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1900년대 조선, 양계초에 반하다

등록 2004-01-28 15:00 수정 2020-05-02 19:23

개화파들에게 크나큰 영감 주었던 ‘근대의 교사’… 뒤늦게나마 서구의 야만성을 몸소 느끼고 폭로

양계초(梁啓超·1873~1929).
타고난 글재주로 1895~98년간 청나라의 유식층들에게 “중국이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자강(自强)하여 유럽의 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이치를 설파하고, 위로부터의 서구화가 좌절된 1898년에 일본에 망명한 뒤 1911~12년의 중국혁명 전까지 초인간적인 집필·언론 활동으로 ‘동아시아 자강론의 원조’의 위치를 굳힌, 이 광둥성(廣東省) 선비는 1900년대 조선의 개화파들에게 과거의 주자(朱子)와 비교될 만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 독립운동에 열렬한 찬사

근대 서구적 의미의 ‘애국’ 개념을 조선에 소개한 그의 ‘애국론’(愛國論)이 과 에 게재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주권이 빼앗기기 시작한 1905년부터는 그야말로 ‘양계초 붐’이 일어났다. 안창호 등 근대 학교 설립자들은 양계초 소설과 논문들을 한문 독본으로 쓰고 신문·잡지들도 양계초의 글들을 번역해 실었다. (伊太利建國三傑傳·1902)의 4종류 번역판 중 하나는 신채호가 내고, 초기 교육 개혁의 청사진인 (學校總論·1896)의 번역은 박은식이 맡고,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미래를 논하는 양계초의 여러 글들은 장지연이 옮겨 (中國魂)이라는 단행본으로 내었다.

원로급들은 물론, 문일평이나 최남선 등의 차세대 문화 운동가들도 양계초의 글들을 번역·게재해 그를 ‘근대의 교사’로 생각했다. 유럽 언어를 제대로 해독하지 못해 ‘서구’를 일본의 대중 저서를 통해서 배운 ‘이차적 번역에 의거한 근대주의자’ 양계초. 그가 인기를 끈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서구·일본의 사상가와 달리 근대 서구 이론들을 중국 고전에 빗대어 전통에 가까운 방식으로 설명한 양계초의 독특한 스타일과,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야망을 중국 애국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해부한 것은 일제 침략을 당하는 나라의 애국자들에게 가깝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속히 구(舊) 사상의 구속에서 벗어나 과거의 ‘백성’을 애국적인 ‘국민’으로 만들어 서구·일본과 같은 부국강병의 길로 가야 한다는 양계초의 사회진화론적인 논리는 조선 신지식인층의 집단 이데올로기로서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가르치는 대로 바꾸지 않으면 망국과 멸종을 당한다”는 이야기는, 보수파와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도, ‘계몽의 대상물’로 자리매김되어진 민중의 설득과 동원을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제국주의 국가들을 학습해 닮아야 한다는 논리는 결국 제국주의에 대한 지적인 항복을 의미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그 당시에 찾아보기란 쉽지 않았다.

한국의 1920년대나 1980년대가 ‘마르크스의 시대’, 1990년대가 푸코 등의 ‘포스트’ 담론들의 시대라면, 1900년대는 분명히 ‘양계초의 시대’였다. 그러나 한국이 흠모한 서구 사상가와 달리 양계초는 한국을 무관심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조선관(觀)이 ‘조선은 원래 중국화된 중국의 조공 국가’라는 제국 의식에 젖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의 애독자였던 1900년대 지사들의 독립운동에 열렬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안중근 의거의 소식이 알려지자 양계초가 감동을 받아 “남아의 죽음을 어찌 말하리오? 나라의 치욕을 씻지 못하면 어찌 이름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말로 끝나는 감격적인 한시를 지었으며, 김택영 등의 한국 망명객과 어울려 한국 문집 간행을 돕기도 했다.

유럽여행에서 ‘환상’을 깨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양계초의 저술 대부분은 금서가 됐다. 일본의 침략을 비판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의 저서가 독립운동가들의 필독서라는 사실은 일제의 가장 큰 우려 사항이었다. 그러나 양계초의 글이 서점에서 사라졌음에도 지식인들은 격분에 찬 ‘애시객’(哀時客·양계초 아호 중 하나)의 논설을 은밀히 읽었다. “자유(즉, 민족 독립)는 천하의 원리”란 양계초의 말은, 자유 없는 시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기도문이 된 것이다.

식민지 지식인 대다수가 알 수 없었지만, 1910년대에 양계초는 언론인에서 몇년간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중화민국이 설립되자 그는 진보당이라는 서구 지향적인 온건 보수 정당의 당수, 법무부 장관, 중앙은행 총장 등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황제가 되고자 했던 원세개(袁世凱) 대총통의 야심을 꺾는 데 앞장섰고, 제1차 세계대전에 중국이 연합국(영국·프랑스·미국 등) 편에 서게끔 내각에서 로비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연합국들의 승리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이 틈을 타 중국의 숨통을 옥죄는 온갖 불평등 조약들을 취소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예상대로 전쟁이 1918년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 중국이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 자리를 확보하게 되자, 그는 중국 대표단의 고문 자격으로 프랑스로 떠났다. 1900년대 중국·한국 독자들에게 그토록 ‘근대의 고향’으로 칭송됐던 서구로 떠나는 뜻깊은 여행이었다. 저술하다 과로로 피를 토하며 쓰러지곤 했던 천생의 글꾼 양계초는 유럽여행 기간 내내 부지런히 기록을 하여 1920년 (歐遊心影錄節錄)이라는 제목으로 서구 여행 감상록을 펴냈다. 사상의 근원지를 순례하는 기분으로 떠난 양계초는 과연 서구의 모습을 어떻게 그렸을까?

한마디로 이 여행은 양계초에게 여태까지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서구의 진면목에 눈을 뜨는 ‘진리의 순간’이었다. 런던에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얼마나 파괴했는지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고급 호텔에서조차 전쟁 직후의 물자 부족으로 따뜻한 물도 성냥도 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 다음으로 간 프랑스에서는 그가 보고자 했던 중세의 성당들은 전쟁의 포화로 처절한 모습을 보였으며, 포도주 생산지들은 공동묘지처럼 변했다. “자연의 파괴보다 인간의 파괴가 더 심하고, 야만인의 파괴보다 문명인의 파괴가 더욱더 심하다”는 말은 양계초의 명언이다.

이것뿐이었는가? ‘새 세계 개조의 시점’으로 기대코자 했던 강화회의는 이권 나누어먹기에 바쁜 세계적 야수들의 모임이었고, ‘민주의 성지’로 생각했던 서구는 제대 군인과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곧 폭발할 화약고로 보였다. 입헌군주제나 민주정치를 ‘윗사람과 아랫사람들이 서로 합심하여 통합할 수 있는 최선의 정체’라고 선전했던 양계초는, 데모·파업 등의 진행 장면에서 “하나의 서구 국가 안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의 두개의 적대 국가가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보와 국민 통합의 서구’의 이상적인 그림은, 서구 따라잡기에 몰두한 비서구 지식인들의 순진한 환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양계초의 결론은 무엇이었는가?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 담론인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과 이 담론을 통해서 탐욕을 채웠던 서구의 야만적인 지배자들이 그들의 문명을 막다른 골목으로 이끈다는 것이었다. 약자에 대한 착취와 강자들 사이의 경쟁이 진보의 원동력이라면 그 진보의 결과는, 약자들의 혁명이나 전쟁으로 인한 공멸이라는 것이다. “경쟁은 진보의 어머니”라는 요지의 글들로 조선 지식인들을 매료시킨 양계초는 자신의 말을 취소하게 된다. 불교의 자비, 유교의 ‘균무빈·화무과’(均無貧·和無寡: 평등한 분배의 이상), 도교의 지족(知足) 사상만이 세계를 서구식 폭력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도달한 결론이었다.

어디까지나 보수적 온건파로 남아 있지만…

“자본주의라는 병을 공산주의라는 약으로도 고칠 수 없다”고 한 그는 정치적으로 어디까지나 보수적인 온건파로 남아 있다. 동아시아 사상이 자본주의적 야만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좋다 해도 그 대안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양계초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근대적 국가주의 원조 중의 한 사람인 양계초가 뒤늦게나마 서구적 근대의 야만성을 파악·폭로한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동아시아의 양심적인 지식인 양계초가 일본 책 속의 합리적·민주적 서구를 관념적으로 좋아했지만, 진짜 서구의 폭력적인 모습을 보자 서구가 파멸로 이끌고 가는 세계의 운명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 것이다. 착취당하는 주변부의 어떤 양심적 지성인의 입장에서라도 서구를 다르게 볼 수 있었을까? 일부 미국 학자들은 을 ‘유교적 보수주의로의 회귀’라고 혹평하지만, 이 글은 주변부 지식인 입장에서의 서구 비판의 아주 훌륭한 예다. 다만, 1900년대 양계초에 반해버렸던 당대의 조선 지식인들이 이 깨달음의 글을 접할 길이 거의 없었음은 아쉬운 일이다.

[참고 자료]
1. 양계초 서구 여행 관련 서술(중국어):
http://www.xinhuinet.gov.cn/xhsz/lqcsh/lqc29.htm
2. 이만열 교수(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논문, “개화기 언론과 중국(양계초를 중심으로)”:
http://user.chol.com/~ikch0102/y-1-12.htm
3. “양계초를 공부하는 집”:
http://finance99.com.ne.kr/left.html
4. “운허스님으로부터 들은 만해 이야기”(만해와 양계초의 관계):
http://yousim.buddhism.org/html/2001-win/plan-jung-kwang-ho.htm
5. 양계초가 천진에서 한때 거주했던 양옥의 사진:
http://www.wayabroad.com/tianjin/gaone/gaone52.htm
6. 양계초의 주요 저서인 (1902년) 전문(한문):
http://sangle.web.wesleyan.edu/etext/late-qing/xms.html

박노자 | 오슬로국립대 교수 · 편집위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