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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빅뱅 ‘째깍째깍’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둘러싼 생존게임… 재신임 투표 유야무야·정치개혁 뇌관 폭발
정치권에 안개가 한층 짙어졌다.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가 걸린 마당에 검찰의 SK 대선자금 수사가 파문을 촉발했으며, 나아가 대선자금 특별검사 정국으로 넘어갈 징후까지 나타났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여야 4당 대표간 연쇄회동(10월25~26일)은 애초 교착상태에 빠진 재신임 정국의 해법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국면은 전혀 다른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선자금+재신임 정국’을 읽는 열쇠는 현 국면의 핵심 플레이어인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와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을 밝히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최병렬의 수세 반전 시도
우선 최 대표의 생각부터 읽어보자. 첫째로 그는 10월26일 노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대검의 (한나라당에 대한) 수사과정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며 “그러나 야당만 조사하고 여당은 손 빼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검찰수사는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않겠지만 현 검찰로는 형평성과 공정성을 기할 수 없다”며 “(여야의 대선자금에 대한)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특검”을 요구했다. 이 주장은 “우리가 잘한 것 없다. 그러나 혼자서 당할 수는 없다. 그러니 당신 것도 까보자”는 이야기로 요약된다. 상대방의 그것도 물고 들어감으로써 검찰수사에 따른 일방적 수세를 탈출하자며 방어진을 펼친 셈이다.
혼자 당하긴 싫어… 탄핵·하야 공세
최 대표의 제안 배경에는 이회창 전 대선후보, 서청원 전 대표를 주축으로 한 ‘전임 지도부’ 또는 ‘범이회창계’의 불만을 의식한 측면이 일부 있는 것 같다. 그동안 최 대표가 “정정당당하게 검찰수사에 응하겠다”고 한 것을 두고, 전임 지도부쪽에선 “자기가 치른 대선이 아니라고 발을 빼는 것이냐”는 불만이 적지 않은 터였다.
노 대통령쪽에서 ‘작은 것’이라도 한건 잡아내면 최 대표는 역공의 고삐를 쥐게 된다. 탄핵·하야 공세를 펴고, 여차하면 보궐 대통령선거에 ‘등판’할 수도 있다는 게 최 대표의 계산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세 번째로, 최 대표는 대선자금 비리가 전임 지도부 소관이라는 점을 명료하게 의식하는 것 같다. 특검수사로 비리가 한층 낱낱이 파헤쳐진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다칠 일은 없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소장파 의원들은 “대선자금 비리는 한나라당에 위기이자 기회”라고 말한다. 또한 당내에선 최 대표가 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된 뒤 ‘당의 환골탈태’를 강력히 추진하리라는 관측도 나온다.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내걸고 내년 총선에서 강도 높은 물갈이를 시도하리라는 이야기다. 구체제를 떠받쳐온 상당수 중진들을 밀어내면 최병렬 체제는 오히려 강화될 수 있다.
■노무현의 공세적 방어
이번에는 노 대통령의 생각을 읽어보자. 노 대통령이 “특검도 각 당이 합의해 정치권이 결단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10월26일 최 대표와의 회동에서)고 한 말을 두고,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검찰수사를 마무리한 뒤에 미진하면 특검도 할 수 있다”며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유인태 정무수석은 “최 대표의 제안이 비리를 봉합하자는 생각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지만, 진짜로 모든 것을 털자는 진정성이 담겼다면 환영한다”고 말했다. 즉, 논의 과정에서 샅바싸움은 있을 수 있겠으되, 최 대표의 제안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 셈이다.
검은돈 유입 통로 봉쇄한다
오히려 노 대통령은 어떤 점에선 최 대표와 배짱이 맞아떨어지는 면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핵심 측근의 말을 옮겨보자. “대선자금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는 반드시 열어야 한다. 그것을 열면 기업이 정치인에게 불법적으로 돈을 못 주게 된다. 기업이 비자금을 조성하지 않으면 경제의 효율성이 높아진다. 정치권에도 엄청난 변화가 올 것이다. 이탈리아의 마니풀리테(대대적인 정치권 사정으로 정계 개편이 촉발됐음)가 우리나라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검찰이 대선자금을 수사하고 나면 앞으로 총선자금은 그대로 두겠나. 총선에서 국회의원 절반이 날아가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치 지형의 변화다.” 노 대통령 진영은 기본적으로 판을 키우고 흔들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는 것 같다. 지금의 정치 지형으로는 “대통령을 못해먹을” 지경이기도 하거니와, 자질구레한 수들을 동원해봤자 내년 총선에서 ‘정치적 파트너’인 열린우리당이 참패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노 대통령의 주요 정치적 기반인 개혁 성향 신인들의 정치적 진출을 위해서도 정치권의 기득권 구조를 무너뜨릴 필요성은 크다. 노 대통령은 이런 구상을 오래 전부터 가다듬어왔다. 그는 7월21일 여야 대선자금을 함께 공개하자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특별검사든 검찰이든 수사권이 있는 기관이 반드시 검증해야 국민이 납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검을 통한 여야 대선자금 동시 검증론의 원조가 자신이었기에, 그는 10월26일 회동에서도 최 대표의 제안에 긍정의 뜻을 표시했다.
■정치개혁 가능한가
이런 점들로 볼 때 대선자금 정국은 일차적으로 한국 정치판의 틀을 바꿔내는 ‘빅뱅’과 큰 폭의 정치개혁이라는 부산물을 가져올 가능성이 적지 않다. 특검이 과연 합의될지, 합의된다면 어떤 범위에서 수사가 이뤄질지를 비롯해 모든 게 불확실하지만, 최종적인 귀결점은 “더 이상 검은돈이 공공연히 흘러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큰 폭의 정치개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10월26일의 회동에서 노 대통령과 최 대표가 “시민단체까지 참여시켜 혁신적으로 정치개혁안을 만들자”는 데 의기투합한 점도 이런 예측의 단서다.
죽여야 사는 ‘치킨 게임’ 개막
그러나 앞으로의 정국은 청와대와 한나라당간에 어느 한쪽의 완전한 패퇴를 전제로 한 ‘치킨 게임’의 성격도 함께 가질 것이라고 김형준 박사(정치학·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 부소장)는 분석했다. 우선 노 대통령은 자신의 대선자금에서 뭔가 새로운 비리가 드러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물론 노 대통령은 “나 혼자 깨끗하다고 주장한 적은 없다. 그러나 여야간에 큰 차이는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문제에 상대적 자신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미처 몰랐던 비리가 없으란 법이 없으며, 만일 그런 비리가 불거지면 현직 대통령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파문은 한층 커지게 마련이다. 최 대표 역시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형국이다. 최 대표의 특검 제안에 현재로선 당내 ‘전임 지도부’쪽도 딱히 이견을 달지 않지만, 수사 진전에 따라 분위기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이회창 전 대선후보쪽의 한 인사는 “수사결과 대선자금을 받아쓴 소속 의원·지구당위원장을 비롯한 당 조직 전반이 다칠 경우 최 대표는 당을 보호하지 못한 지도부로 규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임 지도부쪽에선 그동안 ‘정기국회 보이콧’ ‘청와대 앞 시위’ 등 수사 무력화를 위한 전통적 방책을 물밑에서 거론했다. 이런 가운데 애초의 관심사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문제는 사실상 실종되는 기이한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여야의 대선자금 문제를 특검에 걸어놓음에 따라, 특검을 과연 하게 될지부터 시작해서 특검수사를 하더라도 결과가 나오려면 몇달이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이 제안한 12월15일 국민투표는 이미 시기를 놓쳤으며 그렇다고 내년 4월 총선 이전 다른 시점으로 정치권의 합의가 이뤄지기도 어려운 상태다.
재신임 문제, 장기 미제로 남을 수도
그렇다고 해서 재신임 문제를 조만간 매듭짓기도 어려운 것 같다. 노 대통령이 자신의 직을 건 마당에 스스로 주워담을 수는 없는데다, 여야 4당간에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그냥 재신임된 것으로 해주자”고 합의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큰손’인 최 대표는 국민투표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고리’만 걸어두려 하고 있다. 어쨌든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당분간 생존 문제를 걸고 일대 쟁투를 벌일 게 분명하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 제안으로 대도박을 시도한 데 맞서, 한나라당도 ‘올인’ 승부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재신임 문제가 ‘장기 미제 사건화’하는 데 따른 국정 불안은 불가피할 것 같다. 대한민국 정치권의 현주소와 능력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대목이다.
박창식 기자 cspcs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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