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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만 나오면 ‘자아분열’

등록 2006-10-21 00:00 수정 2020-05-03 04:24

한글만이 공식언어인 국가의 한쪽에서 한문이 문화 자본으로 대물림되는 현실…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의 한글 전용 밀어붙이기는 왜 실패할 수 밖에 없었나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약 10년 전에 필자의 한 지인이 자신의 갓난아이에게 순 한글 이름을 지어준 일이 있었다. 그에게 “한자 이름을 지을까, 순 한글 이름을 지을까 고민을 많이 하셨느냐”고 물었는데, 대답은 의외였다. “한자 이름? 요즘 그런 이름을 아이에게 주면 매국노 소리밖에 들을 것 또 있나?” 그 자신도 일본어를 필요로 하는 업무상 한자를 잘 알았고, 또 지금은 순 한글 이름을 가진 아들에게 사적으로 한자를 가르치게 하고 있기도 하다.

말하자면, 현실상 한자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지만, 당위적으로 ‘중국글’에 대해서 적당한 배타심 역시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한자를 보는 우리의 이율배반적 시각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순한문투의 ‘순 우리말 신문’

한편으로는 1998~2005년에 한자검정능력시험의 응시자 수가 3만5천 명에서 100만여 명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등 한국 상류층과 중상층 상부에게 요즘 한자란 영어와 마찬가지로 자녀 조기교육의 필수항목이 됐다. 또 한편으로는 원칙상 여전히 ‘국문’이 한글 전용을 뜻하는 것이고, 공교육 체계에서 한문 교육이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돼 있다. 우리에게 한글날이 있지만, 원효부터 20세기의 다석 유영모(1890~1981)까지 세계에 내놓을 만한 한국의 철학 사상이 한문 없이 이해될 수 없음에도 ‘한문 문화의 날’을 제정하자는 제안을 내놓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아 분열이라 할까? 한국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자녀만큼은 당연히 돈을 들여 한문 솜씨라는 문화 자본이 대물림되게끔 하지만, 공식 담론상으로는 오로지 ‘국문’만이 국민 공동체의 공식 언어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피지배자들의 공교육을 통한 충분한 한문 익히기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한문 문제에서는 근대 한국 지배자들의 선언과 그들도 잘 알고 있던 언어생활의 현실은 늘 달랐다. 우리가 통상 을 ‘최초의 순 우리말 신문’이라고 보지 않는가? 말과 글이 서로 같은 미국의 신문에서 시사점을 얻은 서재필이 언문일치의 당위대로 에서 한자를 배제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신문이 한문투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예문을 감상해보시기를.

“강한 군사 되는 근본은 첫째는 죽는 것을 두려워 아니하고 쇄골분신되더라도 도적들에게 쫓겨 (…) 도망질 아니하는 것이라 (…) 만일 한 동관이 경계 없는 일을 행하거든 이 동관을 조용히 불러 이치를 따져 말을 하여 효유해주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상관에게 말하여 군중 법률로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다.”(‘논설’, 1896년 7월9일)

‘쇄골분신’(碎骨粉身·자진해 자신을 희생시킴), ‘효유’(曉諭·깨닫도록 일러줌)와 같은 구식 한문 표현들이나, 일본 계통의 ‘동관’(同官), ‘법률’과 같은 단어들을 순 한글로 적는다고 해서 그 구성 한자의 의미를 몰랐던 다수의 조선 평민들이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서재필이 희망했던 언문일치를 그 당시의 조선에서 제대로 실현하자면, 조선인 다수에게 생소했던 한문 계통의 단어를 좀더 친숙한 순 조선어 단어로 바꿔서 쓰거나, 65% 이상의 아이들이 소학교에 다니고 있던 당시의 일본처럼 다수의 조선인에게 기초 한자를 익히게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일만큼의 교육 발달도 당장 이루지 못하고, 그렇다고 한자 계통의 고등 어휘를 ‘순 조선화’할 수도 없었던 서재필과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국문’을 외쳐봐야 결국 한자어를 한글로 적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한자 폐지안, 일본에선 좌절되다

재미있게도, 대한제국 시기 초기의 보다 1907~10년 의 국문판이 훨씬 더 한문투에 옭매여 있었다. 물론 한글 전용 신문의 출현이 새로운 문명의 도입과 시민 공동체 만들기에 하나의 디딤돌이 됐지만, 그 신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한문 지식이 어차피 절실히 필요했기에 개화기·식민지 시기 동안 한문 서당에 다니는 인구는 오히려 늘어나기만 했다. 언문일치의 이념만 가지고는, 전통 사회의 고등 어휘를 담당했던 한자가 근대적 개념의 동아시아적 소화의 기능을 맡게 되는 현실을 타개할 수 없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봉건적이며 비과학적인’ 한자의 씨를 한·일 양국에서 말리겠다는 미국인들이 남한을 통치하게 됐다. 미 군정청의 학무국은 최현배(1894~1970) 선생과 같은 기독교 계통의 한글 전용론자를 상당수 기용해 그들에게 언어정책을 맡겼다. 미군정 시기에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이 먼저 발표된 뒤 이승만 정권이 1948년 10월9일 한글날에 ‘한글 전용법’을 공포해 미군정의 조치를 재확인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군의 점령하에 있던 일본에서도 추진됐다가 지식인의 저항에 부딪쳐 좌절된 ‘한자 폐지안’이 남한에서는 성공한 셈이다.

문제는 역시 이념에 복종되지 않는 현실이었다. 1950년대 내내 이승만 정권의 내각에서 한글 전용에 관한 각종 실천요강들을 채택해 공포했지만 1950년대 말에도 신문 지상 전체 문자의 약 38%에 달하는 한자 사용 빈도는 실제로는 식민지 말기에 비해 전혀 줄지도 않았다. 원칙상은 모두 쉬운 한글을 쓰는 평등한 ‘국민’이 됐지만, 실질적으로는 문화생활을 영위하려는 이들은 각급 학교의 필수 한자 교육 이상의 한문 교육을 사적으로 받아야 했다. 1970년부터 호적과 민원서류를 한글화하고 한자 간판에 대해서까지 단속을 벌이는 등 병영국가 지향의 박정희 정권이 이승만에 비해 ‘언어 국민화’ 정책을 더 강경하게 밀고 나갔지만, 역시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박정희가 그렇게도 좋아했던 충효사상을 보급하기 위해서라도 한자의 이해가 필요했던데다 ‘경제 기적’의 비결 중 하나가 대일 수출입과 기술제휴였기에 일본어 학습을 위해서도 한자가 절실했다.

결국 학교에서 일본어가 제2외국어로 등장한 1972~73년부터 필수과목으로서의 한문교과가 국어과목에서 독립되어 신설됐다. ‘국적이 있는 교육’에 대한 열이 식어 한문이 영어 등에 밀려 선택과목이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지만, 모든 정책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엘리트 전문가 집단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사적으로라도 한자 실력을 닦지 않을 수 없었다. 한글 전용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동안 일본을 통해 수입해온 한자 어휘를 다 없앨 수 없지 않는가?

한문 교육 의무화가 낫지 않나

어떤 특정 이념이 국가와 시민사회가 함께 추진하는 일관적인 정책에 뒷받침되면 현실의 일부분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1970년대 이후 국가의 한글 전용 정책과 한글 전용을 지향했던 민주화 운동의 노력의 결과는, 신문 등 매체의 언어는 일반적 학력의 소유자가 한자 없이도 쉽게 인지할 수 있을 만큼 한글 전용 형태로 정형화됐다. 그런데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한자 교육에 대한 넓은 의미의 사회적 필요성은 오히려 증대했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민족주의적 이념의 허상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이 필요성을 솔직히 인정해 중·고등학교의 한문 교육을 필수화하고 대폭 강화하는 공교육 내실화 정책을 통해 빈부격차가 한자 실력의 차이로 연결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참고 문헌:

1. 허만길, , 국학자료원, 1994.

2. 최현배, , 정음사, 1970.

3. 히다 요시후미(飛田良文), ‘일본에서의 한자 문제’, 제1권 제4호, 88~102쪽, 1991.

4. 채백, ,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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