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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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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의 기원, 개종한 유대교도

지중해 유대교 폭발적 증가는 현지인이 개종했기 때문
등록 2021-01-25 13:26 수정 2021-01-27 01:36
이스라엘군이 1월15일 이스라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의 헤브론 인근 마사페르 야타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반대 시위를 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끌어당기고 있다. 로이터/무사 카와스마

이스라엘군이 1월15일 이스라엘 점령지인 요르단강 서안의 헤브론 인근 마사페르 야타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반대 시위를 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끌어당기고 있다. 로이터/무사 카와스마

유대인 디아스포라(대이산)의 기원은 무엇인가. 그 기원이라는 로마에 의한 유대 땅에서 주민 대추방은 없었고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살폈다.

서기 70년 로마에 대한 봉기에 앞서 이미 지중해 연안에 많은 유대교 공동체가 퍼져 있었다는 데 역사학계에서는 이견이 없다. 유대교 공동체는 팔레스타인을 떠난 이스라엘 선주민에게서 발원한 것이 아니다. 기원 전후 지중해 지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유대교 선교의 결과로 개종한 현지인이 주축이었다. 유대교로 개종한 현지인이 그 이후 유럽의 기독교 세계에서 소수 종교집단으로 남으면서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됐다.

기원 전후 지중해 세계의 유대교 공동체는 유대교가 발원한 팔레스타인이 아시리아 이후 제국들의 영역으로 편입한 결과이다. 그 제국의 영역이 유대교 공간으로 확장됐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성립된 바빌론 공동체는 전세계 유대교 공동체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유대 지역 인구 70만 명, 이방에 사는 유대교도 약 수백만 명

빅뱅은 알렉산드로스의 그리스 제국의 헬레니즘 세계 개막이었다. 다양성, 개방성, 포용성의 헬레니즘 세계에서 교역과 사상의 물결이 제국 전체에서 넘쳐났다. 유대 주민도 헬레니즘 세계의 각지로 진출했을 뿐 아니라 그 환경에서 유대교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했다. 헬레니즘 세계가 성립된 지 200년이 되는 기원전 1세기 초가 되면,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로 유데우스는 이집트의 유대교도가 100만 명이 된다고 말한다. 이집트 서쪽 키레나이카(현재 리비아의 동부 지역), 소아시아에도 상당한 유대교 신자가 있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가 바빌로니아에서 유대교 용병의 2천여 가족을 데려와 리디아(현재 터키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와 프리기아(아나톨리아 중서부 지역)에 정착시켰다고 요세푸스는 적고 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지중해 전역에서 패권을 잡기 시작한 로마와 함께 유대교의 진출도 확장됐다. 서기 59년 로마의 유명한 웅변가 키케로는 “대중 집회에서 그 집단이 얼마나 수가 많고, 그들의 의견 일치가 얼마나 크고, 그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 알지 않냐”고 유대교도가 몰려다니는 것을 불평했다. 요세푸스도 그리스의 역사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스트라본의 말을 전한다. “유대인은 이미 모든 도시로 들어가 있어, 이 종족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에 의해 소유되지 않는 장소를 땅 위에서 발견하기 힘들다.” 유대교 공동체는 주로 대도시에서 번성했으나, 소읍과 마을에도 퍼져나갔다.

‘20세기 미국의 최고 유대사학자’라는 샐로 배런(1895~1989년) 컬럼비아대 교수는 1세기 때 로마제국에 800만 명의 유대인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당시 로마 인구의 10% 정도다. 영어권에서 가장 대중적인 유대사 책의 하나인 <유대인, 하느님, 그리고 역사>의 저자 맥스 디먼트(1912~1992년)는 “기원후 1세기 로마제국 인구의 10% 이상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오늘날 많지 않다”며 “7천만 인구 중 약 700만이 유대교도였다”고 전한다.

유대교도가 대도시에 몰려 있어서, 당시 식자층 사이에는 그 존재 자체가 크게 보였고 당시 기록이 이런 평가를 자아낸 것으로 보인다. 독일 베를린에서 인구통계 업무를 담당했던 시오니즘 지도자 아르투르 루핀, 자유주의 신학자이자 초기 교회사 석학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는 그 절반인 약 400만 명 정도로 추산했다. 하르나크는 1902년 <기독교의 확장>(Ausbreitung des Christentums, Leipzig)에서 서기 60년 네로 황제 때 레바논을 포함한 시리아와 유프라테스 동쪽 지역에서 100만 명, 유대에서 70만 명, 그리고 로마의 다른 지역에서 150만 명 등 420만 명 정도로 유대교도 인구를 추정했다.

확실한 것은 기원전 150년부터 서기 70년까지 지중해 세계에서 유대교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그 공동체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 지역 인구가 70만 명 정도였는데, 그 5배 정도의 유대교도가 이방에서 거주한 셈이다.

이라크 아디아베네 왕국의 왕비와 왕자도 개종

이방에서 유대교도의 폭발적 신장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북이스라엘 정복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선주민의 강제적 이산 결과라고 주류 유대사가는 주장한다. 요세푸스 이후 유대사를 유대인 관점에서 처음 기술한 현대 유대사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하인리히 그레츠(1817~1891년)는 유대인 이산이 외부의 강제적 요인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 전개와 결과는 그리스나 페니키아의 해외 진출과 비슷한 거라고 지적했다.

고대에 인구는 사실상 정체 상태였다. 고고학적 분석이나 당시의 생산력을 고려하면, 유대 지역의 적정 인구는 50만 명 안팎이고 유대의 대로마 봉기 전후 인구는 70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방으로 나간 이스라엘 선주민이 아무리 많고, 인구 성장률이 아무리 높다 해도, 300만 명 이상으로 인구가 불어날 수는 없다.

그리스나 페니키아가 지중해 전역에 진출해 식민지를 개척한 것은 뱃사람과 상인이던 그들의 생활 양식이었다. 반면 이스라엘 선주민 다수는 농민이었다. 농민이 땅을 떠나기는 힘들다. 이방의 유대교도 대부분이 대도시에 살고 상업에 종사했다. 배를 이용하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이도 많았다. 농업에 종사하는 공동체는 찾을 수 없었다. 그리스와 페니키아가 건설한 식민지와 공동체에서는 여전히 모국어를 썼다. 반면 기원 전후 지중해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는 유대 지역에서 사용하는 히브리, 혹은 아람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현지 언어가 통용됐다.

성서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인 그리스어로 번역된 <70인역 성경>도 근동의 유대교도가 그리스어를 사용했기에 탄생했다. 이들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공용어인 그리스어를 타고날 때부터 썼던 현지 토착 주민이 아니었을까? 기원 전후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유대교도의 폭발적 증가는 개종을 빼놓고는 설명이 안 된다. 이교를 믿던 현지 주민이 개종해서 유대교도가 된 것이다.

기원전 2세기에 성립된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왕국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스모니아 왕조 자체가 이교의 다신교 문화에 저항하는 유대교 사제가 주도한 봉기로 성립됐다. 하스모니아 왕조는 최초의 신정일치 유일신교 왕국이었다. 하스모니아 왕조에서 유대교 전도는 공식 정책이 됐다. 사마리아, 갈릴리, 에돔, 이두메 등 유대 인근 지역을 정복해 영역을 넓히고 그 주민을 유대교도로 강제 개종시켰다.

헬레니즘 문화의 다양성, 개방성, 포용성은 부족적 신앙인 야훼 신앙의 잔재가 남아 있는 유대교를 보편주의적 가치로 무장하는 보편적 종교로 가는 길을 열었다. 자유분방하고 구속력이 없고 현세의 쾌락을 추구하는 헬레니즘 문화에서 안식일, 상과 벌의 개념, 사후에 대한 믿음, 부활이라는 초월적인 희망은 많은 사람을 끌어당겼다. 제국의 확장 속에 옅어지던 공동체 정서를 대중은 유대교에서 찾았다.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에 있던 아디아베네 왕국의 왕비 헬레나와 왕자 이자테스가 유대교로 개종했다. 여성들에게 급속히 확산됐다. 로마에서는 귀족 여성도 신자가 됐다. 현재의 영국인 브리튼섬을 정복한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의 아내 폼포니아 그레키나는 유대교도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이혼당하고 재판까지 받았다. 네로 황제의 둘째 부인 포파에아 사비나가 유대교도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도시 하류층, 병사와 해방된 노예 사이에서도 유대교는 자리잡았다. 유대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이 병합한 다른 유럽 지역, 즉 슬라브, 게르만, 남부 프랑스, 스페인으로 퍼져나갔다. 유대인이 유럽에서 자리잡는 원형을 제공했다.

이해관계 맞아떨어진 기독교와 유대교

유대의 대로마 봉기는 지중해 세계의 거대한 유대화 물결을 종식하는 계기가 됐다. 이 전쟁으로 새로운 유일신교 운동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기독교였다.

1세기 중반부터 2세기 초반까지 세 차례 벌어진 로마-유대 전쟁인 유대인의 대로마항쟁이 끝나면서, 유일신교 운동은 랍비 유대교와 바울 기독교로 나뉘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은 기독교로 급속히 넘어갔다.

기독교가 정체성을 갖추기 시작한 2세기가 되면, 기존 유대 신앙의 바리새파에서 랍비 유대교가 진화해 나왔다. 유대 신앙 내에서 바리새파가 다수이고 주류이기도 했지만, 대로마 항쟁의 결과는 바리새파의 율법 중심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사라져 성전 제례의식이 별 의미가 없어진 상황에서 율법은 유대 신앙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근거였다.

유대교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이방 각지의 유대인 공동체에 세워진 시너고그(유대교 회당)에서 율법학자인 랍비가 주도하는 랍비 유대교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랍비 유대교는 밖으로의 포교보다는 안에서 기존 신자를 챙기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랍비 유대교는 토라의 율법을 해석하는 미슈나와 탈무드를 만들어 유대교도의 삶을 규율해갔다.

반면 바울의 기독교는 기존 유대교의 할례나 음식율법 등을 모두 벗어던졌다. 바울 기독교는 율법을 벗어던지고 믿음을 강조하는 공격적인 포교에 나섰다. 그렇게 유일신교 운동의 패권은 기독교로 넘어갔다. 지중해 전역에서 유대교도 수는 3세기부터 서서히 줄었다. 주로 기독교로의 개종 때문이었다. 4세기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되자, 이는 유대교의 확장 동력을 멈춰세웠다.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콘스탄틴 황제는 유대인으로 태어나지 않은 남자의 할례를 금지하는 등 유대교에 족쇄를 채웠다. 기독교가 제패한 로마에서 유대교는 점점 유해하고 경멸스러운 사교 취급을 받았다. 기독교교회는 유대교도를 박멸하려 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추종자가 사라진 낡고 비천한 존재로 보존하기를 원했다. 유대교도를 기독교 승리의 증거로 남겨두려는 의도였다.

이미 기독교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랍비 유대교로서도 유대교 공동체 보전이라는 과제가 더 절박해졌다. 유대교 개종자를 확보하는 자체가 기존 교도에게 위험을 부를 사안이었다. 그보다는 유대교에 많은 이방인 개종자가 생기면 앞으로 유대인으로 생존하려는 의지가 약해질 것을 두려워했다. 선교와 개종을 포기하는 율법이 만들어졌다.

추방된 후손이라는 신화가 ‘역사적 사실’로

더 나아가 기존 개종 흔적을 지우려 했다. 모든 유대교도는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돼 유배된 이스라엘 선주민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모든 유대교 공동체 성원이 타고난 유대인이라는 의식을 불어넣어야만, 기독교의 공세와 탄압 앞에서 유대교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 있는 그 ‘약속의 땅’은 모든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을 떠나온 이들의 후손임을 말하는 기제이다. 다만 팔레스타인은 영적 고향으로만 남아야 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을 찾아서 유대인 국가를 세운다는 계획을 포기하는 율법도 만들었다.

20세기 이후 정치적 시오니즘은 모든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이들의 후손이라는 신화를 ‘사실’로 만들려 했다. 영적 고향으로 남아 있던 팔레스타인을 이제는 현실적으로 돌아가야 할 국가 건설지로 바꾸려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된 이들의 후손이라는 종교적 담론을 ‘역사적 사실’로 탈바꿈한 것이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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