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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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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독립군, 체첸 결사대!

등록 2002-10-31 00:00 수정 2020-05-03 04:23

200년이 넘은 러시아의 식민지 말살정책… 유전에 대한 푸틴의 탐욕과 인기몰이가 끔찍한 사태 불러

특수부대와 화학무기에 준하는 독가스 살포에 의한 170여명의 사망으로 일단락지어진 이번 모스크바 인질극은 푸틴 정권 프로파간다의 거짓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푸틴의 선언과는 반대로 체첸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푸틴 정권의 체첸 독립군 진압은 완승은커녕 소강상태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지난 8년 동안 두 차례에 걸친 러시아군의 침공을 당하면서 적어도 15만명의 생명을 잃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 체첸의 독립군 세력이 절망감에 차 ‘적지(敵地) 수도’의 자살공격에 나선 것이다.

역사에 남을 이맘 샤밀의 저항전

물론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인질극과 같은 방법을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스크바 극장에 침입한 체첸 결사대 일부는 러시아 침략군에게 남편을 잃은 체첸의 전쟁 과부들이었다. 고향도 혈육도 미래도 빼앗긴 그들은 구약성서(사사기)의 삼손처럼 ‘적들과 같이 죽는’ 길을 택한 것이다. 생명을 희생시키는 그들의 선택은 분명히 비판받아야 하지만, 혈육의 죽음을 지켜본 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한다면 그들을 단순히 비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을 자살과 살인의 길로 가게 한 것은 8년에 걸친 최근의 러시아 침략과 200년이 넘은 러시아의 체첸 식민화·민족말살 정책이다. 그들이 세계사를 통틀어 유럽 식민주의에 가장 큰 피해를 본 한 종족인 만큼 우리로부터 동감과 이해를 얻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체첸이라는 종족은 현재의 본고장에서 고대부터 큰 이동 없이 살아왔다. 그들은 18세기에 접어들어 이슬람을 종교로 받아들이면서 초기 국가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 침략자들은 늘 체첸을 ‘야만인’으로 비하하여 칭했지만, 종교적 지도자 이맘(Imam)을 지역 공동체들의 원수로 삼는 그들의 사회구조나, 유럽 화기를 확보한 군대, 그리고 아랍어나 이슬람 신학에 조예가 깊은 성직자들은 결코 ‘야만’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러시아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그들의 전통과 신앙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다.

코카서스로 남하하던 러시아 세력은 1783년부터 체첸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침략을 개시하여 19세기 초반에 이르러 체첸 북부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남부로 피신하지 못한 북부의 체첸 주민은 러시아 지주들의 농노가 돼야 했다. 일부 남부의 주민들은 이맘 샤밀(Imam Shamil)이라는 저명한 종교적 지도자의 지휘 아래 1824년부터 59년까지 유럽 침략에 대한 ‘비서구 저항’의 역사에 길이 남을 저항전을 펼쳤다. 수천m 높이의 산악지대에서 복병전과 불의의 기습으로 침략군을 괴롭힌 이맘 샤밀을, 러시아쪽은 ‘비도(匪徒)의 괴수’로 부르고 그를 지원한 마을을 전부 초토화했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이 십분 사용한 ‘초토화 전략’은 사실 그때 처음으로 실험된 것이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비도의 괴수’ 쪽에 싸우는 뮤리드(종교를 위한 투사. 샤밀 독립군의 지칭어)들 중에는 수만명의 러시아군 탈영병들이 상당한 부분을 이루었다. 체벌 위주의 비인간적 군기와 농노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보다못해 샤밀 독립군의 인간적인 풍토를 택한 것이다. 항복하는 마을들은 농노로 삼지 않겠다는 러시아군의 선언과 마을의 폭사(暴死)를 더 이상 볼 수 없었던 샤밀의 항복으로 독립전쟁이 일단락됐지만, 체첸 사회가 본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1860년 체첸지역의 인구는 터키 등지로의 피난과 초토화 작업으로 인해 1820년대 초기의 4분의 1로 변했다. 그 뒤 조선에서의 일제의 정책을 방불케 하는 러시아인 농민 이민 장려책으로 토지를 잃는 체첸 주민들이 다시 투쟁에 나서곤 했지만 정규군 투입으로 진압되었다. 대러시아 독립전쟁이 몇 세대의 생활현실이 된 관계로 침략자에 대한 적개심은 일상적 정서 중의 하나가 됐다. “러시아 군인 한명도 죽인 적이 없는 체첸 남자는 장가가기 어렵다”는 민담은 그때 생겼다. 전설과 문학, 민요에서 그대로 반영되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기억들은 현재의 체첸 투쟁을 훨씬 더 격렬하게 만든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자 식민지 멍에 밑에서 신음했던 체첸 민족은 독립과 전통 이슬람 사회의 복원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체첸 세력은 모든 소수민족들에게 자결권과 전통 존중을 약속한 볼셰비키들과 협조하면서 반혁명 운동의 격퇴에 공헌했지만,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독립이 아닌 자치권뿐이었다. 그것마저 스탈린 집권기에는 ‘농업 협동화’와 같은 강압적인 관제 캠페인과 아울러 빼앗기고 있었다. 체첸 공산당의 지도부가 ‘분리주의’ 혐의로 끌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937~38년대에 체첸지역에서 대규모 저항이 일어났는데, 스탈린 군대는 약 12만명을 학살하여 이를 진압했다.

볼셰비키의 배신, 파쇼 독일과의 연대

러시아 지배하에서는 민족말살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 체첸 소수세력은 1941~45년의 소·독 전쟁에서 독일 군대와의 연결을 모색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파쇼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에 손을 뻗친 피압박 민족이 체첸의 소수파뿐이겠는가 버마나 팔레스타인 아랍, 이라크,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들도 이와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극소수의 ‘배신행위’에 대한 책임을, 1944년에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한 전체의 체첸민족이 져야 했다. ‘강제 이주’라고 말하지만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40만명이 되는 체첸민족 중 약 30%가 기아와 계획적인 학살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15년 동안이나 스탈린 정권으로부터 학살당하고 연고도 없는 카자흐스탄으로 끌려간 체첸민족이 적개심과 복수심으로 찬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들을 카자흐스탄에서 직접 본 의 작가 솔제니친은 “그들은 저항할 줄 아는 자만을 존경했으며, 순응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스탈린 정권은 러시아와 소련의 지배를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집단적 타자’를 키워낸 셈이었다.

1990년대의 체첸 저항의 주요 지도자들이 카자흐스탄의 유적지에서 자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그들의 급진적인 반러 성향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스탈린 사망 이후인 1957년에 본적지로 돌아올 수 있었던 체첸인들은 악몽 같은 과거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소련이 1991년에 붕괴하자마자 두다예프(Dudaev) 장군이 주도하는 체첸민족의회(CNC)는 체첸지역의 독립을 선언하고 과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러시아 중앙정권에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경제봉쇄 정책과 체첸에 대한 영유권 고수 전략이었다. 주요 이유는, 일년에 300만t의 석유를 생산할 수 있는 체첸 유전을 보유하고 소련의 붕괴 이후로 점차 무너져가는 ‘강대국 러시아’의 이미지를 존속시킴으로써 소수민족의 독립 움직임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옐친 지도부의 속셈이었다.

매일 죽어나가는 체첸 게릴라들

더불어 또 한 가지는 체첸 지도자 사이의 분열이기도 했다. 전통적인 지역감정 등의 기존 요소들이 이권다툼과 겹쳐져 정파 난립 현상을 낳았다. 러시아는 이를 이용해 친러 세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제1차 체첸 침공(1994~96년)은 침략군의 패배와 체첸 독립의 사실상의 인정이라는 결과만 초래했다. 체첸 독립세력이 막강한 러시아군을 패배시킬 정도의 헌신적인 저항을 펼친 셈이었다.

80만명밖에 안 되는 소수민족에의 패배는 러시아 군부나 보안기관으로서는 소련 붕괴 이상의 ‘자존심의 상처’였다. 드디어 그들에게 ‘설욕’의 기회를 준 것은 옐친의 측근에 의해 차기 대통령으로 내정된 푸틴의 ‘인기몰이’의 필요성이었다. 그들은 1999년 모스크바에서의 의문의 아파트 폭발사건을 ‘체첸 소행’으로 몰아붙여 지금까지 지속되는 제2차 침공을 감행했다. 체첸 전역을 하나의 폐허이자 지뢰밭으로 만든 그들은 체첸 영토 대부분의 점령과 친러파 세력으로 조직된 괴뢰 자치정부 구성에 성공했지만, 독립군 세력은 결코 패배를 인정치 않았다는 사실을 이번 인질극 사태는 보여준다.

체첸에서는 친러파와 점령군에 대한 독립 지향적 게릴라의 공격과 사살이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이 러시아 본토도 언제든지 게릴라 공격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체첸 평화에의 유일한 길은 독립군과의 협상과 독립에 준하는 포괄적인 자치권의 인정이라는 사실을 러시아 정권이 과연 언제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체첸 말살의 ‘전과’(戰果)를 우민화된 상당수 러시아 국민의 제국주의적 세계관에 호소하려 하는가 미국과 서구 국가들이 푸틴 정권의 범죄적 체첸 정책을 방관하는 상황에서, 러시아 국내외의 민중· 진보 세력들이 점령군 철수와 평화협상을 요구하며 푸틴 정권에 압력을 가하는 운동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체첸 민족투쟁의 연혁(http://www.time.com/time/europe/chechnyatrail/chechnyatrail.html), 체첸의 인권유린 상황에 대한 자세한 정보(http://www.hrw.org/campaigns/russia/chechnya/), 체첸 독립운동의 포털 사이트(http://www.amina.com/), 체첸 독립정부의 뉴스 사이트(http://www.chechenpress.com/), 체첸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러시아 ‘급진당’(http://www.radikaly.ru/), 체첸 독립군의 뉴스 사이트(http://www.chechen.org/).

박노자 ㅣ 오슬로국립대 교수·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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