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이야기 ] 2003년11월19일 제485호 

복지부동인가, 유구무언인가

노-정 충돌에도 침묵 지키는 권기홍 노동부 장관… 총파업으로 입지 줄어 물밑 업무만 수행

“오랫동안 노사 갈등을 중재하는 일을 해왔는데 이런 경우는 생전 처음이에요. 나하고 몇 사람이 분신자살 사태가 터진 근로복지공단, 한진중공업, 세원테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재에 나서려고 했는데, 위에서 ‘쓸데없이 무슨 일을 하고 다니냐. 더 이상 나서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최근 우연히 만난 한 노동부 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중간에 나서서 노사분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 대해 청와대와 노동부 윗선에서 괜한 일 하지 말라는 ‘이상한’ 지시까지 하고 있다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사진/ 파업 현장에서 대화를 촉구하던 장관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11월4일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권기홍 노동부장관과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연합)


정권 출범 초기와 너무 다른 행보

언뜻 보기에 상식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을까 물론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 단체가 아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강경 발언 이후 청와대와 노동부가 납작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어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 대한 대통령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한 상태인데 섣불리 개입했다가 대통령한테 무슨 꾸지람을 들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자살 사태 이후 권기홍 노동부 장관이 보인 태도에 의문과 비판을 제기하는 노동계 인사들이 적지 않다. 분신자살 정국 이후 노-정 관계가 급속히 대결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는데도 권 장관이 노동부 장관으로서 별다른 책임 표명을 하지 않은 채 시간만 끌고 있다는 것이다. 낙엽 지고 눈 오고 내년 초 민주노총 지도부 선거로 이어지면 노정 충돌 국면도 자연스럽게 수그러들 것이라고 소박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권 장관은 올 초 두산중공업 배달호씨 자살 사태가 터졌을 때는 자본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직접 현장에 찾아가 대화로 사태해결을 이끌어냈다. 권 장관은 당시 “노조가 비록 불법파업을 했다고 하더라도 (노조의) 정당한 주장까지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노사관계가 정립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런 권 장관의 행보가 언제부터인가 달라졌다는 게 노동계의 판단이다. 노사정위원회 관계자는 “권 장관이 올 상반기에는 ‘친노동자 정부’라는 자본의 비판에 맞서 전경련 등 온갖 곳을 쫓아다니며 설득하기 바빴는데, 하반기 들어서는 이달 초 민주노총 단병호 위원장을 잠깐 만난 것말고는 노동계와 전혀 대화를 하지 않는다”며 “노동자 분신사태가 일어난 한달 동안 아무런 액션도 취한 게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노동부가 가압류·손배 문제에 대해 별다른 대책이나 입장도 내놓지 않은 채 노사정위원회에 가서 알아보라고 떠밀고 있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사진/ 참여정부의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경제민생점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실수를 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가. 청와대쪽은 “권 장관이 아무런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대책도 내놓지 못하자 대통령이 호통을 쳐서 지난달 29일 3부 장관 담화문 형태로 가압류·손배 문제 및 비정규 대책을 내놓은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물론 노동부는 가압류·손배 문제가 민법을 손질해야 하는 만큼 노동부의 업무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가압류·손배로 노동자들이 고통받아 분신자살하고 있는 판에 시간을 끌 여유가 없는 게 현실이다. 민주노총 손낙구 실장은 “노동부가 할 일이 없다고 할 게 아니라, 노동법원을 설치하든지 파업을 민·형사로 해결하지 않도록 개선안을 만들어야 한다”며 “노동계의 요구를 들어주려면 노동부 장관이 정부 내 경제부처의 반대 의견에 맞설 정도로 무리를 해야 하는데, 권 장관이 이제 노동문제 해결에서 마음이 떠나버린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권 장관은 최근 방송사쪽의 줄기찬 요청에도 불구하고 노-정 대결 국면을 진단하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전혀 나서지 않고 있다. 노동계와 정부가 싸우고 있는 판인데 정작 노동부가 토론에서 빠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권 장관의 이런 석연찮은 행보가 내년 총선 출마설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까지 일부에서 나돌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대검찰청에서 장기분규 사업장 명단을 확보해 각 지역 검찰청별로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조사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으로 알려진다. 노동부보다 오히려 법무부가 더 앞장서고 있는 것이다.

총선 출마설 나돌아… 노동정책 동요 징후

그렇다면 권 장관은 과연 손을 놓고 있는 것일까? 사실 권 장관은 그동안 “민주노총이 도와주지 않아서 힘들다”는 말을 자주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노총이 걸핏하면 총파업 투쟁에 나서면서 권 장관의 입지도 급격히 축소됐다는 것이다. 노동부장관실 관계자는 “권 장관이 참여정부의 사회통합적 노동정책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며 “노동계가 과격 시위까지 벌이는 바람에 장관이 운신하고 선택할 폭도 좁아졌다”고 말했다. 권 장관이 몸 사리고 있는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또 “장관이 앞장서 움직이면 면피야 할 수 있겠지만 결국 노사가 풀어야 할 개별 사업장 문제에 왜곡을 가져올 수도 있다”며 “차라리 오해받고 욕먹더라도 물밑에서 장관 역할을 하는 게 더 바람직한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한편 노동계는 “권 장관이 ‘노동부는 노동자 편이어야 한다’고 말해왔지만, 노동자와 노동조합 문제를 경제논리로 회귀시키려는 안팎의 공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벌써 지칠 대로 지친 상태까지 온 게 같다”고 말한다. 정권 초기에 노사간 힘의 균형을 잡아가겠다고 다짐했지만, 철도파업 이후 민주노총에 대한 여론의 비난 공세가 거세지는데다 “노동자가 경제회복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용자의 공세까지 강화되면서 노동정책이 크게 동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 ‘경제’와 ‘노동’이 맞섰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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