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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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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시베리아 서울역에서 베를린행 열차 타는 날까지

2014년 12월 처음 방문했지만 낯익은 도시 하바롭스크… 김알렉산드라, 김유천 등 조선 독립을 꿈꾸던 한인 디아스포라의 흔적 찾아서
등록 2016-03-02 05:42 수정 2020-05-02 19:28
내가 시베리아에 빠져든 것은 남북철도 연결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2003년이었다. 공사용 자재를 실은 화물열차를 몰고 임진강 철교를 넘으면서 이 철길이 이어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르쿠츠크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는 여행자들 모습.

내가 시베리아에 빠져든 것은 남북철도 연결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2003년이었다. 공사용 자재를 실은 화물열차를 몰고 임진강 철교를 넘으면서 이 철길이 이어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르쿠츠크역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는 여행자들 모습.

어깨에 묵직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불시착한 게 분명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무엇이 잘못됐을까 생각했다. 동력재생기와 시간세팅 장치를 확인하려는 순간 머신의 해치가 열렸다. 어둠이 내린 거리에 유럽식 건물이 보였다. 머신을 빠져나와 출입문을 살펴보니 착륙 때의 충격으로 고장이 난 듯했다. 머신은 긴 경사로를 따라 이어진 주택가 골목길 한쪽에 비스듬히 처박혀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김알렉산드라를 만나

난감한 마음에 스마트워치로 비상조치 매뉴얼 파일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어둠 속 고요를 뚫고 천둥 같은 소리가 울렸다. 진짜 총소리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누군가 골목길을 뛰어오고 있었다. 전력을 다해 질주하던 이는 내 앞에서 쓰러졌다. 나는 얼떨결에 쓰러진 이를 부축했다. 땀범벅이 된 젊은이가 내 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쓰러진 청년을 감싼 내 손은 진득한 피의 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두 눈을 뜨고 나를 보더니 “조선인이오?”라고 묻고는 정신을 잃었다. 사람들에게 알려 구급차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드는데 차가운 총구 여러 개가 원을 그리며 둘러쌌다. 나는 러시아어를 쓰는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강둑에 있는 창고를 개조한 감옥으로 끌려가 구석진 방에 수감됐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러시아 병사가 동양인 둘을 데려왔다. 하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동양인 군인은 일본말로 다른 동양인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이는 한국말로 내게 물어왔다. “조선에서 언제 왔소?”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졌지만 아무 대답도 못하자, 심문하던 이는 시간이 늦었으니 날이 밝은 뒤에 보자며 돌아갔다. 육중한 문이 닫히자 나는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어 앉았다.

짙은 어둠에 눈이 적응하고 발목에 찬 사슬이 보내는 냉기를 느낄 즈음 감옥 안에 다른 이가 같이 있음을 알았다. 반대편 구석에서 흰 눈동자가 번뜩였다. 눈동자는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둠에 길들여진 나의 눈이 상대방의 얼굴 윤곽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사람은 조용히 물었다. “어디 소속이오?” 낮게 깔린 목소리는 여자의 것이었다.

그제야 다가오다 멈춘 이의 머리와 몸이 여성의 체형임을 알았다.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지금이 몇 년, 몇 월이고 여기는 어디죠?” 여자가 말을 받았다. “너는 밀정이냐?” “아뇨! 전 다만 좀 특이한 여행자이긴 한데….” 여자는 체념한 듯 말을 끊었다. “당신이 밀정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어차피 나는 내일 죽게 되니까. 1918년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에서 해방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는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누구와 같이 있게 된 것인지 알았다.

“김알렉산드라!” 나의 외침에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조심스럽게 이어가던 대화는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나의 이름은 김스탄케비치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요, 긴 이름만큼 기구했던 과거가 담겨 있죠. 내 사랑하는 아버지 김표트르는 당신처럼 철도에서 일했어요. 동청철도국에서 조선어·중국어 통역을 했지요.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죠. 조선이나 중국 노동자들이 비인간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커서 노동자들을 돌봐야 한다고. 그런 아버지는 내가 하얼빈 소학교 때 돌아가셨고 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중등학교를 마치자마자 폴란드인과 결혼했어요. 소학교 때부터 식모살이를 하던 집의 아들 마르크 스탄케비치가 나의 남편이었죠. 그는 방탕한 부르주아지였어요. 남편의 술, 노름, 폭력이 내 결혼생활의 전부였고요.”

김알렉산드라와 나는 어느새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평온하고 담담하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신병자가 된 남편을 버리고 두 아들과 함께 중국 하얼빈을 떠나 해삼위, 그러니까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게 되면서 김알렉산드라의 인생은 바뀌게 되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눈뜬 김알렉산드라는 알을 깬 새들이 그렇듯 힘차게 창공을 날았다.

“두 아이를 한 번만 안아볼 수 있다면”
힘든 여정이었지만 꿈같은 시간이었다. 환바이칼 열차의 기관사가 열차를 점검하고 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꿈같은 시간이었다. 환바이칼 열차의 기관사가 열차를 점검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조선 독립운동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사회주의혁명 사상과 조선 독립운동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두 운동은 모두 억압의 굴레를 벗어나겠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우랄 지역에서 ‘우랄노동자동맹’을 세우는 일을 했을 때는 정말 신이 났소. 5천 명이 넘는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볼셰비키를 지지하도록 조직했죠. 기업가 놈들과 멘셰비키 놈들 콧대를 완전히 꺾어버렸지. 그때가 작년이었어요.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이었죠.”

내가 예카테린부르크를 갔던 이야기를 하자 김알렉산드라도 그곳에서 조직활동을 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혁명 이후 하바롭스크로 돌아온 김알렉산드라는 1918년 2월 조선민족해방혁명가 회의를 주도했고 3월28일에는 한인사회당을 창건했다. 그러나 4월5일 블라디보스토크에 일본군 무장간섭군이 상륙했고 이들의 지원을 받은 반혁명군 백군의 공세가 시작됐다.

하바롭스크의 한인사회당은 붉은 군대에 편입되어 백군과의 전투에 나섰다. 9월, 마침내 백군은 압도적 무장력으로 하바롭스크를 장악했고 400여 명의 혁명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중에 하나가 김알렉산드라였다. “지금 가장 아쉬운 건 무엇인가요?” “혁명가로서 죽음을 맞는 것은 이미 각오한 바이기 때문에 후회가 없지만 남겨둔 두 아이가 너무 보고 싶네요. 자식이란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지요. 한 번만이라도 안아볼 수 있다면….” 김알렉산드라는 목이 메어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지났다. 무엇인가를 물으려 할 즈음 김알렉산드라의 머리가 내 어깨 위로 툭 떨어졌다. 그녀가 이승에서의 마지막 단잠을 누리는 동안 한 뼘 남짓한 감옥의 창으로 들어온 새벽빛이 벽에 박혔다. 압수를 피하기 위해 스텔스 모드로 작동시켰던 스마트워치가 머신이 복구됐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낡은 담요를 돌돌 말아 베개를 만들어 김알렉산드라의 머리를 받쳤다. 재킷을 벗어 그녀의 몸을 덮은 뒤 가상 태블릿을 띄워 머신과의 위상동위 탭을 터치했다.

순간이동 장치의 도움 덕에 탈옥은 손쉬웠다. 머신은 완벽히 복구되어 있었다. 현재 시각 표시도 1918년 9월을 명확히 알리고 있었다. 아침이 훤히 밝아오자 사람들이 아무르강 언덕길로 모여들었다. 나는 군중 속에서 군인들의 엄중한 감시 속에 형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낯익은 재킷을 걸친 탓에 김알렉산드라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김알렉산드라는 오래전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청년처럼 다가오는 운명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하바롭스크 시장에서 맛본 빨간 김치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만난 도스토옙스키.

모스크바 지하철에서 만난 도스토옙스키.

2014년 12월 중순 어느 날 오후, 나는 하바롭스크의 아무르강 언덕 위에 있었다. 체감온도가 아닌 실제온도 영하 28℃에서 불어오는 강변의 바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할 기세였다. 강 건너편은 중국 영토이고 그곳에선 흑룡강이라고 부르는 아무르강도 두껍게 얼어 있었다. 전날 저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밤새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하바롭스크역이었다. 아침 7시가 넘었는데도 내가 좋아하는 코발트블루 새벽빛이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목을 움츠리게 하는 차가운 공기, 종종걸음으로 막 출근길에 나선 사람들이 모인 트램 정류장, 도로에 중앙분리대처럼 쌓인 눈들은 이 도시가 시베리아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묵기로 한 호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도, 창 칸마다 붙어 있는 벨 버튼 위의 ‘정차합니다’란 한글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는 시내버스 안에서도, 도로 곳곳을 누비는 트램 안에서도 나는 창가의 서리를 손으로 닦아내며 거리를 유심히 살폈다. 처음 방문한 도시였지만 낯이 익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하바롭스크의 메인스트리트인 카를 마르크스 거리의 레닌 광장은 많은 버스와 트램 노선이 교차하는 곳이다. 레닌 광장에서 트램을 내린 나는 카를 마르크스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걷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시장 쪽으로 향했다. 이 루트를 따라 걷게 되면 카를 마르크스 거리와 건물들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이어져 있는 거리가 나온다. ‘김유천 거리’다. 시베리아의 도시 거리 이름에 한인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을지로나 충무로로 옛 장군을 기억하듯 김유천은 이 도시가 간직한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1929년 10월, 김유천은 만저우리∼하얼빈∼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동청철도를 둘러싼 분쟁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라하수수 지역 전투에서 러시아 백군 출신 병사들이 대거 합류한 중국 군벌 군대가 김유천 부대를 공격했다. 김유천은 수세에 몰리면서도 맞은편 적진을 향해 “병사들이여, 고관들에 속지 말고 우리 편으로 넘어와 인민을 위한 투쟁에 나서자!”고 소리쳤다. 김유천은 부하들이 거의 쓰러져가자 참호를 뛰쳐나와 마지막 돌격을 감행하다, 날아온 포탄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김유천 거리를 지나 조금만 더 가면 한국의 재래시장 모습과 꼭 닮은 하바롭스크 중앙시장이 나온다. 입구를 열고 들어가면 고려인 상인이 빨간 김치를 내놓고 팔고 있다. 김치를 보고 시큼하게 침이 도는 내 자신을 보고, 인간이란 나고 자란 땅의 기운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홍범도와 이동휘, 양기탁, 안중근의 동생 정근, 무장독립군 박일리야와 최니콜라이가 걸었을 거리들을 걸었다. 한낮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았던 스탈린 체제 아래에서는 조선인 문학가 조명희가 비극적으로 죽은 곳이기도 하다.

2003년 남북철도 연결… 시베리아 횡단의 꿈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달리는 해운대행 버스.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달리는 해운대행 버스.

김알렉산드라는 아무르 강변 죽음의 언덕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조선의 자유와 독립 만세! 전세계 노동자들의 자유 만세!” 그녀는 훗날 독일 베를린 란트베어 운하에서 최후를 맞이한 로자 룩셈부르크처럼 강물로 버려졌다. 나는 아무르강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다 발길을 돌렸다.

내가 시베리아에 빠져든 것은 남북철도 연결사업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2003년이었다. 공사용 자재를 실은 화물열차를 몰고 임진강 철교를 넘으면서 이 철길이 이어지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생각했다. 2007년 5월 경의선과 동해선 남북철도 시범운행이 있었을 때는 당장이라도 대륙으로 가는 열차가 운행될 것 같은 희망이 생겼다. 남북철도가 연결되면 시베리아를 달리게 된다. 이곳에선 어떤 사람들이 살아왔을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자료들을 구해 읽다가 시베리아와 한반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 관계를 알게 되었다.

조선이 망한 뒤 백성들은 식민지를 극복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하와이, 미국, 멕시코까지 유랑해야 했던 많은 한인 디아스포라들은 떠나온 땅 조선의 독립을 생의 과업으로 생각했다.

시베리아의 한인들은 그 중심이었다. 몇 번이나 도전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포기했던 시베리아 횡단을 더 미뤄선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통일은 대박’이라는 공허한 수사가 칭송되고 유라시아 이니셔티브가 알맹이 없이 소비되는 것과 무관하게 남과 북은 더 적대적으로 대립했다. 이런 시기에 시베리아를 달려 유럽까지 도달하는 여정을 통해 진정한 이해와 소통이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시베리아 횡단 의지를 알고 있었던 정은주 기자는 적극적으로 출발을 독려했다. 2015년 6월 과감하게 칼을 뽑았다. 2014년 겨울 맛보기로 잠깐 다녀온 블라디보스토크∼하바롭스크 기행이 자신감을 북돋았다. 인터넷은 여행계획을 수립하는 데 최고의 도우미가 되었다. 끈기 있게 마우스를 클릭하다보면 저가 항공권과 숙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러시아 철도청 인터넷 회원에 가입해 횡단철도 구간별 승차권도 예매했다. 방문할 도시들과 찾아갈 장소들의 리스트를 만들며 여행계획을 세우는 일은 사람을 묘하게 흥분시켰다.

유라시아 원정팀은 총 3명으로 구성됐다.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에 나섰다가 해고된 전직 철도 노동자 이만호, 제멋대로 살겠다고 회사에 사표를 던진 뒤 스콧 니어링 흉내를 내며 경북 문경 산골에 한옥집을 짓고 있는 유성주가 나의 동행이 되었다. 이만호는 철도차량 중정비 현장에서 일했고, 유성주는 전동차 정비팀에서 일했다. 이만호는 기중기로 차체를 올려 부품을 교체하거나 정비하는 스케일이 큰 현장에서 일했기에 자부심도 대단했다. 전동차 형광등이나 갈던 주제에 감히 엔진을 통째로 올리는 정비창 출신 앞에서 폼 잡지 말라고 유성주에게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유성주는 이만호에 맞서 경정비라도 얼마나 할 일이 많고 세심한 손길이 필요한지 역설했다.

우리 셋은 자신의 분야가 최고라며 티격태격하면서도 철도는 여러 노동자들의 조화로운 협력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만호 같은 멋진 노동자의 복직을 외면하는 철도공사 경영진은 정말 큰 실수를 하고 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초반 여정부터 큰 충격을 받게 한 북한 노동자들, 유라시아를 횡단하며 만났던 사람들과 역사의 현장들이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지금도 가끔씩 눈을 감으면 유라시아 횡단의 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른다. 이번 여행을 통해 받은 기운은 아주 오래도록 내 가슴을 식지 않게 해줄 것이다. 안녕, 시베리아!

내 가슴에 영원히 남을 여행

지난 6개월 동안 유라시아 열차 횡단에 함께 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가끔은 가까운 역으로 가셔서 열차에 오르세요. 독자 여러분이 달리는 기차의 차창 밖 풍경을 보고 미소짓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저도 행복하게 달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사진 박흥수 기관사·사회공공연구원 철도정책 객원연구위원*‘박흥수 기관사의 유라시아 기차 횡단기’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박흥수 기관사와 ‘유라시아 기차 횡단기’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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