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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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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가벼운 열과 몸살이 나를 지나가다

방글라데시, 5월17일 에스더가 기침하고 열이 나던 날
등록 2020-12-19 16:09 수정 2020-12-20 00:14
지난 11월19일(현지시각)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인력거의 일종인 교통수단 릭쇼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11월19일(현지시각)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인력거의 일종인 교통수단 릭쇼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작은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쥐고 흔든 2020년이 지나간다. 코로나19로 누구는 생명을 잃고 누구는 직장을 잃었다. ‘비대면’이 시대정신이 돼버린 세상을 거리두기, 모임 금지, 폐쇄와 봉쇄 같은 흉흉한 언어가 지배한다. 끝은커녕 진정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이 ‘전 지구적 유행’(팬데믹)이 사그라지더라도 우리는 코로나 이전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5월17일 월요일

코로나19로 세상이 다 긴장하는 상황에서 활동적인 에스더가 불안하던 차에 며칠 전부터 기침하고 열이 난다며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불안해서 어떻게 아프냐고 물어봐도 감기 같다며 자세히 말을 안 한다. 부모가 없는 에스더는 딸처럼 우리 가족과 함께 사는 현지인 고교 1년생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의대를 다니는 막내딸에게 전화해서 자세히 물어보라고 했다. 둘은 친자매처럼 가깝다. 막내로부터 에스더의 증상이 코로나19 같다는 답이 왔다. “아빠는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차마 아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나도 전날 저녁에 약간 몸살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열이 조금 났다.

사실 방글라데시에 살면서 한국에 없는 열병을 한두 번 걸려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 같으면 이 정도는 일상이다. 뎅기열 세 번에 가장 악명 높은 치쿤구니아 열병도 3년 전에 앓았다. 방글라데시에 와서 처음 뎅기열 병을 얻었을 땐 너무 아파서 ‘이렇게 풍토병에 걸려 죽는구나’ 싶었다. 오열과 함께 마치 바늘로 뼈 마디마디를 찌르는 듯했다. 벌써 30여 년 전 일이다. 당시는 이 병이 뎅기열인지도 몰랐다. 나보다 먼저 와서 열병을 경험해본 한국인이 그것을 신고식이라고 불렀다.

황당한 것은 아파도 약이 없다는 사실이다. 기껏해야 영양제인 수액을 맞는 것이 전부다. 아직도 뎅기열에는 약이 없다. 게다가 3년 전에 걸렸던 치쿤구니아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미각을 잃은 입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코를 틀어막고 목구멍으로 억지로 음식을 밀어넣듯이 먹었다. 침대에서 다섯 발짝도 안 되는 화장실을 걸어갈 수 없었다. 한 달 반 동안 침대 생활을 하고 회복하는 데 거의 2년 걸렸다.

그런데 이제 온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더 강력한 놈이 왔단다. 막내로부터 에스더의 증상이 코로나19 같다는 문자를 받고 이게 어쩌면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치쿤구니아 열병에 걸렸을 때도 그랬는데 이번에도 마침 아내는 한국에 다니러 갔다.

혼자 오만 가지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무엇부터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봐야겠다. 병원에 가면 죽고 집에 있으면 산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방글라데시는 의료 시설이 열악하다. 그래서 엄청 긴장했다. 다행히 일주일 정도 가벼운 열과 몸살기로 코로나 소동은 일단락됐다. 8월에 또 한 번 몸에 열이 났다. 방글라데시의 하루 코로나19 감염 확진자가 4천 명에 육박하고 매일 사망자 수가 발표될 때였다. 가슴이 덜컹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가볍게 2~3일 만에 회복됐다. 나중에 뉴스에서 알게 된 것인데 내가 사는 다카의 빈민 지역 누렐짤라는 감염률이 74%라고 했다. 나도 감염돼 가벼운 증상으로 넘어갔는지 모른다.

하여튼 오늘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다.

다카(방글라데시)=이석봉 방글라데시 한국민간문화원 원장

*이석봉 원장은 통권 제1315·1316호 표지이야기 ‘코로나 뉴노멀’에 방글라데시 현지 소식을 담은 글 ‘정부는 “줬다”, 국민은 “못 봤다”’를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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