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이다. 2007년 9월 버마(미얀마) 승려들이 주도한 사프란 혁명 직후, 기자는 버마 중북부 도시 만달레이 외곽 허름한 폐가에서 다부진 한 청년과 마주 앉았다. 그는 민족민주동맹(NLD) 청년활동가 모조아웅이었다. 2003년 아웅산 수치 차량이 군부가 지원하는 폭도들의 공격을 받았던 ‘데파인 학살’ 때 모조아웅은 수치의 보디가드였다. 당시 폭도들은 현 집권여당인 통합연대개발당(USDP)의 전신 통합연대개발협회(USDA) 소속 ‘주먹들’로 알려졌다. 그 공격에서 ‘살아남았던’ 모조아웅이 지난 11월8일 치른 버마 총선에서 민족민주동맹 후보로 당선됐다.
야당 승리는 민중이 일궈낸 결과사프란 혁명을 주도했던 승려 우 감비라. 그는 6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 뒤 뇌수술을 받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고문의 후유증을 안은 채 타이에서 쉽지 않은 망명 생활을 하고 있다. 감비라는 총선이 끝나면 ‘민주화된’ 고국으로 돌아가 상처 입은 무슬림과 불교도 간 화해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선거가 끝나자 그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민족민주동맹이 승리했으니 조만간 집으로 가겠다고.
버마 총선 뒤 전세계 언론이 아웅산 수치에게 온갖 찬사와 환호를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수많은 모조아웅과 보이지 않는 감비라들의 고된 역정이 쌓아온 무수한 계단 위로 수치는 오르고 있을 뿐이다. 그 역시 2년 전 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희생이 주목받는 것이 당황스럽다며 “동료들이 훨씬 더 고된 길을 걸어왔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이번 선거는 수치의 동료들인 버마 민중의 지난한 투쟁의 연장선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꼭두각시 정당 통합연대개발당을 내세워 민주주의를 흉내 내려던 군인들의 속셈은 보기 좋게 심판받았다.
그러나 이번 선거를 군정 패배, 민주 야당 승리의 단순 도식으로 보면 큰 오산이다. 테인 세인 대통령실 대변인 예 투 장관은 지난 11월10일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1990년 총선 뒤 군부가 정권 이양을 거부했던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90년과는 다르다. 당시엔 헌법이 없었고, 지금 버마에는 엄연히 헌법이 있다.”
2008년 군정 헌법은 반세기 권력의 호사를 누려온 군인들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도 될 만큼 자신들의 중추적 권력을 선명하게 보장해놓았다. 심지어 헌법 제40조 (C)항은 ‘반란’이나 ‘폭력’으로 국가주권 붕괴 상황이 올 경우 ‘국가 안보’와 ‘국가 통합’을 위해 “군총사령관이 (권력을) 인계할 수 있다”고 적어놨다. 사실상 ‘쿠데타’를 합헌으로 만들어놓은 셈이다. “아직 민족민주동맹이 새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다. 그들이 정부를 구성하더라도 핵심 권력자는 군이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개표 결과를 조금씩 흘리던 11월11일 저녁, 버마 정치평론가 시투 아웅 민(50)은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그렇게 적었다. 그는 쿠데타 등 선거 이후 위험 변수들을 묻는 질문에 신중하게 답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는 내년 3월31일까지 5개월이나 남았다. 그 사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다.”
쿠데타도 합법화한 군정 헌법의 그림자11월12일 오전 9시 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민족민주동맹은 하원과 상원에서 각각 196석과 77석으로 80~90% 득표율을 보이며 크게 앞서가고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민족민주동맹은 상하 양원 모두 압승할 것으로 보인다. 이 압승은 우선 민족민주동맹이 상하 양원이 추천하는 대통령 후보 2명의 지명권을 갖는다는 의미다. 나머지 한 명은 헌법상 군인에게 배정된 116명(25%)의 군인의원들이 추천한다.
이렇게 총 3명의 대통령 후보를 두고 의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게 내년 2월 이후다. 대통령이 되지 못한 나머지 2명은 부통령이 된다. 대통령 후보는 반드시 의원일 필요는 없다. 대통령이 된다면 권한은 막강하다. 그 대통령이 임명하는 장관들로 ‘라인업’을 마쳐야 비로소 정부가 출범한다. 3월 말의 얘기다. 현재로선 민족민주동맹 지명자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이 막강한 민간 권력은 국정운영의 요직을 건드리지 못한다. 국방부, 내무부 그리고 국경부 장관들은 모두 군총사령관이 임명하도록 돼 있다. 또 대통령보다 막강한 권력은 국방안보위원회(NDSC·National Defense and Security Council)에서 나온다. 국방안보위원회 구성원 11명 중 최소 6명은 군인이고 여기엔 군총사령관이 임명하는 3부 장관들과 총사령관·부사령관 그리고 군인의원들이 추천하는 부통령이 포함된다. 선거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양원 의회 의장이나 대통령, 그리고 또 다른 부통령도 군인 몫이 될 수 있지만 이번 선거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군총사령관이 주요 내각의 임명권과 통제권을 갖고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국방안보위원회의 과반이 군인일 수밖에 없다는 건 군정 체제 종식이 아니다. 따라서 이번 총선은 헌법에 기반한 군 권력을 공고화하는 것이라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버마는 1948년 독립 직후부터 카렌주를 시작으로 내전에 휩싸여온 세계 최장기 내전 국가다. 방대한 국경 지대가 소수민족 반군의 통제하에 있고 소수민족 인구는 전체 인구의 30∼40%다. 2008년 헌법에 따르면 아무리 압도적 지지를 받은 선출된 민간 권력이라도 소수민족 분쟁 지역에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다. 선거로부터 이틀이 지난 11월10일 샨주의 반군 ‘샨주 북부군’ 본부가 있는 완하이 지역이 정부군의 공습을 당한 건 선거와 ‘무관하게’ 계속되는 전쟁이 버마의 현실임을 상기시켜주었다.
군총사령관이 통제하는 또 다른 부서인 내무부는 어떤가. 온갖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반정부 세력들을 감찰해온 경찰력, 로힝야 무슬림이나 여타 무슬림을 겨냥한 종교폭동에서는 폭도들을 지켜만 보거나 폭력에 적극 가담하던 경찰력, 모두 내무부 통제하에 놓여 있다. 지난 3년간 안티무슬림 폭동 현장과 백린탄까지 사용되던 광산 개발 반대 시위 현장은 모두 내무부의 통제하에 있었다.
내무부 장관인 코 코 중장은 지난해 11월 미국 하버드대학 로스쿨 국제인권클리닉에 의해 ‘전쟁범죄자’로 지목되기도 했다. 2005∼2008년 동부 카렌주 ‘특수작전 3부대사령관’ 시절 카렌족에게 저지른 그의 범죄가 국제형사재판소(ICC)가 구속영장을 발부해도 될 만큼 충분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는 거였다.
이 모든 인권침해의 블랙홀인 군과 경찰을 민족민주동맹 정부는 통제할 수 없다. 헌법 개정 없이 군정 종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2008년 헌법 제436조는 25% 군인의원들에게 사실상 비토권을 부여했다. 민족민주동맹 등 야당이 선출의원직을 100% 차지하더라도 군의원들의 찬성이 없는 한 헌법 개정은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평론가 아웅 민은 “새 정부를 구성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민족민주동맹 정부하에서 헌법 개정은 더더욱 먼 얘기”라고 말했다.
아웅산 수치의 위험한 발상민족민주동맹 정부가 직면한 문제는 비단 헌법에만 있지 않다. 민족민주동맹 정부는 ‘아웅산 수치 체제’나 다름없고 그의 리더십은 이미 독선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다. 수치는 지난 한 달 동안 최소 네 차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통령 위에 군림할 것”이라는 발언을 반복했다. “이름뿐인 대통령”을 자신이 조종하며 실질적 권력자가 되겠다고 거듭 말했다. 11월10일 와의 인터뷰를 보자. “내가 결정한다. 내가 선거에서 이긴 당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우리 당의 지명으로 대통령이 되는 자는 절대적으로 아무런 권한이 없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막강한 대통령 권한 위에 군림하겠다는 수치의 발언은 뒤집어보면 초헌법적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독재적 발상이다. 동시에 자신의 대선 출마를 막은 2008년 헌법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어느 경우가 됐든 수치 자신의 모토인 ‘법치’를 스스로 위반했다. 현실적 문제는 그런 꼭두각시 대통령에 오를 인물이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전 집권여당 대표이자 국회의장인 슈웨 만이 오랫동안 아웅산 수치와 정치 협상을 해왔던 탓에 ‘아웅산 수치가 미는 대통령 후보’로 가능성을 높여왔다. 군정 시절 ‘넘버3’로까지 통했던 장성을 민족민주동맹 대통령으로 지명하는 그림은 수치가 그토록 강조해온 ‘화해’일 수도 있고, 대단히 정치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적’이라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야심 가득한 인물 슈웨 만이 수치의 꼭두각시가 될 것으로 보기는 더더욱 어렵다. 결국 수치와 가깝던 슈웨 만은 지난 8월 집권당 대표직에서 강제 축출당했다.
그동안 슈웨 만과 권력투쟁 관계에 있던 테인 세인 현 대통령도, 군총사령관 민 아웅 라잉도 최소 한 번쯤은 대통령을 할 의사가 있음을 드러냈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장성들만 득세한 가운데 정작 야당 진영에선 대통령 후보감이 빈곤해 보인다. ‘민주화 투사’가 적지 않은데도 말이다. 수치의 독선적 리더십이 낳은 비극이고, 수치의 독선은 지금 ‘초헌법적’ 지도자상을 향하고 있다.
소수민족 문제에 NLD는 어떻게 답할까이번 선거의 가장 큰 오명은 로힝야를 포함한 무슬림들이 민족민주동맹 후보로도 공천에서 배제된 점이다. 시민권이 없다는 이유로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무슬림 또한 많았다. 버마 연방 출범 이래 전례 없는 경우다(제1078호 ‘민주주의 연꽃이 시궁창에 폈다’ 참조). 그럼에도 투표권이 있는 무슬림들은 대거 민족민주동맹에 표를 줬다. 이번 정권에서 하루하루 억압받았다는 게 그 이유다.
투표일이던 11월8일 인권단체 ‘포티파이 라이츠’(Fortify Rights) 국장 마튜 스미스는 아라칸주 게토 안에서 줄 선 로힝야들의 사진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리며 이렇게 적었다. “이들은 오늘 투표를 위해 줄 선 게 아니다. 쌀 배급 줄이다.” 스미스는 기자와의 메신저 인터뷰에서 “이번 선거는 로힝야들에게 치욕의 역사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버마 전역이 선거로 흥을 돋고 수십 년 투쟁의 성과로 받아들여지는 동안 (최초로 투표권을 잃은) 로힝야들에게는 정부의 박해가 더 쓰라리게 되살아난 날”이었다는 것이다.
아웅산 수치는 그동안 로힝야, 무슬림 문제에 대한 도전적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자신은 “권한이 없다”며 정부에 공을 넘겼다. 이번 선거로 수치와 민족민주동맹은 80%를 웃도는, 전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압도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제 로힝야 무슬림 문제에 수치가 무엇이라 답할지 주목된다.
방콕(타이)=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Lee@Penseur21.com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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