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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사민주의가 필요한 이유

등록 2007-08-16 15:00 수정 2020-05-02 19:25

무상교육·노동자 경영참여 등 1956년 조봉암의 정책도 실현되지 못해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동구권이 몰락한 뒤로 1980년대 후반 국내 혁명적 급진주의 진영은 몇 가지 노선으로 갈라졌다. 소수는 서구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선례를 참고해 국제주의적 혁명 노선에 들어섰지만, 다수는 미 제국에 대한 혐오감에 휩쓸려 이북의 ‘민족 자주’를 지표로 삼았거나, 동구권과 달리 몰락하지 않는 북구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운동들이나 복지 국가를 현실적 모델로 삼아 기존 체제 안에서 변혁의 길을 택했다. 체제 안에서의 변혁 노선을 택한 이들이 비록 원론적으로 ‘사민주의 한계 극복’을 이야기하지만, 그 현실적 정책 비전은 넓은 의미의 사민주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사민주의적 선택에 장단점이 있지만, 그들의 선택에는 우선 이해가 간다.

부양가족이 없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운 월 36만원 정도의 급여를 받는 등 복지제도가 한국에서 거의 없다시피 한데다 국내외에서 ‘혁명적 상황’이 가까운 시일 내에 만들어지지 않을 듯한 정세이기에, ‘혁명’을 당분간 유보하고 복지주의적 사회로의 ‘변혁’에 골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최종적 목표를 망각하면 큰일이지만, 좋은 의미에서 ‘개량주의’는 이 단계에서 전략·전술상 필요하다.

‘애국적 병사’와 연대한 일본 사민주의자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사민주의적 개혁의 전제 조건이 사민주의적 대중 정당과 노조의 투쟁으로 얻어내는 부르주아 계급의 제도적 ‘양보’인데, 이 양보를 얻어낼 만한 힘이 개혁가들에게 확보돼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개량’ 작업을 벌이려고 집권하거나 기존의 정계에 진출한 사민주의적 정당이 체제와의 긴장을 잃어 아예 원칙까지도 ‘타협을 위한 희생’으로 삼을 정도로 체제에 포획돼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이야기지만, 20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보면 사민주의 세력들이 이 두 문제에 좌초돼 방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양보를 따낼 만한 세력 규합도 거의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지만, 개량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원칙을 희생시킬 정도의 너무나 큰 양보들을 국가와 자본에 먼저 하곤 했다.

일본 사회주의 노동운동에서는 1924년부터 공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이 갈라서게 됐다. 공산주의자들은 비합법적으로 활동하면서 검거·투옥·전향 공작의 대상이 됐지만, 사민주의자들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각종 선거에 출마하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다. 1928년 총선에서 사민주의자들은 전체 표의 4.7%를 득표해 466석 중 8석을 얻었다. 그런데 두 정당으로 분열되는 내분으로 의석 수가 그 뒤로 몇 년간 줄어들기만 하는 등 정치적 소수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31년 만주 침략 이후로는 자꾸만 전쟁 광풍에 휩쓸렸다. 소수 정치 세력으로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추구하는 상황이다 보니 체제에 압력을 넣는 것보다는 오히려 체제가 내세우는 조건을 다 받아들여 타협을 무조건 추구하는 꼴이 되는데, 체제의 가장 우선적 조건은 ‘총력 전쟁에의 협력’이었다. 노조 간부들과 기독교 지식인들이 주도했던 사회민중당이 1931년 만주 침략을 반대했다가 바로 그 다음해에 그 후신 정당인 사회대중당은 만주 침략에 대한 반대를 싹 빼버리고 말았다. 1933년에 이르러 ‘국가의 신성한 가치’를 거의 내면화한 사회대중당은 아예 ‘이기적인 계급 이익’을 비난하고 ‘국민의 영구성’을 내세웠다. ‘국민 생계 문제 해결’을 내건 사회대중당은 1937년 총선에서 9%를 득표해 37명의 국회의원을 확보했지만 그들이 이야기하는 국민은 중국 형제들과 손을 잡아 같이 투쟁할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국 침략에 총알받이로 나설 ‘애국적 병사’들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민초들의 전선 동원에 적극적으로 나서 파시스트 국가와 거의 동질화된 사회대중당의 사민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체제 안에서의 개량은 불가피한 선택일지라도 국가가 이용하는 ‘국민’ 담론을 사회주의자들이 받아들여 자본과의 ‘국민적 타협’을 시도하는 순간에 ‘악마와의 거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과연 지금 대한민국의 진보 운동가들이, 현 정부가 범죄적으로 이라크에 파병한 군인 중 희생이 있는 경우에라도 ‘우리 국민’의 편을 무조건 드는 대신 미 제국과 어려운 전투를 벌이는 이라크 독립운동가들을 이해해주는 국제주의적이며 노동계급다운 자세를 취할 수 있을까? 갈수록 한국 군대가 미 제국을 위한 총알받이로 이용되는 건수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이는 더 이상 탁상공론이 아니다. 체제 안에서의 개량을 당분간 추구한다 해도 한국의 반예속적 부르주아 지배체제가 들러리로 끼어들게 되는 각종 국제적 살육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취할 필요가 있다.

‘삼균주의’ 주장한 조소앙의 변화

보통 사민주의는 계급혁명을 당분간 내지는 예측 가능한 장래에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린 급진주의자 출신들이 하게 돼 있는데, 1930∼40년대 조선의 경우에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사민주의를 방불케 하는 미래 구상들을 내놓는 경우가 있었다. 1920년 후반 공산주의자들의 반종교 운동이라는 공격에 당황한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의 공산당원에 의해서 1억4천만 명의 평민이 지배를 받는 공산주의 독재 국가 소련”을 비판하고 소련식 공산주의의 대안으로 “기독교적 사회주의와 평화적인 점차적 개혁”을 내세우는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1930년대에 민족주의 세력들을 규합하려 했던 유림 출신의 민족주의자 조소앙(1887∼1958)은 ‘삼균주의’라는 이념을 창출해 공산주의를 나름대로 지양해보려 했다. 보편주의적 지향과 종교성이 강한 조소앙은 정치의 궁극적 목표로 ‘사해일가’(四海一家·전세계의 평화적 통일)를 정해놓고 일제의 마수로부터 조선을 되찾고 나서 정치·경제·교육을 다 고르게 하자(三均·세 가지 고르게 하기)는 의미에서 토지와 대규모 생산시설의 국유화, 그리고 무상 의무교육을 새 나라의 국시로 제시했다.

1941년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에까지 수록된 이 요구는 지금도 급진적으로 들린다. 과연 광복 이후에는 조소앙이 그 실천을 어떻게 추구했는가? 광복된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에 조소앙은 “영국의 노동당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을 지향한다”고 기염을 토하곤 했는데, 국내 정치판에서 쓰라림을 많이 겪고 나서는 가시적으로 온건화됐다. 그가 창당해 이끈 사회당은 ‘결당대회 선언서’(1948년 12월)에서 ‘민족자본의 축적’을 사회의 목표로 인정한데다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사비 부담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6·25 전쟁을 앞둔 조소앙은 영국 노동당을 능가할 생각을 버리고 ‘영국 노동당의 사회 개혁 작업’을 따라야 할 모범으로 제시했다.

그가 이처럼 온건화된 이유는 간단했다. 진보적 노조들이 파괴·와해되고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할 정도로 어용적 성격이 강한 대한노총이 노동운동의 영역을 독점하는 상황에서는, 사민주의자가 권력에 압력을 넣을 만한 대중운동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조소앙은 전쟁통에 납북돼 김일성 정권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중립화 통일 방안’을 내세워 단식 투쟁하다가 죽었고, 비슷한 사민주의적 노선을 걸었던 여운형(1886∼1947)은 ‘파업 자제’ 당부로 진보적 노동자들의 지지를 거의 잃은 채 극우파의 손에 암살됐다. 지배자들이 대중에게 양보가 아닌 학살로 대응하고, 좌절한 대중이 당분간 조직적 투쟁을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사민주의자들의 운명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가장 성공적 사민주의 정치인은 아마도 조봉암(1898∼1959)이었을 것이다. 1956년 다양한 배경을 가진 진보 인사들을 ‘사민주의’라는 화두로 규합해 진보당을 만든 그는, ‘소련의 세계 침략’을 규탄해 ‘자유 진영의 보루 미국’에 대한 충성을 다짐할 만큼, 그리고 대규모 기간시설의 국유화를 주장해도 중소기업의 육성을 요구할 만큼 ‘온건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조봉암은 1956년 5월15일 대선에서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건다. 그 결과 그는 23.8%의 표를 얻어 정계를 당황케 했다. 그는 ‘냉전적 사민주의’라는 한계에도 관료집단과 독점자본 위주의 한국 정치 패러다임 전체를 확 바꿀 만한 사람이기도 했다. 위험을 알아챈 이승만 정권은 용공 조작이라는 낯익은 수법으로 1958∼59년에 진보당을 해체시키고 조봉암을 ‘법살’(法殺)했다. 한국적 사민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시킨 조봉암을 옹호해 구원해낼 만한 힘을 가진 대중적인 사민주의 운동은 당시에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대한노총 지도자들이 조봉암을 두둔하기는커녕 그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섰을 정도였다.

국민주의·민족주의의 함정을 피하라

조봉암이 이야기했던 무상교육제도나 노동자 경영 참여 등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좋은 의미의 ‘개량’은 지금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개량이 성공적으로 이뤄져 우리가 그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려면 사민주의적 개혁가들은 국민주의나 민족주의와 같은 함정들을 피하는 한편, 비정규직을 비롯한 광범위한 ‘피해 대중’들의 조합화·조직화를 해야 하고, 이를 통해 튼튼한 운동적 기반을 다지고 급진적 노동투쟁의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그래야 자본과 국가에 압력을 넣어 의미 있는 ‘양보’를 따낼 수 있다.

참고 문헌

1. 강명숙, 백산자료원, 1999, 60∼82, 194∼246쪽
2. 김기승, 지영사, 2003, 193∼315쪽.
3. 서중석, 상권, 역사비평사, 1999, 309∼454쪽.
4.〈Labor and Imperial Democracy in Prewar Japan〉 Andrew Gor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1, pp.12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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