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냉전은 언제 끝났을까? 1986년 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이 전환점이다. 아이슬란드의 수도에서 로널드 레이건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만났다. 회담은 성과가 없었다. 아무런 합의문도 채택하지 못했다. 돌아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무거웠고, 실망감도 컸다. 양쪽은 상대를 원망했다. 언론은 실패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몇 달의 시간이 흐르자, 만남의 긍정적 효과가 드러났다. 역사는 레이캬비크의 만남을 탈냉전의 시작으로 기록한다. ‘실패했는데, 성공한 협상’이 가능한가?
KAL기 폭파, 냉전 전사 레이건 ‘반전’ 계기
레이건은 10월10일 금요일 레이캬비크의 미국 대사관에 짐을 풀었다. 소련은 항구에 대형 유람선을 정박시켜 숙소로 활용했다. 일정은 10월11일과 12일 이틀이었다. 만남을 제안한 것은 고르바초프였다.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중간쯤 거리에서 만나, 마음을 터놓고 토론해보자는 취지였다. 미-소 양국의 적대감은 여전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1985년 11월 레이건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고르바초프를 처음으로 만났다. 그때 그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고르바초프를 평가했던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에 수긍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냉전의 종식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고르바초프를 주목한다. 그의 ‘새로운 사고’가 역사를 바꾸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레이건이 더 유연하고 적극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우리는 레이건을 냉전의 전사로 기억한다. 그것은 단편적인 기억이다. 레이캬비크의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불렀던 근본주의자가 더 이상 아니었다.
그래서 ‘레이건의 인식론적 반전’을 기억해야 한다. 시끄러웠던 1983년이 계기였다. 그해 대한항공 여객기가 소련 공군기에 의해 격추당했다. 소련은 즉각 자신들의 실수를 미국에 알렸지만, 레이건은 이 사건에서 핵전쟁의 공포를 느꼈다. 오해와 실수가 인류 전체의 삶을 파괴할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핵전쟁을 다룬 라는 TV영화가 방영돼 미국 시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레이건도 그 영화를 보고 관련 부처에 핵전쟁 시나리오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영화와 현실의 간격은 크지 않았다. 그해 11월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벌인 핵무기 사용을 가정한 군사훈련인 ‘에이블 아처 83’(Able Archer 83) 역시 영화의 도입부와 거의 비슷했다. 레이건은 핵무기의 통제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4년 1월 레이건은 공개 연설에서 “소련의 이반과 마샤가 미국의 짐과 샐리를 만난다면 공동의 이해를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회가 생기면 소련과 협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우선 강경파로 통하는 캐스퍼 와인버거 국방장관, 윌리엄 케이시 중앙정보국(CIA) 국장 그리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강경파들의 의견을 멀리하고, 대화파인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레이건의 생각이 슐츠의 생각과 비슷해졌기 때문이리라. NSC의 개편도 이루어졌다. 소련 전문가이면서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잭 매틀록 체코 대사를 NSC 유럽 소련 국장으로 임명했다. 고르바초프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과의 대화를 준비했다.
개혁 위해 외교 중요성 인식한 고르바초프
물론 고르바초프의 등장이 역사에 미친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그는 낡은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면 외교적 환경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았다. 1985년 4월 SS-20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중단하겠다고 했고, 그해 7월에는 더 이상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먼저 포기할 테니, 미국도 양보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1986년 초 ‘15년 내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들자는 야심찬 구상을 발표했다. 더불어 외교 분야의 진용을 갖추었다. 1985년 냉전외교의 상징인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외교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외교 경험이 없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조지아 출신의 셰바르드나제가 차지했다. 그리고 198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7차 대회에서 24년간 소련의 미국대사를 지낸 아나톨리 도브리닌이 당의 국제부장이 되었다. 외교부의 군축국 인원들도 대부분 교체됐다. 전통적인 냉전외교와 결별하고, 미국과 군비 통제 외교를 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했다.
10월11일 아침에 두 정상이 만났다. 고르바초프는 먼저 군비 감축을 논의하고 지역 현안, 인도주의, 그리고 양국의 포괄적 관계를 논의하자고 제안했다. 레이건은 인권의 중요성을 먼저 언급했다. 소련의 인권 개선이 미국 의회를 설득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길게 설명하자, 고르바초프는 “당신이 세계 정세와 미-소 관계에 더 집중해주었으면 한다”고 화를 냈다. 레이건은 인권 문제를 다른 현안과 연계하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이 단지 정치적 쇼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
오전 회담은 겉돌았다. 오후에는 2개로 나눠 실무 협상을 이어갔다. 하나는 군비 통제고 다른 하나는 지역 분쟁, 인권 그리고 양국의 교류 협력이었다. 셰바르드나제외교장관과 슐츠 국무장관이 총괄하고, 해당 분야의 핵심 전문가들이 모두 참여한 진지한 협상이었다.
원래 10월12일 일요일 일정은 오전 정상회담에서 합의 사항을 점검하고, 점심을 함께 먹은 뒤 헤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침 식사가 끝나자, 관계자들의 짐을 비행기에 실었다. 그러나 두 지도자는 할 말이 많았다. 고르바초프는 먼저 인권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소련은 미국의 인권 상황을 매우 우려한다면서, 정보 흐름이 일방적이 아니라 서로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은 소련 시민들이 자신의 기자회견을 볼 수 없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꼬집었다.
두 사람은 양국 실무자들이 만들어온 분야별 쟁점을 점검했다. 고르바초프는 회담을 하루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다. 미국 쪽은 하루 더 연장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리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점심을 먹고 정상회담은 계속됐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은 많이 양보했는데, 미국은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고 불평했다. 그날 레이건은 모든 탄도미사일을 10년 안에 철폐하자고 제안했다. 고르바초프는 한술 더 떠 모든 핵무기를 철폐하자고 대응했다.
역사적 합의에 가까이 갔음을 모르다
합의 사항을 패키지 방식으로 생각한 것이 문제였다. 민감한 특정 현안의 입장 차이가 전체 합의를 방해했다. 문제의 핵심은 전략방위구상(SDI)이었다. 레이건은 우주 공간에서 날아오는 핵미사일을 파괴하겠다는 구상에 집착했다. 고르바초프는 향후 10년간 SDI를 실험실 수준으로 제한할 것을 제시했다. 레이건은 “SDI를 포기한 것으로 비치면 정치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합의했는데 단지 SDI라는 한 단어 때문에 역사적 기회를 걷어차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고르바초프는 “단어가 아니라 원칙의 문제”라고 대응했다. 미국이 우주 공간에서 무기 실험을 하는 걸 허용하면 자신은 ‘무책임한 바보’로 비판받을 것이라고 했다. 셰바르드나제 장관이 끼어들었다. “먼 훗날 사람들이 회담 내용을 읽고 우리가 역사적 기회를 그냥 흘러보낸 것을 안다면, 결코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장감을 불어넣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이대로 끝나도 좋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대화는 저녁 6시50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회담을 종결했다. 두 사람은 상대가 군비 감축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어두운 표정으로 건물을 나왔다. 고르바초프는 기자회견에서 “아직 문이 닫히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후유증은 컸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회담을 실패로 규정했다. 레이건이 비현실적인 꿈에 사로잡혀 세계를 바꿀 수 있는 군비 감축 협정을 거부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몇 달 동안 미-소 양국은 배신감과 실패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신경전에 물두했다. 몇 번 후속 협상의 기회가 있었지만, 양쪽은 상대 정상의 양보만을 부각해서 협상을 시작하려 했다.
그때 그들은 잘 몰랐다. 합의 가능한 수준을 서로 확인해본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고르바초프는 중거리핵무기(INF)를 모두 없애는 ‘제로 옵션’(Zero Option)을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그들은 SDI라는 당장 현실화하기 어려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현안에 사로잡혀 역사적 합의에 가까이 갔음을 미처 몰랐다. 유럽 국가들은 양국 정상의 대화 내용을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다.
합의를 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는 평가도 있다. 양국 관계는 아직 합의를 이행할 만큼의 신뢰 수준은 아니었다. 정상회담 이후의 상황도 복잡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콘트라 사건이 불거지면서 곤혹을 치렀다. 존 포인덱스터 NSC 보좌관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레이건 행정부에는 여전히 소련과의 군축 협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몇 달의 불안한 흔들거림을 겪고, 다시 협상을 시작했다. 1987년 고르바초프는 SDI 제한 요구를 철회했다. 임박한 위협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레이건도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금지조약에 서명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87년 12월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중거리핵무기 협정에 서명했다. 레이건은 워싱턴 정상회담을 ‘소련과의 정상회담 중 역대 최고’라고 평가했다. “성급하지 않았고, 그래서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던” 레이캬비크의 선물이었다. 4년 뒤인 1991년 조시 부시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총서기는 마침내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에 서명했다.
냉전 종식, 강경파의 승리 아냐
냉전 종식은 강경파의 승리가 아니다. 레이건의 군사 강경 정책이 소련의 변화를 강제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이념적 정당화’와 다름없다. 레이건이 강경 정책을 지속하면서 협상을 거부했다면, 고르바초프 역시 소련 내부에서 강경파들의 반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랬다면 냉전은 그렇게 쉽게 종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레이건의 변화를 주목하지 않는가? 레이건은 자신이 잘 몰랐기 때문에, 정보에 개방적이었고 전문 부서의 정책 판단을 잘 경청했다. 이념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면서 레이건은 냉전을 종식시킨 협상가로 거듭났다. 협상은 사회주의 정권을 변화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다. 왜 스스로 수단을 묶으려 하는가? 뉴라이트 세력은 자신들의 우상인 레이건이 자신들과 얼마나 다른지를 잘 모른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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