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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부자의 공화당, 노동자의 민주당? 공식 깬 트럼프

민주당의 전통적 지지 기반이던 라틴계 미국 유권자는 왜 트럼프와 공화당으로 돌아섰나

제1338호
등록 : 2020-11-13 23:28 수정 : 2020-11-1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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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3일 미국 몬태나주 옐로스톤 국제공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 지지연설을 하는 가운데, 이 연설을 다양한 인종·연령·성별의 지지자들이 듣고 있다. REUTERS

지금 미국에선 두 개의 구호가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고 있다.

“모든 투표를 집계하라!”(Count every vote!) “합법적 투표를 집계하라!”(Count the ‘legal’ votes!)

얼핏 비슷해 보이는 두 주장 사이에 맞닿을 수 없는 간극이 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2020년 미국 대선의 법적 정당성과 정치적 신뢰가 달라질 수 있다. 전자는 선거일 이후 일정 기간 안에 도착한 우편투표의 효력을 인정한다는 일부 주의 대법원 결정을 지지하는 민주당 쪽 주장이다. 후자는 선거일 이후 도착분은 개표해선 안 되고 유효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공화당 쪽 주장이다. 11월3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가 맞붙은 대선은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선거 중 하나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재선을 노리는 현직 대통령과 상원의원(36년)·부통령(8년) 경력의 정치인이 미국 대선 사상 처음으로 둘 다 7천만 표 넘는 유권자의 지지를 받고 승패가 갈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선거를 치른 지 열흘이 되도록 개표가 완료되지 못한데다, 재선에 실패한 현직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트럼프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뒷배는 든든한 지지층이다. 트럼프는 비판자에겐 공감능력 부재, 독불장군, 천박한 속물 같은 부정적 이미지로 낙인찍혔지만, 지지자에겐 그야말로 사이다 같은 인물이다. 트럼프 시대 이후에도 그가 남긴 영향은 미국 정치와 사회 전반에 어른거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의 유령, ‘트럼피즘’이다.

본디 유령은 실체 없는 형상,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힘이다. 어둠 속을 떠돌며 육화할 몸을 찾는다. 적어도 트럼프 집권 시절 트럼피즘이란 유령은 거대한 몸집의 실체로 행세했다. 포스트 트럼프 시대를 맞은 미국은 유령을 몰아낼 수 있을까._편집자주
미국 민주당 지지자들의 가슴이 내려앉기 시작한 건 대통령선거가 치러진 11월3일(현지시각) 밤이었다. 2016년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민주당)이 도널드 트럼프(공화당)에게 빼앗겼던 경합주들을 2020년 조 바이든(민주당)이 대거 되찾아오리라는 큰 기대를 플로리다주가 개표 초반에 산산조각 낸 것이다.

미리 도착한 우편투표를 선거 당일에야 개표할 수 있었던 다른 경합주들과 달리, 우편투표 경험이 많은 플로리다는 도착하는 대로 개표하도록 허용한 주였기에 현장투표가 종료되는 즉시 그동안 계수 중이던 표를 발표했다. 많은 여론조사에서 바이든 후보가 압승할 확률이 30% 정도 된다고 예측한 전문가들은, 정말 바이든이 압승한다면 그 신호탄은 플로리다가 쏘아올릴 것으로 전망했다.

진보세력 싫어하는 라틴계 유권자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은 기대와 크게 달랐다. 2016년 플로리다에서 48.6%의 표를 얻어 힐러리를 1.2%포인트 차로 눌렀던 트럼프는 (이 글을 쓰는 11월12일 현재) 51.2%를 득표하면서 바이든과의 차이를 3.4%포인트로 오히려 더 크게 벌렸다. 단순한 득표수보다 더 충격적인 건 그 내용이다. 트럼프에게 플로리다를 선물한 유권자가 민주당 지지 기반이던 라틴계라는 사실이다.

라틴계 가운데 쿠바나 베네수엘라 출신 이민자가 공화당 후보를 지지하는 건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미국 내 베트남계가 그렇듯, 공산주의나 사회주의가 싫어 미국에 온 이민자는 뚜렷하게 공화당을 지지한다. 하지만 2020년 선거에서 라틴계의 트럼프 지지가 두 국가 출신에 국한된 것도, 플로리다에 국한된 것도 아니다.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전국에서 많은 라틴계 유권자가 공화당 지지로 돌아섰다.

물론 라틴계 유권자라고 해도 흑인 유권자처럼 90%에 가깝게 민주당을 지지했던 건 아니다. 대략 30%는 공화당을 지지한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그 비율이 40~45%까지 치솟자, 라틴계를 주요 지지층으로 생각했던 민주당은 당황했다.

어떤 면에서 이번 선거는 2016년의 반복이다. 4년 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은 위스콘신·미시간·펜실베이니아주처럼 ‘푸른 장벽’(Blue Wall·민주당의 보루)이라고 생각했던 지역들에서 트럼프에게 패해 충격받은 뒤, 민주당이 백인 노동자계층의 지지를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했다(힐러리 클린턴은 위스콘신주를 아예 방문하지도 않았다)는 반성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라틴계 지지를 당연하게 생각했던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하원에서 라틴계를 대표하는 스타 의원이자, 지난 민주당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던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는 이번 선거에서 라틴계 지지가 부족했던 것을 두고 민주당이 라틴계 표를 얻기 위한 “진지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성공한 비즈니스맨’과 ‘마초적 남성’이란 투사
바이든이 민주당 후보를 수락했던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바이든과 경쟁했던 대부분의 경선 주자가 전국 무대에서 지지연설을 하도록 초대받았지만, 유일한 라틴계인 훌리안 카스트로만은 초대받지 못했다. 카스트로의 경우 토론회 때 바이든의 정신상태를 조롱하는 듯한 인신공격을 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AOC 같은 인기 있는 의원이 1분30초라는 짧은 연설 시간을 배정받은 것을 두고 라틴계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사실은, 트럼프가 라틴계 불법 이민자를 “깡패, 성폭행범들”이라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하는데도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지난 4년 동안 더 늘었다는 것이다. 네이트 콘 <뉴욕타임스> 기자는 이 현상을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2016년 선거 때는 이민 문제가 주요 이슈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는 것. 4년 전엔 트럼프가 라틴계를 많이 공격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적게 나왔고, 이번엔 코로나19로 이민 문제가 트럼프 입에서 적게 나오자 라틴계 지지율이 ‘회복’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라틴계 유권자가 원래 트럼프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왜일까? 먼저 라틴계 미국인 사회는 단일하지 않다. 일찍 미국으로 이주, 정착해서 미국 사회에 동화된 사람부터 갓 이민 와서 영어를 쓰지 못하는 사람까지 다양하다. 상당수 라틴계가 백인을 준거집단으로 한다는 점에서 흑인 유권자와는 성격이 크게 다르고, 이들에게는 친기업적 트럼프의 경제정책이 훨씬 더 매력적이다.

특히 남성들은 블루칼라(육체 노동자)여도 아메리칸드림을 가졌고, 트럼프가 투사하는 ‘성공한 비즈니스맨’ ‘마초적 남성’이라는 이미지(트럼프는 선거 유세 때 빌리지피플의 노래 <마초맨>으로 분위기를 돋운다)를 좋아한다. 이들에게 분배를 강조하는 민주당의 경제정책은 별 매력이 없고, 여성의 권리를 비롯한 ‘사회적 진보’ 메시지 역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라틴계 유권자가 아직 대다수는 아니지만 늘고 있고, 트럼프 선거운동본부는 이들을 겨냥해 진보세력을 공격하는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확산했다.

2020년 11월7일 미국 네바다주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이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 당선 소식을 듣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으로 여겼던 라틴계의 상당수가 이번 대선에선 공화당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 연합뉴스

부유한 교외지역 유권자의 관심은 바이든으로
그렇다고 트럼프가 바이든보다 더 영리한 선거운동을 펼쳤다고 보기는 힘들다. 트럼프의 선거운동을 이끌던 브래드 파스케일은 선거예산을 함부로 쓴다는 이유로 파면당했는데, 트럼프 쪽은 선거 결과가 나온 뒤에야 그가 플로리다 승리의 일등공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기대치 않은 승리였던 셈이다. 반면 트럼프가 선거운동 내내 공들인 부유한 교외지역 유권자는 이번에 트럼프에게 등을 돌리고 결국 패배를 안긴 대표 유권자 집단이 됐다.

트럼프의 교외지역 선거전략은 1968년 리처드 닉슨의 것과 판박이였다. 트럼프는 지난여름 일어난 BLM(Black Lives Matter·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시위가 폭력성을 보이는 순간 법과 질서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선거운동 당시 닉슨 후보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당한 뒤)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와 폭동에 강력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법과 질서”(Law and Order)를 강조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더 나아가 민주당이 집권하면 (흑인이 많이 입주하는) 정부 지원의 공공주택이 부유한 교외지역에 침투한다며 중상류층의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공략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던 부유한 교외지역들이 대거 바이든 지지로 돌아섰음을 알게 됐다. 이들은 트럼프 경제의 수혜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인격적·도덕적 결함과 충동적이고 미숙한 국가 운영에 분노했다. 게다가 21세기 중산층 유권자는 과거와 달리 인종, 여성 권리 등 사회 이슈에 대해서도 진보적 견해를 갖고 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의 사회적 불안감 조성과 보수 판사 임명 같은 전통적 보수층 구애 전략이 경제적 여유가 있는 유권자에게 먹히지 않았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실리콘밸리의 노동자들이 모여 사는 북부 캘리포니아는 민주당의 아성이다. 이들이 민주당 후보들에게 기부한 돈, 그리고 마이클 블룸버그 같은 진보적 갑부들이 기부한 정치자금은 위스콘신·미시간·플로리다 같은 경합주에 사는 유권자의 마음을 돌리는 데 쓰이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특히 블룸버그는 사재 1억달러를 들여 바이든의 정치광고를 플로리다에 퍼부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4년 전보다 더 떨어졌다. 2016년에 이어 이번에도 미국에서 ‘돈선거’를 한 것은 공화당이 아닌 민주당이었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다른 주에 사는 부자들이 돈의 힘으로 우리 표를 가져가려 한다”고 분노했다.

제2의 트럼프 키워낼 ‘극심한 양극화’
이런 낯선 구도에 일부에선 양당의 지지 기반이 구조적으로 재편되는 ‘재정렬’(Realignment) 현상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1960년대에 마지막으로 등장했던 미국 정치의 재정렬은 우리에게 익숙한 ‘부자들의 공화당, 노동자들의 민주당’이란 공식을 만들어냈는데, 트럼프 등장 이후 그 공식은 유효하지 않게 됐다. 물론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다. 역사적인 돌연변이처럼 보이는 트럼프라는 변수가 없었어도 이런 변화가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다. 앞으로도 이 구도가 반복될지는 지켜봐야 알 수 있다.

트럼프가 사라져도 그를 탄생시킨 전제조건은 남는다. 소셜미디어와 가짜뉴스, 이들을 활용한 포퓰리즘, 무엇보다 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자가 단결할 수 있었던 전통산업의 몰락과 거대 테크기업을 중심으로 재편된 산업구조가 낳은 극심한 양극화는 제2, 제3의 트럼프를 키워내는 비옥한 토양이다.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국가가 이미 비슷한 환경을 가졌고,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다. 미국은 그저 이 모든 요소가 모여 ‘퍼펙트 스톰’(둘 이상의 악재가 동시에 일어나 그 영향력이 더욱 커지는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선망국(先亡國)이었는지 모른다.

뉴저지(미국)=박상현 사단법인 코드 이사

*표지이야기-미 바이든 대통령 시대로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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