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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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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고에 불붙인 미국

미 대사관 예루살렘으로 옮긴 날 이스라엘, 가자지구 공습 유혈 사태…

국제사회 분노에도 이스라엘 두둔하는 미
등록 2018-05-22 14:39 수정 2020-05-03 04:28
지난 5월15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 뒤늦게 도착한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미국 대사(윗줄 뒷모습)가 자신의 발언을 마친 뒤 팔레스타인 대표부 쪽의 발언이 시작되기에 앞서 회의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5월15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에 뒤늦게 도착한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미국 대사(윗줄 뒷모습)가 자신의 발언을 마친 뒤 팔레스타인 대표부 쪽의 발언이 시작되기에 앞서 회의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우리 연합국 국민들은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게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기본적 인권, 인간의 존엄 및 가치, 남녀 및 대소 각국의 평등권에 대한 신념을 재확인하며….”

1945년 6월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스시코에서 합의하고, 같은 해 10월24일부터 발효된 국제연합(UN) 헌장 전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계대전’이란 살풍경을 두 차례나 경험한 인류의 절절한 반성이 담겨 있다. 헌장 제24조는 국제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책임을 5개 상임이사국과 10개 비상임이사국으로 구성된 안전보장이사회에 맡겼다. 안보리의 결정이 국제법적 구속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욱한 인류의 반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헌장에 서명한 지 불과 5년 만에 첫 전쟁이 불을 뿜는다.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터지자, 안보리는 결의 제82~85호를 채택했다. 한반도 냉전체제를 70년 가까이 지탱해온 유엔사령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유엔 창설 이후 첫 전쟁은 한반도에서 터졌지만, 그보다 앞서 무력 분쟁이 벌어진 지역은 따로 있다. 1948년 3월5일 결의 제42호를 시작으로 같은 해 12월29일 채택된 결의 제66호에 이르기까지 안보리는 팔레스타인 관련 결의를 모두 15개 채택했다. 그해 채택된 결의가 모두 28개인 점에 비춰, 안보리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한반도 냉전체제가 여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 문제도 이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관련 안보리 결의 28개
지난 5월14일 이스라엘군이 쏜 최루탄 가스를 들이 마신 뒤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이튿날 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둔 생후 8개월 난 아기의 가족과 친지들이 가자지구의 병원에서 오열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5월14일 이스라엘군이 쏜 최루탄 가스를 들이 마신 뒤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다 이튿날 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둔 생후 8개월 난 아기의 가족과 친지들이 가자지구의 병원에서 오열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그해 팔레스타인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이 지난 5월14일 건국 70주년을 맞았다. ‘나크바’(아랍어로 ‘대재앙’이란 뜻)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직후에만 줄잡아 70만 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기 땅에서 쫓겨나, 70년째 난민으로 지구촌을 떠돌고 있다. 팔레스타인 땅의 봉쇄된 가자지구에서 유대인 최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3월30일)부터 나크바까지 6주 동안 흩어진 난민의 ‘위대한 귀환’을 내걸고 대규모 시위를 집중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회의 시작에 앞서 어제 가자지구에서 목숨을 잃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위해 잠시 추모의 묵념을 제안합니다. 아울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주민을 비롯해 너무나 긴 세월 동안 이어져온 분쟁으로 목숨을 잃은 모든 이들을 추모하고자 합니다.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1분간 묵념하겠습니다.”

지난 5월15일 미국 뉴욕 유엔 본부 안보리 회의실에서 사회를 맡은 유엔 주재 폴란드 대표부 요안나 브로네츠카 대사가 이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장을 가득 메운 15개 이사국 대표단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았다.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감쌌다. 같은 날 스위스 제네바의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은 루퍼트 콜빌 대변인 명의로 긴급 보도자료를 내놨다.

“어제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참혹하고 잔혹한 폭력 사태를 강력 규탄한다. 이스라엘군의 실탄사격으로 시위에 나선 팔레스타인 주민 58명이 숨지고, 1360명이 다쳤다. 부상자 가운데 155명은 위중한 상태다. 사망자 가운데는 어린이 6명과 응급의료진 1명도 포함돼 있다. 현장을 취재하던 언론인 10명도 총상을 입었다. … 다시 한 번 지난 3월30일 이후 벌어진 모든 사망·부상 사건에 대한 독립적이고 투명한 진상조사를 촉구한다. 지난 3월30일 이후 어린이 14명을 포함해 시위에 나선 팔레스타인 주민 112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이 다쳤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깊이 우려한다.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해줄 것을 촉구한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이스라엘 현지 인권단체 ‘점령 지역의 인권을 위한 이스라엘 정보센터’(이하 베첼렘)가 추적한 ‘위대한 귀환’ 시위는 출발부터 핏빛이다. 가자지구 전역에서 지난 3월30일 시작된 이번 시위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다. 10여 년을 이어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를 풀고, 난민으로 떠도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귀환을 허용하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시위대는 이스라엘과 가자지구를 분리하는 장벽까지 행진해 간 뒤, 그 장벽에 손을 대고 돌아오기로 했다. 시위대가 장벽에 다가서면 이스라엘군은 저격용 소총으로 실탄 조준 사격을 가했다. 베첼렘은 시위 첫날에만 12명이 숨지고, 750명이 다쳤다고 전했다. 6주간 이어진 유혈극의 시작이었다. 그날 시위에 참가했던 세 아이의 아버지 아달리 아와드(39)는 베첼렘 활동가에게 이렇게 증언했다.

농성장 텐트까지 날아든 총알

“사격은 오전 9시께 시작됐다. 이스라엘 저격병들이 시위대를 겨냥해 총을 쏘아댔다. 일부는 장벽으로부터 100m 남짓 떨어져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었다. 300m 이상 떨어진 농성장 텐트까지도 총알이 날아들었다. 일부 젊은이들은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병사들에게 날아가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나와 함께 농성장 텐트에서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들던 친구도 다리에 총상을 입고 후송됐다. 그날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내가 목격한 부상자만 100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 장벽으로부터 100~300m 떨어져 있었다.”

중무장한 군인이 민간인을 겨냥해 실탄을 발사하면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더구나 시위대는 무장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완강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시위대 가운데 일부가 사제폭탄을 지니고 있었고, 이를 폭파시켜 장벽을 넘으려 했다고 강조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현장에서 이뤄진, 정당한 자기방어란 얘기다. 심지어 미할 마얀 이스라엘 외교부 부대변인은 지난 5월14일 아일랜드 공영라디오(RTE)와 한 인터뷰에서 ‘고무탄을 사용해도 되는데 왜 시위대를 겨냥해 실탄사격을 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글쎄, 그 많은 사람을 다 감옥에 가둘 수는 없지 않느냐.”

참극 터진 날 대사관 옮긴 미국

시위로 인한 사상자가 늘면서 현지 인권단체 연대체가 지난 4월15일 ‘가자지구 시위대에 적용된 교전수칙’ 공개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한 바 있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군사기밀’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스라엘 군 당국은 이어 “최근 하마스(팔레스타인 저항단체)가 대규모 시위나 추모 행사 등으로 위장한 새로운 테러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겨냥한 하마스의 공세가 지속되면서, 양쪽 간 무장 대치도 이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전쟁 상태이므로, 국제법 적용 대상이 아니란 논리다. 비슷한 주장은 5월15일 안보리 회의장에서도 흘러나왔다.

“이 회의장에선 이중 잣대가 너무도 흔하게 등장한다. 오늘은 특히 심하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의 말이다.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실탄사격에 쓰러지던 5월14일 미국은 이스라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서 독립 팔레스타인이 수도로 삼기로 한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란 얘기다.

“우리 모두 중동 지역의 폭력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중동 일대에서 수많은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주만 해도 이란군이 (이스라엘이 점령한 시리아 땅) 골란고원 부근에서 이스라엘군 초소를 공격했다. 무모한 도발이며, 즉각 중단돼야 한다. 이란의 사주를 받은 무장세력은 예멘에서 미사일 공격을 퍼붓기도 했다.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같은 폭력 사태에 대해 안보리가 나서야 한다.”

헤일리 대사는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과 가자지구의 폭력 사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몇 년간 폭력 사태를 부추긴 것은 이란의 지원을 등에 업은 하마스 테러 조직이며, 이는 미국이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옮기기로 결정하기 훨씬 전의 일”이라는 거다. 그는 “하마스가 시위대에게 장벽에 더 가까이 다가가라고 지시했다”며 “이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려는 의도였으며, 하마스는 어제의 폭력 사태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헤일리 대사는 이어 “안보리 이사국 누구도 자기 국경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걸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스라엘만큼 자제심을 가지고 대응할 나라는 없다”고 주장했다.

미국 “비극은 하마스 탓”

미국과 이스라엘이 ‘테러의 배후’라 주장하는 하마스는 지난 2006년 1월25일 치른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선거에서 44%의 득표율로 제1당에 오른 이슬람주의 정치세력이다. 하마스가 집권에 성공하자 미국과 유엔 등은 팔레스타인의 목숨줄인 ‘원조’를 끊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선거에서 패배한 마흐무드 아바스 대통령이 이끄는 파타는 하마스의 연립정부 구성 제안을 일축했다.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대신해 거둬들인 세금과 관세를 동결시켰다. 그 무렵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봉쇄는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남녀노소 200만 명이 그 땅에 갇혀 있다. 헤일리 대사는 이날 가자지구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이 끝난 뒤에야 안보리 회의장에 들어섰다. 그는 리야드 만수르 팔레스타인 대표의 발언 직전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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