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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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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 이후 유대인은 ‘기생충’이 되었다

혁명으로 평등을 쟁취한 인민… 유대인은 근대국가 시민이 됐지만 공동체를 잃어버려
등록 2021-04-25 12:53 수정 2021-04-29 02:26
1945년 1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아이들이 해방된 뒤 찍은 사진. 연합뉴스

1945년 1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던 아이들이 해방된 뒤 찍은 사진. 연합뉴스

근대 들어서 반유대주의를 뜻하는 원어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반셈족주의(Antisemitism)이다. 유대인이 기원한 팔레스타인이 있는 중동 지역 인종인 셈족을 겨냥한 인종주의적 용어이다. 반셈족주의는 말 자체로는 아랍인을 포함한 중동의 셈족 전체를 지칭하나, 유독 유대인만 겨냥하는 용어로 정착됐다.

1879년 독일의 선정적인 언론인 빌헬름 마르는 ‘게르만주의에 대한 유대교의 승리’라는 제목의 팸플릿에서 ‘반유대주의’(Antisemtism)라는 용어를 처음 썼다. 그는 유대인은 게르만 인종과 영원한 전쟁 중이고 자신들의 물질만능주의, 자유주의 그리고 인종적 침입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아버지가 유대인 배우였던 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열등감을 불식하려 했는지 선동적인 반유대주의를 주창했다. 인종주의에 바탕을 둔 이런 반유대주의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와해하는 유대인에 대한 봉건적, 종교적 속박을 대신하는 담론으로 등장했다.

근대 반유대주의는 서방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차별과 배제의 논리와 형식이 바뀌면서 등장했다. 차별과 박해를 종교적 차원에서 세속적 차원으로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근대 이후 반유대주의는 근대 이전 반유대주의인 반유대교주의(Anti-Judaism)와 용어에서도 차이가 난다.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된 반유대주의

유대인에 대한 봉건적, 종교적 속박은 근대 자본주의 발흥으로 그 이전부터 와해하고 있었다. 이는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해방’이라는 제도적 형태로 확인됐다. 프랑스 혁명정부는 혁명이 추구하는 모든 인민의 법 앞에서 평등을 유대인에게도 적용했다. 1791년 프랑스는 유대인에게도 똑같은 시민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유대교 신앙을 가진 개인에 관한 법령에 삽입된 모든 차별적 조처를 취소하도록 규정했다. 이 법에 따른 ‘유대인 해방’은 유대인이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편입됨을 의미했다. 이는 그 이전에 유대인이 기독교 세계의 국외자로서 권리가 없는 대신 의무도 지지 않았던 상황의 종언을 뜻했다. 법령은 “시민적 선서를 할 유대교 신념을 가진 개인에게… 그 선서는 모든 금지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유리하게 부여됐던 예외의 포기로 간주될 것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들에게 유리하게’라는 구절은 유대인 공동체에 부여된 자치권을 지칭했다. 유대인 공동체 내에서 자체적으로 수행됐던 사법, 행정, 조세 권한을 폐기하는 대신 근대적 국민국가의 시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똑같이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 국민국가의 계몽된 인본주의와 평등주의적 조처이다. 또한 모든 주민을 전일적으로 동원하려는 중앙집권적 행정주의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 입장에서는 독립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더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는 근대의 반유대주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중추적 직역과 중산층으로 진출하는 유대인은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적 질서에서 낙후되는 기존 주민의 불만과 분노의 대상이 됐다. 유대인 해방도 유대인의 역사적인 사회경제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조건으로 주어졌다. 이는 해방 이후 유대인의 사회경제적 역할을 ‘기생충적’으로 보는 반유대주의 형성의 시작이기도 했다.

유대인 해방을 상징하는 가장 극적인 장면은 1807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산헤드린’이었다. 산헤드린은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대율법에 의거한 판관들의 최고 회의이다. 산헤드린 의식은 황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명령에 따라 재현됐다. 유대인이 프랑스에서 부여받은 평등한 시민권을 유대의 공식적 전통 의식을 통해 수락해야 한다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유대인이 프랑스 국민이고, 그 의무와 책임을 똑같이 수행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이나 비난받는 사회경제적 행태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산헤드린은 9가지 조항을 최종적으로 채택했다. 핵심 내용은 유대인의 조국은 프랑스이고, 유대인의 결혼 등 관습에도 국법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가장 주목할 조항은 마지막에 있었다. 동료 유대인이나 기독교도를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금지했다. 산헤드린이 채택한 결의는 법적 구속력이 없었으나, 이는 유대인 해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선언이었다.

2020년 1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열린 ‘나치 해방 75주년 기념식’ 모습. 연합뉴스

2020년 1월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열린 ‘나치 해방 75주년 기념식’ 모습. 연합뉴스

유대인 차별의 뿌리가 된 ‘독일 근대사상’

유대인은 여전히 기독교도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이었다. 유대인 해방은 유대인에게 법적인 평등을 줬으나, 기독교 문명 차원에서 사회경제적 해방까지 뜻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독교도의 피를 뽑아서 제례를 치른다는 유대인의 흡혈 의식’은 근대에 들어 ‘기독교도의 부를 빨아먹는 유대인의 고리대금업’으로 변형됐다. 근대 이후 고리대금업으로 상징되는 중개·유통 직역이 유대인에 의해 더욱 성장할수록, ‘기생충 유대인’이라는 알레고리는 강화됐다. ‘예수를 죽인 유대인’ 담론이 봉건시대를 지배하던 종교 교리로 뒷받침됐듯이, ‘기생충 유대인’ 담론은 근대를 지배하는 과학 논리로 포장돼야 했다. 유대인은 생래적으로 열등하고 비열하다는 과학적 증명이 필요했다. 이는 유사과학인 우생학에 기반한 인종주의가 제공했다.

그 과정은 나폴레옹전쟁 이후 몰아친 민족주의 고양과 이에 바탕을 둔 강력한 국민국가 건설 열망으로 추동됐다. 이런 격랑이 가장 강렬했던 독일에서 특히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완성됐다.

첫째, 독일 통일 과정에서 형성된 공격적이고 보수적인 민족주의이다.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해 이마누엘 칸트, 요한 고트프리트 폰 헤르더,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등 독일 사상가들은 기독교-독일 국가가 개별적인 독일 시민보다 우선한다고 설파했다. 레오폴트 폰 랑케, 요한 드로이젠 등의 역사가들은 이런 주장을 정당화하는 독일 역사를 기술했다. 1871년 비스마르크가 밀어붙인 독일 통일이 실현되자, 이런 보수적 민족주의는 통일 독일뿐만 아니라 전 독일어권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통일 뒤 새로운 제국 질서의 성장에 깊은 인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니체는 ‘속물적인 노예적 도덕성’, 민주주의, 중산층의 ‘자기만족’ 등을 구시대의 진부한 가치라며 경멸했다. 그의 저작 <권력으로의 의지>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독일 지식인들에게 ‘힘이 정의를 만든다’ ‘금발 야수’ ‘초인’ 등 소름 끼치는 매력적 구호를 제공했다. 니체는 결코 군사주의를 옹호하지 않았지만, 이런 금언들은 결국 제국의 공격적 민족주의에 이념적 도구가 됐다. 공격적 민족주의는 하이델베르크대학의 역사학자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에 의해 완성됐다. 그는 독일 정신을 진정으로 구현하는 국가를 상정했다. 이런 국가는 세속에 존재하는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개인의 행동이나 도덕률을 뛰어넘는 자결적인 국가였다. 독일 정신을 진정으로 구현하는 국가 건설에는 정화가 필요했다. 정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주변 민족들에 대한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해야 했다.

우생학 주장… 유대인 유전적 질병에 시달려

둘째, ‘아리안주의’라는 유사과학이 그 정당성을 제공했다. 1833년, 독일 언어학자 프란츠 보프는 로망스, 게르만, 슬라브어가 인도유럽어족이라는 ‘아리안’어족에 공통으로 속한다고 분석했다. 과학은 그 지점에서 끝나고 유사과학이 시작됐다. 곧 언어학자들은 같은 어족에 속하면 같은 인종적 기원을 갖는다고 추정했다. 아우구스트 포트, 테오도어 푀셰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주했다는 금발과 푸른 눈의 가공의 민족을 만들어냈다.

1855년 프랑스 외교관 아르튀르 드 고비노 백작은 <인종 불균등론>으로 근대의 유사과학인 인종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시했다. 그는 인류학, 언어학, 역사를 동원해 인종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정교하고 풍부한 지적 구축물을 세웠다. 그 역시 언어적 증거를 인용해, 아리안족의 인종적 우월성 개념을 만들었다. 그에 기반한 아리안주의는 사랑, 자유, 명예, 영성이라는 덕목을 육화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아리안족이 타락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위기의 근원은 다른 열등한 인종과의 교잡이었다.

아리안주의는 강하고 우월한 독일을 열망하는 독일 민족주의에 적극 흡수됐다. 전형적인 아리안족은 게르만족으로 등치 됐고, 아리안족의 덕목은 독일 민족의 덕목과 동일시돼갔다. 아리안족의 순수성 회복이 아리안주의 구현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셋째, 아리안족의 순수성 회복에는 우생학이라는 새로운 유사과학이 뒷받침됐다.

당시 나온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해, 우수한 종자만으로 번식을 수행하면 종을 개량할 수 있다는 선발 번식 개념이 유행했다. 다윈의 처조카인 영국의 프랜시스 골턴은 1869년 <유전적 천재>라는 책에서 인간의 자질은 유전되며,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자녀들의 시민적 자질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좋은 혈통’을 가진 개인들의 번식을 장려하고 ‘부적합’한 이들의 결합을 억제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골턴의 제자인 칼 피어슨은 우생학에 바탕을 둔 본격적인 인종주의를 개척했다. 그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지중해 지역의 민족을 포함한 열등한 혈통을 분류했다. 동유럽의 유대인도 포함됐다.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 이민자에 초점을 맞춰, 유대인의 잠재적 병리 증세를 드러내는 신체적 특성에 주목했다. 그는 나중에 나치 숭배자가 됐다.

우생학은 영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동력을 찾았다. 독일 우생학 운동의 창립자 알프레트 플뢰츠는 장신과 금발의 게르만족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문화를 보유한 인종이어서 ‘열등한 종’과의 교잡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등한 종 가운데, 독일 우생학자들이 게르만족 혈통에 대한 명확하고 유일한 위협으로 지목한 것이 유대인이었다. 유대인이 게르만족 사이에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우생학자 카를 슈트라츠는 “유럽 유대인은 주변의 다른 민족들보다 장애인 비율이 가장 높다”며 유대인이 안짱다리, 평발, 곱사등, 새가슴,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쇠약 등 다양한 유전적 질병에 시달린다고 주장했다. 독일 우생학은 유대인의 이런 생리적 특성을 그들의 사회적 행태와 연관시켰다.

반유대주의, 종교 넘어 인종 문제로

유대인은 육체적 노동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아서 병역 등 시민의 의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에 종사하는 것도 이런 인종적 열등함에서 비롯된다는 논리가 나왔다. 또 유대인 상류층에서 빈번한 근친결혼을 들며, 유대인의 근친교배와 성적 타락이 유대인의 열등함을 가속한다고 선전했다. 이런 주장의 결론은 게르만족 혈통이 유대인과의 성적 접촉으로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20세기 접어들면서 유대인의 종교적 신념 문제가 인종적 유전 문제로 바뀌게 된다. 그렇게 근대의 반유대주의가 완성됐다. 19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 전개가 부르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반유대주의와 결합하면서 유대인 박해로 귀결됐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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