고 파탄나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내놓은 노사관계 개혁안(로드맵)이나 비정규직 대책, 사용자 대항권 강화 등이 밀어붙이기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노사관계 로드맵은 시한에 쫓겨 노사 양쪽을 모두 배제한 채 노동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표결을 거쳐 마련됐다. 민주노총 손낙구 실장은 “참여정부를 표방하면서도 노사관계에서 오히려 사용자 대항권을 강화하고 비정규직 대책이나 노사관계 로드맵은 일방적으로 정부가 사용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민주노총이 노사정위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중에 노사정위에 들어와 로드맵을 논의하든지 그대로 수용하든지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실 노무현 정부는 민주노총이 올 가을부터 노사정위에 참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연말까지 노사정위에서 로드맵을 확정짓는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정책에 대한 민주노총의 반발이 거세지고 노동자 분신자살 사태가 터지면서 이런 시나리오는 급격히 틀어지고 말았다.
작업장에서 거리로… 우군 없는 노조
그런데 노사갈등이 왜 작업장 안에서 풀리지 않고 ‘거리투쟁’ 양상을 띠며 대정부 투쟁으로 비화된 것일까 현대자동차노조 박유기 사무국장은 “현대자동차야 사정이 다르지만, 대다수 사업장에서는 회사쪽이 노동조합을 방해물로 생각하고 노조를 깨는 데 혈안이 돼 있다”며 “그런데 중간에서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사용자는 손배·가압류, 고소고발로 노조를 마음껏 무력화해왔다”고 말했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벼랑 끝에 몰렸는데도 정부가 방치한 결과 장기분규 사업장에서 잇따라 분신자살이 터졌고, 남은 거라곤 악밖에 없는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다.
사실 민주노총 조직은 중앙 지도부보다는 아래 현장 조합원들에 의해 움직이는 구조다.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는 현장 정서에 이끌려서라도 상급단체인 민주노총이 싸움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고민은 너무나 익숙한 ‘총파업을 포함한 총력투쟁’이라는 조합원 동원 외에 달리 선택이 없다는 데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은 “정부가,민주노총이 전투적인 운동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갈등해결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 정권 초기부터 복잡하고 치밀한 갈등관리 전략을 펴야 했는데 때를 놓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쪽의 시각은 사뭇 다르다. 민주노총이 투쟁에 나서지 않고 기다려주면 정부가 민주노총의 요구를 반영해 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나갈 수 있는데, 민주노총이 싸움을 선택하는 바람에 괜히 사용자쪽과 여론의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노동비서실 권재철 비서관은 “노동자 분신사태 이후 전국노동자대회가 평화적으로 잘 치러졌으면 정부도 부담을 느껴 민주노총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할 텐데 화염병이 등장하고 폭력시위로 얼룩지는 바람에 민주노총이 여론으로부터 고립되고 정부도 어쩔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합법파업에는 정부가 개입해 부당노동행위를 일삼는 사용자의 팔을 비틀어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지만, 불법파업에는 사용자들이 재산 손실이니 뭐니하며 날뛰는 판에 국가가 개입하기도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노 대통령의 노동관도 사태 악화에 한몫
철도파업 이후 노조에 대한 여론의 비난이 터져나오면서 정부도 궁지에 몰렸고 결국 타협의 길이 봉쇄되고 말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은 “민주노총 안에서 현 정부 들어 이번 기회에 기존 숙원사업을 모두 집단적으로 관철시키겠다는 기회주의적 요구들이 무분별하게 튀어나오면서 재계의 비난이 쏟아졌고, 이에 따라 민주노총과 정부의 지형도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노동’을 바라보는 노 대통령의 뒤틀린 관점도 노동자들이 머리띠 두르고 찬바람 부는 거리에 서게 만든 이유라고 주장한다. 노 대통령이, 노동자들이 왜 줄지어 분신하고 목매달아 항거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고 감정적으로 대응했으며, 이것이 노동 정국을 더욱 얼어붙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청와대 내부에서조차 노 대통령이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다”고 한 데 대해 그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은 “노 대통령이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으로 민주노총에 대응하고 있기 때문에 참모들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번 해볼 테면 해보자는 식의 배짱으로 노동자들을 상대로 노 대통령이 ‘맞장뜨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다.
정녕 노-정 관계는 멀어져야 하는가
최근 노동계에서는 “노 대통령이 ‘민주노총은 100 중에 50을 줘도 받아간 뒤 불만을 제기하고 돌아가서 또다시 투쟁하는 집단이다. 민주노총과 상대해봤자 정부는 주고도 욕먹는, 손해보는 장사만 하게 된다. 아예 대화하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나돈다. 이에 대해 노동연구원 배 연구위원은 “민주노총과 노 대통령 사이에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바다처럼 넓다”며 “노사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보려는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이 사사건건 투쟁으로 나오자, 대통령이 크게 실망해 서운한 감정이 앞서면서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 손낙구 실장은 “노 대통령이 노동을 안다고 해서 기대했지만 김대중 정부 때의 사고를 넘어서지 못한 채 민주노총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면서 ‘오기’를 부리고 있다”고 한숨지었다. 정부가 민주노총과 일정한 선을 긋고 대화와 타협보다 ‘법과 원칙’에 따라 대응할 경우 노-정 관계는 정권 내내 충돌과 대립을 피할 수 없다. 물론 우리나라의 대립적 노사·노정 관계는 하루 아침에 해소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노사관계에서 갈등과 타협은 늘 공존하게 마련이다. 분명한 것은 노조를 사회적 파트너로 인정하고 경제·사회 정책에 실질적인 참여를 보장함으로써 신뢰를 쌓아가는 것만이 사회 통합적 노사관계를 구축하는 길이란 사실이다. 노사정위원회 노항래 전문위원은 “정부 출범 10개월밖에 안 됐는데 노-정 관계가 엉망이 되고 있다”며 “벌써부터 민주노총과 정부가 원위치하고 대립 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 무엇을 어떤 모습으로 바꿔야 할 것인지 진지한 대화가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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