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론슈타트섬에서 발길을 돌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찾았다. 로마노프왕조의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살았던 왕궁인 겨울궁전이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만든 긴 줄 뒤에 붙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무료 개장 날이어서 박물관 안은 관람객들로 넘쳐났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과 영국 대영박물관에 필적하는 러시아의 자존심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전시물은 극동에서 온 여행자를 주눅 들게 하기 충분했다. 나는 작품을 감상하면서도 과거 황제가 걸었을 궁전의 복도를 둘러보고 창밖의 겨울궁전 앞 광장과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감히 민중의 권리를 주장하며 궁전 앞으로 쇄도하는 철없는 백성들을 니콜라이 2세도 이 창가 어느 곳에선가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러시아의 1차 혁명으로 알려진 1905년 1월22일, 러시아력으로는 1월9일이었던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자애로운 인민의 아버지 차르에게 부당하게 해고된 푸딜로프 공장 노동자 4명을 복직시켜달라는 청원을 하기 위해 14만 명의 노동자와 시민들이 정교회 신부를 앞세워 이곳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경찰들과 왕궁 수비대, 카자흐 기병대는 겨울궁전 앞 광장에 모인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고 칼을 휘두르며 인간 사냥을 시작했다.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이후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황제에 대한 존경심 대신 원한을 가슴 가득 담았다.
백성들의 두 번째 진격은 1917년 10월에 있었다. 이때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붉은 기를 들고 앞장섰다. 러일전쟁 당시 동해해전에서 겨우 살아남아 대한해협을 통과해 필리핀으로 줄행랑을 쳤던 순양함 오로라호가 겨울궁전 앞을 흐르는 네바강 맞은편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앞으로 나왔다. 오로라호는 지난 2월 떠난 황제를 대신해 겨울궁전을 차지하고 있는 임시정부를 향해 함포를 겨눴다. 수병들은 러시아혁명의 선봉대였다.
에르미타주를 나와 네바강을 가로지르는 궁전다리 끝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와 강과 겨울궁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시대를 질주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 기억을 간직한 현장만 말없이 그대로 있었다.
10월혁명 당시 겨울궁전을 향한 노동자와 시민들의 진격로였던 궁전다리를 뒤로하고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지하철 1호선 플로시치 레니나역에 내렸다. 출구로 나오면 러시아와 페테르부르크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던 현장인 핀란드역이 보인다. 핀란드역 앞 대로 건너편에 조성된 공원에는 악수를 하기 위해 손을 내민 모양의 레닌 동상이 서 있다.
1917년 3월27일 스위스를 떠난 레닌이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내린 것은 4월3일이었다. 2월혁명 소식을 듣고 무조건 러시아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망명객 레닌은 러시아 국경을 넘자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도중에 열차에 올라탄 동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도착하면 체포될 것 같나요?” 열차 안의 동지들은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핀란드역 승강장 한쪽에는 유리관 안에 증기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1957년 6월 핀란드가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 기증한 것으로 레닌이 탄 열차를 끌었던 293호 증기기관차다.
승강장에 내린 레닌을 대위 계급장을 단 장교가 거수경례로 맞았다. 얼떨결에 같은 행동으로 답례를 마친 레닌은 역 앞 광장에 나가자마자 떨리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크론슈타트 수병 의장대의 환영 연주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소속 노동자들,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의 함성에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레닌은 환영객들에 인도되어 핀란드역 광장 앞에 서 있던 장갑차에 올라 소리쳤다. “사회주의 세계혁명 만세!”
100여 년 전 인파로 가득 찼던 역 앞 광장은 한가했고 무엇보다 배가 고팠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야간열차를 타기 위해 다시 역으로 가야 하고 그 전에 배를 채워야 했다. 파김치를 넘어 거의 절인 김치가 된 몸으로 페테르부르크역 앞 식당가를 어슬렁거렸다. 다음날 아침 6시40분, 모스크바 레닌그라드역으로 돌아왔다. 오후 4시30분 베를린으로 떠나는 열차를 타기 전까지 딱 10시간이 주어졌다.
톨스토이가 산책한 오솔길을 걷다아르바트 거리에서 기념품을 사기로 한 일행과 출발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오전 내내 홀로 모스크바의 지하철역들을 둘러봤다. 다니다보니 역사와 환승 통로 곳곳의 벽화와 조각들에 등장하는 인물을 숨은그림찾기처럼 찾고 있었다. 스탈린은 여기저기에서 교묘하게 결연하거나 온화한 표정으로 전사들이나 인민들 속에 서 있었다.
모스크바에서의 마지막 방문지는 톨스토이가 살았던 집이었다. 톨스토이 생가는 열차로 3시간 거리의 모스크바 남쪽 야스나야폴랴나로 알려져 있지만 모스크바에도 그가 살았던 집이 있다. 지하철 5호선 파르크쿨투리역에서 10여 분 정도 걷다보면 한적한 주택가에 황토색으로 나무 담장과 건물 벽을 두른 톨스토이 박물관이 나온다. 입장료 200루블을 내고 짐을 로커에 보관한 뒤 1868년에 지어진 오두막집 현관에 발을 디뎠다.
톨스토이는 1882년부터 1901년까지 가족과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노작가는 1910년 생을 마감했으니 말년기 일부를 이 저택에서 지냈다. 을 이곳에서 집필했다고 한다. 카펫이 깔려 있는 나무계단을 오르내리며 위대한 작가의 손길이 닿았던 방들을 둘러보았다.
은 19세기 말 러시아 사회의 혼란함을 그대로 직시하고 있다. 매춘부 카추샤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하던 귀족 청년 네플류도프는 감옥 안에 수감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무고하며, 가난하기 때문에 법률적 도움을 못 받는 현실을 깨닫는다. 검사와 판사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실현하는 동맹자들이었다. 자본가와 지주들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현실에 눈뜬 네플류도프는 유형지 시베리아로 떠나는 카추샤를 뒤따랐다.
톨스토이의 친필 문서가 나무책상 위 유리판 아래에 보였다. 작가는 검정색 잉크병에 펜을 담갔다가 끓어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헬러시아’의 현실을 그려나갔을 것이다. 오두막집은 숲이 우거진 작은 정원으로 연결되어 있다. 뜨거운 한여름 태양을 초록의 나뭇잎들이 막아주었다. 톨스토이가 산책했을 숲 속 오솔길을 걸었다. 마음속으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대화할 수 있는 작품을 남겨준 작가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 일행은 모스크바 벨라루스카야역에서 다시 만나 감회에 젖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된 러시아 기행이 비로소 끝나고 있었다.
국경 쇼핑을 즐기는 철도 노동자모스크바를 떠나며 무엇인가 비장한 각오라도 남겨야 하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인쇄된 예약권을 승차권으로 바꿔야 하는데 국제선 창구는 닫혔고 국내선 창구 매표원은 비어 있는 국제선 창구만 손으로 가리켰다. 열차 출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우리 일행은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식 승차권을 얻은 우리는 땀을 날리며 승강장으로 달려야 했다. 16시30분, 모스크바발 파리행 023 국제열차의 657호차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차는 출발했다.
칸마다 근무하는 차장의 안내를 받아 지정 객실로 들어간 우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이제까지 만났던 것 중 최고 시설을 갖춘 객실이었다. 출입은 최신 호텔처럼 사람 수에 따라 나눠준 카드키를 이용했다. 침대와 매트도 직접 설치하는 게 아니라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침대보와 이불은 금방 세탁을 마친 것처럼 뽀송뽀송했고 냄새도 상쾌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6인실의 수용소 같은 침구세트와는 차원이 달랐다.
우리를 더 감격하게 했던 것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실내 온도였다. 벽에 장착된 온도 조절 버튼을 누를 때마다 파란색 LED 표시창에 온도가 표시됐다. 더 이상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됐다. 크롬 몰딩으로 매끈하게 마감된 손잡이와 침대 틀, 원목 재질의 옷걸이, 고급스런 자주색 직물 등받이를 일일이 어루만졌다.
이런 객차라면 얼마든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객실 통로 끝 화장실 역시 고급 호텔에 들어온 느낌을 주었다. 화장실 안쪽 샤워부스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둘러 옷을 훌러덩 벗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샤워기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나왔지만 파리행 국제열차의 럭셔리함에 빠져버린 나는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차량은 독일 지멘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철도차량 제작사의 아우라가 우러나는 멋진 객차였다.
모스크바를 떠난 지 2시간30분이 지나 열차가 도착한 곳은 뱌지마라는 시골 역이었다. 러시아 국경을 넘기 전 마지막 장시간 정차역으로 20분간 정차한다. 모스크바를 떠날 때 시간에 쫓겨 경황이 없었던 탓에 보급품을 사야 했다. 승강장엔 작은 소쿠리에 맥주캔과 간식거리를 담은 상인들이 나타났다. 이때 열차에서 내린 거구의 남성이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으로 역 밖으로 나갔다. 나는 얼른 뒤를 따랐다. 그는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우리 칸을 담당하는 차장이었음을 한눈에 알아봤다.
시골 동네 길을 7~8분 정도 걸어 도착한 곳은 마을의 슈퍼였다. 작은 슈퍼 안은 서부영화에서나 나올 듯한 외딴곳의 잡화점과 분위기가 비슷했다. AK47 소총을 빼고 자동차 와이퍼부터 훈제 고기까지 여행자에게 필요한 물품은 없는 게 없었다.
차장은 담배 네 보루와 보드카 서너 병, 그리고 몇 가지 음식을 샀다. 나중에 차장이 독일철도공사 소속임을 알게 된 뒤 이 국제열차 승무원의 주요 미션이 국경에서의 쇼핑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독일과 비교가 안 되는 가격으로 술·담배를 살 수 있는 혜택은 국경을 자주 넘는 사람들의 특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차장 뒤에 섰다가 보드카 1병과 맥주 6캔, 그리고 러시아에서 통하는 유일한 한국말 “도시락”을 외치며 용기라면을 샀다. 지불한 돈은 모두 492루블, 1만700원이 안 되는 금액이었다.
삶은 땀과 노동 위에 있다열차가 2시간쯤 더 간 뒤 스몰렌스크역에 잠시 정차했다 다시 출발했다. 곧 국경이 나올 것이므로 오랜 시간 달려온 러시아를 위해 보드카를 땄다. 시원한 객실 안에서 고추장을 푼 용기라면 국물에 넘어가는 보드카는 달았다. 술기운에 온몸이 노골해지고 얼굴에 미소가 돌 즈음 열차 시각표를 다시 봤다. 나는 열차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눈높이로 국경을 넘고 있었다. 새로 밟고 있는 땅은 벨라루스 영토였다. 사실상 섬나라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낯선 경험이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열차는 서행하면서 브레스트역의 차량 기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열차가 선 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열어놓은 문으로 군복 차림의 벨라루스 국경 경비원이 나타나 여권을 가져갔다. 벨라루스 통과 비자가 없으면 열차에서 내려야 한다. 한국과 비자면제 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나라이기에 러시아발 벨라루스 경유 유럽행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전에 통과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승객들의 여권 검사가 이루어지는 동안 기지에서는 열차의 모든 객차를 하나씩 분리해 리프트 위에 띄어놓았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철도의 궤도 간격이 1520mm로 광궤로 분류된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 철도는 표준궤인 1435mm이다. 국제열차가 폴란드의 궤도 위를 달리기 위해서는 대차라고 불리는 열차의 바퀴 장치를 바꾸어야 한다. 단순하게 보이는 선로 폭에도 국제 정치공학이 녹아들어 있다.
근대 산업문명을 견인한 철도의 위력을 실감한 사람들은 그것이 실어올 위험도 생각해야 했다. 1848년 프랑스보다 10년 늦게 철도를 개통한 스페인 사람들은 나폴레옹의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었다. 스페인은 프랑스-스페인 국경에서 열차가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프랑스와는 다른 선로 폭으로 철도를 건설했다. 그것도 현격하게 차이가 나도록 1668mm라는 초광궤를 선택했다. 공중에 뜬 객차 위에서 발아래로 움직이는 대차를 바라보았다. 벨라루스 철도 노동자들이 객차에 달라붙어 꼼꼼하게 점검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땀이 배어 있는 노동 위에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2시간30분이 걸린 대차 교환 작업이 끝나고 아침 7시에 출발한 열차는 국경을 넘어 아침 6시18분 폴란드의 테레스폴역에 도착했다. 벨라루스와 폴란드의 표준시가 다른 탓에 시간을 거스른 여행을 한 것이다. 테레스폴역에 정차한 뒤 객차 안에서 폴란드 입국심사가 이루어졌다. 위장무늬 전투복을 입은 여군이 여권사진과 얼굴을 자세히 훑어본 뒤 여권에 입국 스탬프를 찍어주었다. 입국 스탬프 한쪽에는 기차 모양이 찍혀 있었다. 열차로 국경을 넘었다는 의미다.
3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바르샤바 동역에서는 대합실로 달려가 샌드위치와 음료수를 샀다. 입맛과 무관하게 장거리 여행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부지런히 먹어야 한다. 동유럽을 관통한 열차는 또 국경을 넘어 여정의 마지막 나라인 독일 땅을 달렸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1만4천km를 열차로 이동하는 대장정이 끝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열차로 국경을 넘나드는 낯선 경험철마를 타고 지구 둘레 3분의 1의 거리를 달려오는 동안 나와 우리 일행은 한 뼘 정도 더 커 있었다. 광활한 만주와 시베리아의 자작나무숲, 바이칼호, 우랄산맥, 도시와 마을들, 그들이 품고 있는 역사적 사연들, 무엇보다 여정 속에 만났던 사람들은 순례를 떠난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7월4일 토요일 저녁 7시30분. 나는 묵직한 가슴을 안고 독일연방공화국의 수도 베를린 리히텐베르크역에 내렸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 바로가기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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