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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 정객들 ‘링’에 오르다 대선자금 정국 주도권 놓고 여야 한판대결… 정치권 큰손들이 준비하는 회심의 승부수
정치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말 중에 “정치는 생명체”라는 말이 있다. 정치가 정치인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피동체가 아니라 독자적으로 살아 꿈틀거린다는 것이다. 이 말은 주로 정치권에 오래 몸담은 쪽이 위기에 몰렸을 때 많이 사용한다. 언제 민심이 바뀌고 전세가 역전될지 모른다는 의미로 쓴다. 사람이 어려울 때 ‘바닥’을 드러내는 것처럼, 정치인도 곤경에 처했을 때 ‘진면목’이 드러난다. 지난해 대선을 기점으로 ‘3김시대’라는 긴 터널을 지나 격변기를 맞고 있는 지금, 정치권의 ‘큰손’치고 누구 하나 위기가 아닌 이가 없는 것 같다.
재신임 정국에서 검은돈 정국으로
낮은 지지율에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의 비리 의혹까지 겹친 노무현 대통령은 위기 국면에서 ‘재신임 카드’로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10월25일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대선자금에 대해) 전면적이고 무제한적인 특검을 실시하자”고 특별검사제 도입을 제안한 것에 대해서는 “정치권이 하자고 하면 마다할 수 없다”며 가능성을 열어놨다. 이후 오간 대화의 행간을 읽으면 ‘못할 것 없다. 바라던 바다’로 해석된다. 노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도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위기를 타고 넘었다. 그의 승부사적 기질을 여실히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은, 지난해 후보 단일화 제안을 수용한 이후부터다. 당시 정몽준 국민통합21 대표에 비해 지지도가 낮을 때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으면 승복하겠느냐”며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했고, 단일화 이후 계속된 ‘내각분점 요구’에는 “그런 대통령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버텼다. 당시 대선캠프 속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정치 스승이라는 김원기 의원을 포함해 선대위에 참여했던 거의 모든 의원들이 ‘일단 받아들여야 정 대표를 유세장으로 끌어낼 수 있다’며 수용을 강권하는 분위기였다”며 “보기에 따라서는 권력분점이 합리적인 요구일 수도 있었지만, 당시 노 대통령은 ‘모 아니면 도’식이었다”고 회상했다. 돌아온 ‘무사 노무현’은 무엇을 얻었을까. 일거에 정국 주도권을 확보했고 한때 노 대통령으로부터 멀어졌던 지지세가 빠른 속도로 집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실상 재신임받은 정치적 효과를 거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부분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스타일에는, 재신임을 묻게 된 이유가 측근 비리에서 정치·언론의 환경, 정치개혁 등으로 방점이 옮겨간 데서 보이듯 ‘앞뒤를 치밀하게 재보고’ 수를 던지는 정교함은 모자라 보인다. 또 재신임 정국에서 특검 정국으로 옮아가기까지, 정치인이기에 앞서 대통령인 그의 행보가 “너무 즉흥적이지 않느냐”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리더십 시험받는 ‘선장’ 최병렬
대선자금 수사로 최대의 위기에 처한 한나라당호 ‘선장’ 최병렬 대표 역시, ‘거함’이 휘청거릴 정도의 위기 속에서 리더십을 시험받고 있다. 10월25일 노 대통령과의 만남을 앞두고 한나라당 의원들로부터 강공 주문을 받은 최 대표는, 노 대통령과 마주 앉자마자 한두 마디 끝에 탄핵과 하야를 언급할 정도로 ‘세게’ 나갔다.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와 관련해서도 “신중한 결정을 말해놓고도 신중치 못했다”고 공세적인 태도를 이어갔다. ‘최틀러’(최병렬+히틀러)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최 대표는 한나라당 내에서 “정치 스타일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과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노 대통령이 재신임될 경우 한나라당 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하자”던 그의 ‘벼랑 끝 전술’은 의원총회에서 반발에 부닥쳐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의 정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의 재신임과 한나라당 의원들의 재신임을 묶는 방식으로 배수진을 치자는 것으로, ‘올인에는 올인으로 맞선다’는 맞불 전략이었던 셈이다. 최 대표가 지난 6월 범이회창계 의원들이 다수인 불리한 환경 속에서 ‘개혁과 쇄신’을 내세워 ‘안정 속에 개혁’을 바라는 대의원들의 지지를 끌어내 대표직을 거머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조직의 힘’보다는 주로 그 자신의 개인적 역량에 의존하는 정치를 해왔다. 강성·독선적 이미지 이면에는, 당내 소장파들로부터 “말이 통하는 합리적 보수”라는 호평을 받기도 한다. 두 차례의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회창 전 후보는, 대선자금 문제로 사과 기자회견장에 서야 할 위기에 몰렸다. 경우에 따라서는 책임을 추궁당할 수도 있다. 정계은퇴 이후 미국에 머물면서 국내 정치와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던 이 전 후보는 10월20일 귀국해, “나라가 혼란스럽고 국민이 불안에 떨고 경제가 나빠지고 있는데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처리해야 할 대통령이 좀 어렵다고 느닷없이 재신임이라는 정치도박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노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에 일침을 가했다. 그의 발언은 내용의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정을 해보자. 이 전 총재가 ‘정계를 떠난 사람이 답하기에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대통령께서 국정을 잘 이끌기 바란다’고 말했다면, 대안 부재 상태에서 재신임 여론이 높아지던 민감한 시기에 국민들에게 달라보이지 않았겠나.” 한나라당 한 관계자의 ‘충언’은 시사점이 크다. 실제 1997년 대선에서 두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에 시달렸던 이 전 후보는, 지난해 대선에서는 “부덕한 탓”이라며 공방을 피해 갔다. 시시비비를 가려 쾌도난마식으로 대처하는 방식이 정치권에서는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비싼 ‘수업료’를 들인 뒤에 터득했던 그다.
우리당·민주당, 봄날 오래 갈 건가
김원기 열린우리당 창당주비위원장과 박상천 민주당 대표는 외견상 ‘봄날’을 맞고 있는 듯하지만, 당내에서 탄탄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위태롭기는 마찬가지다. 김 위원장은 ‘지둘려’(기다려의 사투리)라는 별명의 소유자답게 굵직한 현안이 널린 최근의 정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측근은 “타협과 조정을 중시하는 김 위원장의 정치 스타일 때문에 본인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소장파 사이에서는 “당의 공론을 모아 노 대통령을 적극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소극적인 의사소통 구실에 그치고 있다”며 마뜩찮은 표정이다. 반면, 논리를 앞세우는 박 대표는 민주당의 ‘평균치’보다 너무 앞서가다 자충수를 두기도 했다. 재신임 정국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론의 확산 계기로 삼으려다 당내 반발에 부닥친 것이다. 10월15일 대표연설에서도 원고 초안에는 개헌론이 들어 있었으나, 결국 개헌 없는 책임총리제로 수위를 조절했다.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대선자금 문제로부터 자유롭지만(대선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의 화려한 정치 사상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지난 대선을 거치면서 의원 10명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했고, 김 총재는 공개석상에서 사실상 ‘2선 후퇴’를 요구받을 정도로 옹색해졌다. 그는 이번 재신임 정국에 ‘장외’에서는 “차라리 하야를 하라”고 비판하고 내각제개헌론 확산의 계기로 삼았지만, 막상 노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는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많이 나와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며 철회를 설득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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