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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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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묻은 손으로 어떻게 악수했나

400년 분쟁 해결해 국제사회에서 기적이라 불린 북아일랜드 평화협정
갈등의 골 깊고 약속 배반되는 협상에서 결국 합의 이뤄낸 인내의 힘
등록 2013-08-28 08:27 수정 2020-05-02 19:27

1998년 4월10일 북아일랜드의 정치 중심지 스터먼트 호텔 문을 걸어 나오는 정치인들은 모두 눈물을 글썽였다. 짧게는 30년, 길게는 400년의 분쟁이 해결됐다. ‘성 금요일 협정’(Good Friday Agreement)을 국제사회는 기적이라고 불렀다. 갈등의 골이 깊고, 대립의 역사가 너무 긴 분쟁이었다. 숨죽이며 협상 결과를 기다리던 많은 국민이 환호했다. 어떻게 그들은 피 묻은 손으로 악수할 수 있었을까?

북아일랜드, 식민주의라는 치부의 증거

북아일랜드 분쟁은 역사가 길고 성격이 복잡하다. 치매에 걸린 아일랜드 사람이 딱 하나 잊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한이라는 오랜 농담이 있을 정도다. 증오의 기억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잉글랜드는 그때부터 북아일랜드를 식민화하기 위해 이주정책을 추진했다. 이주해온 신교도와 토착민인 구교도는 충돌했다. 1641년에는 구교도 토착민이 신교도 이주민을 대량 학살했다. 그리고 1690년 7월 신교도가 내세운 월리엄 왕자가 제임스 2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북아일랜드에서 신교도의 패권이 확립됐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단순한 종교 갈등을 넘어선다. 신교도는 토지를 확보했고, 사회의 중상층을 차지했다. 20세기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1949년 아일랜드 남부 26개 주가 아일랜드공화국으로 독립했다. 나머지 아일랜드 북부의 6개 주는 영국의 통치 구역으로 남았다. 그것이 북아일랜드다. 아일랜드는 분단됐다. 그리고 북아일랜드 내부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됐다. 1969년 유혈 사태가 일어난 뒤 아예 신교도 거주 지역과 구교도 지역을 구분하는 장벽이 세워졌다. 5km에 달하는 장벽은 모든 것을 갈랐다. 학교도 다르고, 역사 해석도 다르고, 신문도 다르며, 정당도 다르고, 문화와 스포츠 행사도 각자 치른다. 얼마나 많은 원한이 쌓였겠는가?
신교도는 자신을 영국인으로 생각하고 북아일랜드가 영국과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통합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구-교도는 아일랜드의 독립을 추구한다. 그래서 ‘민족파’라고 부른다. 통합파와 민족파 내부에서 각각 온건파와 강경파가 생겨나면서 갈등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민족파 내부의 강경파이면서 무장단체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은 테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과시했다. 여기에 맞서 통합파의 무장조직인 얼스터방위군(UDA)도 결성됐다.
분쟁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69∼98년 3500여 명이 사망했다. 북아일랜드 인구가 160만 명 정도임을 고려할 때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인구와 국토 면적을 고려하면 분쟁의 강도가 매우 높다. 북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서유럽의 상처였다. 영국 처지에서 북아일랜드는 식민주의라는 치부의 증거다.
분쟁 해결의 역사도 길다. 이미 1970년대부터 평화 노력이 시작됐다. 그러나 해결을 낙관하는 사람은 없었다. 리처드 닉슨과 제럴드 포드 행정부 때 미국 외교를 책임진 헨리 키신저는 훗날 북아일랜드 평화를 위해 왜 개입하지 않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우린 북아일랜드 문제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렇게 대답했을 정도다.
그토록 어려웠던 북아일랜드의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어떤 사람들은 상처가 곪을 대로 곪아, 다시 말해 한계에 도달해 평화가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평화는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만들어질 뿐이다. 갈등 당사자들의 노력과 제3자의 중재 노력이 결합돼 성과에 도달한 것이다.

협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우선적으로 ‘성 금요일 협정’이 맺어지는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중요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임기 동안 3번이나 북아일랜드를 직접 방문했다. 1995년과 1998년, 그리고 2000년이다. 특히 2000년 12월 북아일랜드 방문은 클린턴의 마지막 외국 방문이다. 당시 한반도는 클린턴의 북한 방문을 간절히 기대했지만, 결국 그의 선택은 북아일랜드였다. 클린턴 본인이 아일랜드계 혈통이다. 미국에서 아일랜드계는 3400만 명에 달한다. 미국 전체 인구의 12%에 해당한다. ‘대기근 시대’(1845~52)에 아메리카로 이주한 아일랜드계는 대기근이 자연재해가 아니라, 정치적 차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단체들은 적극적으로 평화 협상을 지원하고, 적절한 투자 환경 조성을 요구했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은 미국이 영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개입할 수 있게 했다. 1994년 1월 미국이 북아일랜드 민족파 지도자 게리 애덤스에게 비자를 발급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애덤스는 IRA 전사 출신이다. 오랜 투옥 경험이 있고, 영국은 그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했다. 애덤스는 제도권 내 합법적 투쟁을 위해 만든 신페인당의 대표였다. 영국은 미국의 비자 발급을 강력히 비난했다. 그러나 애덤스의 미국 방문 이후인 8월 IRA가 정전을 선언했다.
그리고 북아일랜드 평화회담 특사로 조지 미첼 전 상원의원을 임명했다. ‘성 금요일 협정’은 그의 헌신적인 중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마련한 협상 초안이 협정문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훗날 자신의 가장 중요한 협상 기술은 ‘침묵’이었다고 털어놨다. 상반되는 주장을 듣고, 또 듣고, 또 들었다. 그 과정을 통해 충분한 합의를 도출했다. 그리고 미첼은 대화가 비틀거려도 결정적으로 넘어지는 것을 막았다. 협상이 끝난 뒤 그는 “지난 2년 동안 단순히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 되었다. 왜냐하면 합의 없이 대화가 중단되면 즉각 폭력이 재개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협상이 이뤄지는 2년 동안 부침이 있었다. 무장단체의 정전 약속은 쉽게 깨졌고, 상층의 합의는 자주 휴지 조각으로 변했다. 기약할 수 없는 협상의 나날에서, 인내심으로 가느다란 대화를 이어갈 때, 절망과 분노의 폭탄이 터졌다. 무고한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새로운 분노가 더해졌다. 그러나 협상의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미첼은 ‘인내’를 협상의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다.
영국의 정치적 변화도 중요한 계기였다. 1997년 7월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국내 보수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적극적으로 협상에 개입할 수 있게 되었다. 통합파들이 폭력 사태에 연루된 정치인의 배제를 요구했을 때, 다시 말해 신페인당의 게리 애덤스를 빼라고 했을 때, 블레어는 단호히 거부했다. 갈등의 핵심 당사자를 제외한 채 평화를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럽연합(EU)도 적극 나섰다. 1994년 IRA가 정전을 선언하자, EU는 북아일랜드 평화와 경제성장을 위해 2억5천만파운드 지원을 결정했다.

모호함, 강경파 설득하기 위한 명분

갈등 당사자들의 협상 의지도 중요하다. 통합파들은 북아일랜드의 인구 구성 변화를 주목했다. 한때 신교도가 60%에 달했으나, 1990년대 후반에 53%까지 떨어졌다. 폭력으로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 민족파 내부의 강경파와 온건파 사이에 비밀협상이 시작됐다. 바로 IRA와 연결된 신페인당과 온건민족파인 사회민주노동당 사이의 대화다. 경제계의 요구도 있었다. 상공회의소, 산업연맹 그리고 대형 노동조합들이 연대해 전쟁 종식과 정치 협상을 촉구했다. 이들은 통합파와 신페인당 모두에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성 금요일 협정’은 다자협정이다.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북아일랜드의 8개 정파가 참여했다. 합의 내용은 폭넓고 자세하다. 협정문은 65쪽에 이른다. 우선적으로 북아일랜드의 의회 구성, 정부 구조 등을 제시했다. 선거 일정과 선출 방식도 명시했다. 그리고 남북 아일랜드의 장관급 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상호협력을 위해 1년에 두 번 열린다. 농업·교육·교통물류·환경·관광·사회보장 등 관련 분야의 협력을 모색하고 필요한 사법적 공조를 논의한다. 그리고 EU와의 협력 방안도 논의한다. 북아일랜드에서 통합파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당장 남북 통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낮은 단계의 국가 연합을 모색한 것이다.
몇 가지 쟁점은 ‘건설적 모호성’으로 남겨두었다. 증오의 세월이 길었기에, 합의가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협상은 일방적이 아니다. 서로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쟁점도 분명히 있다. 그럴 때 ‘모호함’이 필요하다. 모호함은 각 진영의 강경파를 설득하기 위한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협상 대표들이 내부 이견을 조율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통합파와 민족파, 양 진영에서 특히 온건파의 역할이 중요했다. 바로 사회민주노동당 당수인 존 흄과 얼스터통합당 데이비드 트림블이 그들이다. 그들은 ‘성 금요일 협정’의 성과를 평가받아, 1998년 10월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협상 상대와 내부 강경파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온건 합리주의자들의 역할은 매우 크다. 상대와의 타협과 내부 요구를 절충할 줄 알아야 한다. 모호함은 타협의 산물이다.
당연히 모호함은 해석의 차이를 가져온다. 특히 ‘분쟁 당사자들은 무력 사용을 중지하고, 2년 이내에 무장을 해제한다’는 조항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IRA의 일부 강경파는 이 문항을 굴복이라 여기고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다수가 협정을 지지했다. ‘성 금요일 협정’에 관해 국민투표가 이루어졌고, 북아일랜드의 71%, 아일랜드공화국의 94%가 찬성했다. 모호함은 이후의 과제고, 여백이다. 모호함은 이후 협력적 상호작용이 있어야 구체화된다. 지금은 합의할 수 없지만 앞으로의 협력 과정을 통해 합의 수준이 점점 더 구체화되는 것이다.

갈등의 골 깊다고 포기하지 마라

‘성 금요일 협정’이 맺어진 지 15년이 흘렀다. “우리가 무엇에 반대하는지는 알기 쉽지만, 진심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렵다.” 켄 로치 감독의 영화 에 나오는 대사다. 평화는 전쟁보다 어렵다. 협정 이후 후퇴도 있었다. 증오가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온건파를 제치고 강경파가 앞에 나서기도 했다. 평화란 그렇게 깨지기 쉽다. 평화는 아직도 멀다. 그러나 북아일랜드에서 신뢰 형성과 협력이 이루어지면서, 그리고 화해의 과정이 시작되면서 강경파의 입지는 줄어들고 있다. 차별을 줄이고 장벽을 허무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주의 자유와 협력 확대로 ‘사실상의 통일’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식민주의와 분단의 역사라는 점에서 아일랜드와 한반도는 공통성이 적지 않다. 갈등의 골이 깊다고 포기하지 마라. 북아일랜드 평화 협상의 교훈이다.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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