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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만들어낸 ‘의료 블랙홀’

코로나19 치료에 의료자원 쏠리면서 심장병·암·결핵 등에 세계 국가 의료 공백
등록 2020-05-23 05:02 수정 2020-05-23 08:02
5월18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대형병원 집중치료실에서 코로나19 중증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5월18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한 대형병원 집중치료실에서 코로나19 중증환자들이 치료받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4월28일 밤, 인도 콜카타의 전직 언론인 수미트 무케르지(63)는 갑자기 호흡곤란과 가슴통증을 호소했다. 허혈성 심장질환 증상이었다. 급히 집으로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초음파 심장 촬영을 해봐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인도는 코로나19 확산을 막으려 전 국민 이동금지령을 내린 상태였다. 인구 1475만 명의 대도시 콜카타에서도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대다수 병원은 호흡곤란이나 발열 환자를 수용할 여력이 없었다. 지인들이 무케르지를 대형 개인병원 응급실에 가까스로 입원시켰다. 심장 초음파 촬영과 별개로, 코로나19 진단 검사를 위해 면봉으로 검체(호흡기 분비물)도 채취했다.

‘코로나 음성’ 결과 전 치료 못 받고 죽은 인도인

무케르지의 심장 초음파 검사 결과가 나왔지만 추가 정밀검사가 필요했다. 응급수술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병원 당국은 코로나19 진단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어떤 처치도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24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무케르지는 상태가 급속히 나빠져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만 하루를 조금 넘긴 4월30일 새벽, 그는 끝내 숨지고 말았다. 조금 뒤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음성이었다. 5월17일 인도의 영문 일간 <텔레그래프 인디아>가 전한 무케르지의 죽음은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가져온 비극의 한 사례일 뿐이다. 무케르지의 한 친척은 “코로나19 사태가 아니었다면 그가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코로나19가 상당수 나라의 의료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군사용어 ‘콜래터럴 대미지’(Collateral Damage·전투 과정에서 생기는 민간인 피해)를 패러디해 ‘코로나래터럴 대미지’라는 신조어까지 나올 지경이다. 의료자원 대부분이 코로나19 대응에 쏠리면서 심장병, 신장 질환, 암, 결핵 등 다른 치명적인 질병 환자들의 치료에 큰 구멍이 뚫렸다. 코로나19 전파 경로는 ‘비말 감염’이다. 보균자가 기침이나 재채기, 말할 때 튀는 침 등 분비물이 주변 사람의 호흡기로 들어가 감염된다. 인구가 밀집한 도시나 좁은 밀폐 공간이 위험한 이유다.

폭증하는 환자 탓에 크게 부족해진 병상과 인공호흡기, 혈액, 의료진은 코로나19 대응에 최우선순위로 투입된다. 외래환자 진료실과 수술실은 코로나19 환자만을 위한 중환자실로 바뀌었다. 상당수 개인병원이나 요양원은 병상이 있어도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다른 질병 환자들의 입원을 거부하기 일쑤다. 환자와 그 가족 역시 코로나19 감염을 우려해 병원 방문을 꺼리는 일이 많다. 그래서 제때 진단과 치료를 받으면 충분히 완치 가능한 환자들이 ‘골든타임’을 놓치면서 병세를 키우거나 숨지는 사태가 속출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 코로나19 최대 피해 지역인 대구·경북에선 환자 발생 초기 민간병원들이 병상을 내주지 않는 바람에 환자 2300여 명의 발이 묶였고, 대구의료원과 대구보훈병원 등 공공병원은 입원환자를 비우면서까지 코로나19 전담병원으로 전환했다.

영국에선 암 의심 환자들이 정밀진단 못 받아

코로나19는 호흡기 질환이다. 주요한 증상이 호흡곤란이다. 그러나 심장질환, 빈혈, 신경증 같은 질병에서도 호흡곤란 증세는 나타난다. 앞서 무케르지의 사례처럼, 코로나19 환자가 아닌데도 ‘오인’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의료진 보호장구가 부족한 것도 호흡곤란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의 불운에 한몫한다.

독일 시사주간 <슈피겔>도 최근 “신종 감염병이 의료자원을 빨아들이다시피 하면서 치명적인 다른 질병들에 대한 관심이 분산되고, 이는 재앙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짚었다. 전문가들은 향후 몇 개월 혹은 몇 년 새 코로나19가 아닌 다른 질병들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고 경고 한다.

영국 의료자선재단 ‘캔서 리서치’는 코로나19 사태로 매주 암 의심 환자 2300여 명이 정밀진단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추산한다. 매주 20만 명의 여성에 대한 유방암과 자궁암 예방 검진도 중단됐다. 조기 발견으로 치료가 가능한 암이 뜻밖에 의료보건의 위험 요소가 된 것이다. 다른 질병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영국 심장재단에 따르면, 3월 한 달에만 심장질환이 의심돼 병원에서 응급진료를 받은 환자 수가 평소 50% 이하로 급감했다. 이런 상황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당장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의사들은 유럽 대부분 지역에서 조만간 사망자가 늘거나 심각한 2차 질병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 한다.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나라들은 사정이 더욱 위태롭다. 결핵,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홍역, 말라리아 등 전염성 높은 감염병은 부자보다 빈자, 건강한 이보다 노약자에게 더 혹독하다. 이 질병들은 현대 의학기술로 통제와 치료가 가능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지는 않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은 질병의 위협에 쉽게 노출되거나 충분한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없는 이들에게만 진실이다. 결핵이 대표적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지금도 전세계에서 매년 1천만 명이 결핵에 걸리고 150만 명이 목숨을 잃는다. 모든 감염병 중 가장 치명적이다.

의료 인프라 취약한 나라에 더 치명적

유엔 프로젝트 기구인 ‘결핵 퇴치 파트너십’은 최근 연구보고서에서, 코로나19 팬데믹이 생긴 올해부터 2025년까지 5년 동안 전세계에서 결핵 환자 630만 명이 추가로 생기고, 그중 140만 명이 숨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이동금지(록다운) 기간이 3개월 지속되고 일상생활 회복까지 이행기가 10개월 걸린다고 가정했을 때의 예측 모델이다. 애초 이 기구는 2030년을 ‘결핵 박멸’ 목표 연도로 설정하고 결핵 퇴치에 힘을 쏟아왔지만, 코로나19 사태가 이 계획을 5년 이상 늦출 것으로 판단한다. 상당수 나라에서 거의 모든 의료자원이 코로나19 대응에 집중된데다, 보건위기 사태가 언제 끝날지도 아직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코로나19처럼 수시로 변종이 출몰하는 바이러스와 달리, 결핵 병원균은 박테리아다. 진단만 제때 충분히 한다면, 적절한 항생제만으로 충분히 완치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비말 감염이 아닌 ‘공기 감염’인 까닭에 전파력은 훨씬 강하다. 최근 결핵 퇴치 파트너십은 성명을 내어 “지난 몇 년간 ‘결핵 퇴치’에 쏟아부은 노력과 투자의 성과를 회복하려면 비진단 환자의 누적을 줄이기 위한 보완책과 재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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