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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유기농을 살다



지천에 널린 파파야, 알로에 칵테일, 피망밥… 에콰도르에서 천연 재료로 직접 만든 유기농 식단
등록 2010-12-15 02:22 수정 2020-05-02 19:26

에콰도르 투미아누마 마을 사람들은 ‘유기농’(Organic)이란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지만 이들의 삶 자체가 유기농이다. 동네에는 제대로 된 슈퍼마켓이 없어 거의 자급자족으로 살아간다. 다리오는 사춘기 소년 카를로스가 알려준 치즈만들기를 해보고 싶어 동네에서 유일하게 젖소를 키우는 아주머니를 찾아갔다. 우유통이 따로 없기 때문에 통을 가져가야만 우유를 받아올 수 있었다. 마치 ‘세련된’ 현대사회의 친환경운동의 한 예인 것 같지만, 그들은 평생 이렇게 살아왔다.
다리오는 가져온 우유를 발효시키고 허브의 일종인 생오레가노를 넣어 맛있는 치즈를 완성했다. 치즈 보관하는 데 바나나 잎만큼 좋은 것이 없다. 올리브유 대신 버터에 잘게 썬 마늘과 마당 한쪽에서 잡초처럼 자라는 바질을 넣으면 훌륭한 ‘페스토 소스’의 대안이 된다. 자연은 내게 언제나 좋은 영감을 주고 선생이 돼주었다. 이곳에는 마케팅 수단의 ‘오가닉’이 아닌, 그들이 직접 재배한 천연 식재료의 제대로 된 오가닉이 있었다.

마침 피망이 풍년이라 신선한 피망을 마음껏 즐겼다. 투미아누마 마을 사람들과 피망을 수확한 뒤 휴식을 취하는 지.지와 다리오 제공

마침 피망이 풍년이라 신선한 피망을 마음껏 즐겼다. 투미아누마 마을 사람들과 피망을 수확한 뒤 휴식을 취하는 지.지와 다리오 제공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쓰디쓴 알로에 조각에 레몬 둘세(Lemon Dulce·오렌지만 한 크기의 달콤한 레몬)를 세 개 정도 손으로 짜넣고, 파넬라(Panela·사탕수수물을 끓인 정제되지 않은 설탕)를 한 숟가락 섞어 만든 ‘알로에 칵테일’을 마셨다. 하루 필요량의 비타민C가 내 몸에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천연 항생제 역할을 한다는 파파야는 남미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다. 다리오는 숲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노르스름한 파파야를 서너 개씩 따왔다. 흔해빠진 것이 바나나였다. 미처 다 먹지 못하고 남은 바나나는 우리가 돌보는 말 ‘만시토’(Mansito·스페인어로 ‘순둥이’라는 뜻)에게 주었다. 유난히 낯을 많이 가리는 만시토지만 바나나의 유혹은 뿌리칠 수 없었는지, 멀리서 나를 보면 조용히 다가오곤 했다. 처음 라파엘 아저씨의 부탁으로 바나나를 따러 갔을 땐 하늘 높이 달린 바나나를 어떻게 따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라파엘 아저씨는 ‘키가 5m 이상 되는 바나나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농담까지 했지만, 바나나 따는 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냥 나무 중간을 잘라버리면 된다. 아직 설 익어 푸른색을 띨 때 따서 자루에 넣어 응달에 걸어놓으면 일주일 뒤 노랗고 뽀얀 바나나를 맛볼 수 있다.

부엌에는 언제나 과일과 채소가 넘쳤다. 밥을 지을 때마다 불을 피워야 하기 때문에 한 끼 준비하는 시간이 배로 들지만 3~4일이 지나자 혼자서도 거뜬히 불을 지펴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은 언제나 새로운 기술을 하나씩 가르쳐준다. 피망이 풍년이라 끼니 때마다 신선한 피망을 먹었는데, 기름에 볶기도 하고 국을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 피망밥도 지었다. 나는 태어나서 그렇게 과육이 두꺼운 피망을 먹어본 적이 없으며, 그 천연이 가진 신선하고 달짝지근한 맛은 우리가 창작한 요리의 최고 재료가 되었다.

슬로푸드, 슬로라이프… 사람들은 웰빙하는 방법으로 ‘느림’을 제안한다. 이곳에선 애초에 빨리 할 수 없었다. 다리오는 원래 차분하고 느긋한 성격이지만, 나는 그 반대다. 다리오는 무엇인가를 만들 때도 언제나 신중하고 천천히 하지만, 나는 빨리 해치우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느린 삶이 불편한 것은 아니다. 이곳은 결과보다는 과정이 재미있는 곳이다. 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는 것은 재미있다. 그래서 배가 고프기 전에 천천히 과정을 즐기면서 요리를 해야 한다. 과일을 먹기 위해 장대를 가져가서 과일을 따오는 과정은 과일을 먹는 것보다 더 즐겁다. 그 어느 것 하나도 그 과정에서 ‘내’가 빠지지 않는다.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장만한 30자루의 초는 우리의 밤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장식품이었다. 촛불은 어두운 밤 우리의 공간을 가득 채워주었다. 우리의 눈은 침침한 촛불에도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익숙해졌다. 오솔길을 30분만 걸으면 물놀이할 수 있는 신선한 계곡이 나왔다. 가끔 일이 없는 만시토를 타고 오솔길을 산책했다. 만시토는 이름대로 순한 말이라 나를 위해 아주 천천히 걸었다. 나는 부자였다. 맛있는 과일들은 먹고 먹어도 끝이 없었고 화창한 날씨는 나를 빛나게 했다.

지와 다리오 ‘배꼽 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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