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버스토리 ] 2000년07월19일 제318호 

[표지] “공적자금을 먹고 튀어라”

밑빠진 독에 쏟아붓는 국민의 혈세… 멋대로 쓰고 갚지 않은 부실기업인들에게 철퇴를




  • 부실기업주는 기죽지 않는다
  • 금융회사 부실의 주범들
  • 정몽원의 교묘한 복귀
  • 최고 30년까지 징역형
  • 예금보험공사에 특별조사권을


  • 몰락한 재벌기업 총수들에겐 공통적인 좌우명이 있는 것 같다. ‘권한은 무한하되, 책임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회사가 온전할 때에는 초법적 권한을 휘두르며 황제처럼 군림하다가도, 문제가 생긴 다음에는 얼른 법적 테두리 안으로 숨는 게 그동안 재벌총수들이 보여준 행태였다. 남의 돈을 맡아 관리하는 금융기관이 개인이나 특정기업의 사금고처럼 굴러가다 몰락한 경우에도 똑같은 양상을 보여준다.

    남의 돈이기 때문에…

    얼마 전 국내외 법률전문가와 학자들이 법무부 용역의뢰를 받아 내놓은 연구보고서 ‘한국의 기업지배구조개선안’의 문제인식 출발점을 이렇게 설정했다. “한국의 기업경영은 설립자나 직계가족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다. 이사회가 있으나 들러리에 불과하고 주주들은 정상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지배주주의 독단으로 의사결정이 잘못돼 손실을 입어도 견제수단이 없다.”

    총수 1인 지배체제에서 재벌기업들의 방만한 차입경영은 국가경제 전체를 쉽게 위험에 빠뜨린다. 이는 대우사태에서 뼈저리게 경험했다. 국내 30대재벌은 총수와 특수관계인이 5% 남짓의 주식지분으로 적게는 수조원에서, 많게는 100조원에 가까운 재산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한다. 만약 자기돈이라면 투자를 해서 은행이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사업에 함부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러나 남의 돈이기 때문에, 그것도 밑져봐야 자기에게 돌아오는 불이익이 그다지 크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인 판단근거도 없이 사업을 벌인다. 총수의 취미를 사업에 연결시켜 그룹 전체를 망하게 하거나 위기에 놓이게도 한다.

    이런 재벌식 경영행태가 문제를 일으켰을 때에는 이상하게도 ‘비용의 사유화, 성과의 사회화’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공적자금을 조성하고 투입하는 과정이 그랬다. 한성대 김상조 교수(무역학부)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위기는 예외없이 그 비용을 귀책사유가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도록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나아가 사회적 비용을 들여 구조개혁을 했을 때에는 그 성과 역시 사회화하는 방안을 동시에 마련하는 게 중요하다”며 “그러나 지금까지 공적자금 투입과정에서는 국민들만 대부분 부실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말했다.

    IMF 관리체제에 들어선 뒤 재벌기업이 쓰러질 때마다 금융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고, 이에 따라 기업의 연쇄도산과 대량실업을 유발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금융부실에 따른 신용경색과 기업파산의 확산, 다시 금융부실의 증가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반복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공적자금을 금융권에 쏟아부어 악순환 고리 차단에 나선 것은 당연하다.

    자손 대대로 엄청난 빚 물려줄 판

    정부가 98년 5월 금융기관 부실을 정리하기 위해 조성한 공적자금은 64조원이다. 이는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가 발행하는 구조조정용 채권에 대해 정부가 국회 동의를 얻어 지급보증한 자금을 말한다. 이렇게 조성한 자금 64조원은 이미 99년 말에 바닥이 나 버렸고, 그 이후에는 회수자금(18조원) 가운데 12조1천억원을 재투입했다. 따라서 실제 투입된 공적자금은 모두 76조1천억원이다. 이것도 모자라 정부 보유 현물주식 등, 국회동의를 받지 않았지만 국민부담이 되기는 마찬가지인 유사 공적자금도 25조8천억원을 사용했다. 지난 2년여 동안 금융권의 부실청소에 든 비용이 101조9천억에 이른 셈이다.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구조조정 비용은 국민 각자에게 얼마만한 부담을 안겨줄까?

    ‘함께하는 시민행동’의 이상근 회계사의 계산은 이렇다. “부실금융기관 증자지원이나 퇴출금융기관 예금대지급에 사용한 자금 62조원은 회수율이 낮아 25%, 나머지 매입한 부실채권 40조원가량을 되팔아 75%를 회수한다고 가정할 때 궁극적으로 납세자가 부담해야 할 손실액은 회수할 때까지 이자 35조원을 포함해 모두 100조원 정도이다. 이는 국민 1인당 213만원, 세금부담능력이 있는 경제활동인구 1인당 454만원, 가구당 769만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경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한집에서 769만원을 모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여기서 끝나면 다행이다. 정부는 올해와 내년에 걸쳐 30조원가량의 추가 공적자금 소요가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자칫 자손 대대로 엄청난 빚을 물려줘야 할 판이다. 성균관대 안종범 교수(경제학)는 “공적자금이 투입잔고가 90조원을 넘어가면 일반회계에서 갚아야 하는 한해 이자만 10조원에 이른다”며 “내년부터 경기하강 국면에 접어들어 세수가 정부 예상치보다 줄어들 경우에는 공적자금 이자부담이 심각한 재정압박을 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안 교수는 특히, 지금처럼 정부가 원금을 회수하는 족족 재투입하면 재정적자가 걷잡을 수 없이 누적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국가경제 전체를 총체적 부실덩어리로 몰아가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존재들에 대한 책임추궁은 철저했는가? 물론 부실이 발생하기까지 공적책임과 사적책임의 경계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방만한 차입경영으로 무분별하게 투자를 하다가 기업을 망하게 한 부실경영인, 위험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금융기관 임직원, 부실 재벌에 금융재원 집중을 조장 또는 방치한 정치권과 정책당국자들에게 대한 책임은 받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엄청난 국민혈세를 축낸 것에 견주면 부실의 원인제공자들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추궁은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친다. 금융감독원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240개 금융기관 가운데 5월 말까지 237개 금융기관 검사를 마쳐 임직원 941명을 형사고지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형사고지 대상에 대규모 부실에 책임이 있는 대주주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고, 배임이나 횡령 등 중대한 혐의에 걸린 사람들도 드물다. 심지어 이미 고인이 된 은행 임원을 검찰에 고발한 사례마저 있어 실효성 없는 ‘쪽수 채우기’ 의혹을 받고 있다.

    예금보험공사도 금감원 검사결과와 자체 조사결과를 토대로 239명의 금융기관 임직원들에게 3143억원의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손해배상청구액은 예금보험공사가 지출한 공적자금 46조8천억원의 0.6%에 불과하다. 게다가 정부는 부실관련자에 대한 엄정한 책임부과 의지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금융권에 무려 66조원의 부실을 안긴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 해외에서 1년 가까이 머물러 있어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게 단적인 사례다. 또 최근 참여연대가 금감원에 부실관련자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하자 “금융실명거래 및 예금비밀보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공개할 수 없다”고 답변해, 금융당국이 건전한 예금자 보호보다는 부실관련자의 비밀보장에 더 신경을 써는 모습을 보여줬다.

    김우중을 1년 가까이 내버려두다니!

    금융부실의 진원지는 대부분 기업의 부실경영이다. 기업이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려 제때 이자를 갚지 못하면 그게 바로 국민세금으로 메우고 있는 부실채권이다. 따라서 금융기관들은 사전에 대출심사를 철저하게 해야 하고, 사후적으로도 문제가 생기면 최대한 부실경영의 책임자를 찾아 민·형사적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런데 금융기관들의 대응은 ‘주면 좋고 안 주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이다.

    개인이 빌려간 돈을 제때 갚지 않으며 연대보증인까지 망할 정도로 철저하게 구상권을 행사하면서도 한번에 수조원씩 손실을 안긴 재벌기업들, 특히 총수들에게는 금융기관들이 더욱 관대하다. 배임이나 횡령이 명백한 경우에도 법적 대응을 하는 금융기관들이 거의 없다. 대출금을 출자로 전환해주면서 기존 대주주의 지분을 소각하는 선에서 책임 추궁을 마무리하는 게 대부분이다. 재벌총수가 부도를 낸 다음에도 버젓이 회사로부터 월급을 받고, 회삿돈으로 굴리는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더라도 채권단이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는 사례도 있다. 회사가 망해 수많은 종업원들이 일자리를 빼앗기고 채권 금융기관은 고사위기에 내몰렸는데도, 어떤 재벌총수는 세대를 넘나드는 연예인과의 로맨스를 즐기며 최근에는 경영권 복귀를 시도하기까지 했다.

    아직도 기업과 금융기관 모두 불특정 다수의 남의 돈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도덕적 해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라이스대 채수찬 교수(경영학)는 “정부가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투입하거나 금융기관이 기업에 구제금융을 해줄 때에는 부실의 원인제공자들에게 먼저 철저하게 민·형사적 책임추궁을 하는 게 일의 순서”라며 “문제를 만드는 사람과 책임을 지는 사람이 달라 시장규율이 무너지면 공적자금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실을 초래한 장본인들이 먼저 뼈를 깎는 자구노력과 손실부담을 하지 않고 부실이 정리될 경우에는, 앞으로도 모두가 ‘눈먼 공적자금’에 매달릴 것이라는 경고이다.

    박순빈 기자sbpar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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