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darkblue">명성황후·유관순 등 ‘남’의 남성에 희생당한 여성들만 내세우는 한국사… 남성 독재로부터 탈주와 해방을 모색한 옥단춘·강완숙·월매는 모르시는가</font>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역사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양성 불평등의 문제를 생각할 때 아쉬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 주위의 가장 성차별적 영역이 바로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다. 역사 기억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군사 부문에서 여성이 오래전부터 배제돼온 점도, 1차 자료부터 여성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점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자료가 비록 있어도 남성은 거의 자동적으로 여성 위에 올라오게 돼 있다.
예컨대 당대 중국 비평가들이 아무리 허난설헌(1563~89)을 동생 허균(1569~1618)보다 더 재능이 많은 시인으로 봤다 해도, 국내의 보편적인 의식은 허난설헌보다 허균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다. 허난설헌이나, 남편이 나를 버리려 한다면 굳이 그런 남편을 붙들 일도 없다는 ‘쿨한’ 발언으로 유명한 시인 호연재 김씨(1681~1722) 등은 ‘여류 문학’이라는 특수 범주 속으로 들어가게 돼 있고, 이 범주는 (당연히 남성에 의해 쓰여야 한다고 인식되는) 일반 문학에서 주변적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변사또를 능가했던 조선의 선비들
이들은 그나마 ‘작가’로서 대접을 받으니 다행이다. 남성이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등의 영역에서 족적을 남긴 여성이라면 대개 단순한 ‘희생자’로 보려는 시각이 강하다. “남의 나라 남성으로부터 우리 여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보호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수치이자 수난이다”식의 사고는 근대 민족주의의 근본적 틀이 아닌가? 그래서 명성황후 민비가 거의 20년 동안이나 국운을 좌우하던 사람이었음에도, ‘민비’라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것은 ‘우리’ 수난의 상징으로서 일인에 의한 시해, 즉 희생의 장면이다. 고향 친구들의 기억 속에서 어린 날의 유관순(1902~20)은 씩씩하고 장난기가 심한 골목대장으로 남아 있는데, 윤봉춘의 영화 (1959)이나 수많은 위인전들에 의해 만들어진 유관순의 보편적 이미지 역시 일인들에게 고통을 받아 장렬하게 죽은 민족 수난의 상징이었다. 물론 외침에 여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쯤은 상식이다. 그러나 ‘남’의 남성에 의해서 비참하게 희생되는 여성을 여성사 전체의 표상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여성이 희생의 대상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는 사회로 가는 길일까?
성리학에 기반을 둔 조선은 남성에 의한, 남성을 위한 나라이었지만, 한국사 속 가부장제의 심각성만을 부각시키는 역사 서술은 결국 여성의 주체화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우리나라가 본래 남존여비의 세상이고 여성들도 그 규범에 대충 순종했다”고 생각하면, 오늘날의 가부장적인 억압까지도 당연할지도 모를 ‘전통의 유산’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오히려 여성이 남성의 독재에 불가피하게 복종한다 해도 늘 그 틀 속에서 탈주·해방의 가능성을 모색했다는 점 등을 강조하는 서술은 오늘날 가부장제와의 투쟁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여성의 활동을 규제하는 악업들이 만들어졌음에도, 과연 여성들이 그 법들을 지키기라도 했던가? 세종 27년(1445)에 법으로 부녀자들의 사찰 왕래를 금하고, 에서 사찰에 갔다온 부녀자들에게 장(杖) 1백을 치도록 돼 있었으나 여성들의 신앙 생활 패턴은 여전했으며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서도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 때만 해도 한국 사찰에 별로 없었던 칠성각·산신각 등이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자녀 낳기를 비는 여성이라는 주된 고객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불교 쪽의 움직임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그만큼 가부장제 국가의 어떤 법도 조선 여성의 신앙심을 꺾을 수 없었다. 과연 이는 ‘희생’만의 역사인가?
기생제도는 보통 여성을 향락의 도구로 삼는 가부장제의 억압 기제로 묘사된다. 물론 이 제도가 여성들을 양반 ‘풍류’의 객체로 만들고 그 인권을 유린했음이 틀림없다. 조선 양반들을 고매한 선비로 보려는 시각이 일반적인데, 사실 수많은 ‘선비’들이 의 변사또보다 관가에 예속돼 있는 여성들에게 더 잔혹했다. 예컨대 영조 10년(1734)에 경상우병사 민창기가 이미 아이를 밴 기생과 성관계를 맺으려 했는데 기생이 이에 따르지 않자 혹독한 체벌을 가해 여자를 죽게 하고 말았다. 이 잔혹한 사건에 대한 양반 남성의 책임은? 기껏해야 파직 정도였다. 우리가 ‘남’에게 희생을 당한 명성황후나 유관순을 ‘우리 영웅’으로 생각하는데, 권력 가진 ‘우리’ 남성에게 희생을 당한 조선 여성들을 특별히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올바른 역사 인식인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서너 서방 거느리고 산 갑산의 기생
과연 조선의 기생들이 오로지 남성의 폭압에 희생만 당해왔던가. 문학작품을 통해서 본다면 그들의 모습은 훨씬 더 주체적이며 적극적이다. 경제적 빈궁함과 가부장적 억압의 한계를 자기 힘으로 극복하려 활기차게 뛰어들었다. 원칙상 기생의 면천(免賤), 즉 신분 해방은 임금의 특명만으로 가능했지만 퇴기 월매가 재력을 동원해 대비정속(代婢定屬), 즉 자기 집 여종을 대신 바치는 편법으로 자기 딸을 기생 명단에서 빼지 않았던가? 원칙상 기생이라 해도 동시에 몇 명의 남성에게 수청을 드는 것은, 일부다처는 돼도 일처다부는 되지 않는 조선에서는 ‘패륜’으로 여겼다. 시인 구강(1757~1832)의 을 보면, 곤궁한 삶을 극복하려고 동시에 “서너 서방 응당으로 아는”(거느리고 사는) 1812년께의 갑산 지역 기생의 모습이 보인다. 양반 구강이 보기에는, “오랑캐 풍속치고도 너무 심한” 일이었지만 가부장제적 족쇄에 비교적으로 덜 옭매여 있었던 함경도 여성의 입장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상황에 따라서 유교적인 규범도 진취적인 여성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예컨대 많은 면에서 과 닮은 18세기께의 고전소설 의 주인공인 평양 기생 옥단춘은 몸은 비록 기생 명단에 매여 있다 해도 자신을 ‘공부하고 수절하는 처녀’로 여겨 벼슬아치들이 수청을 요구해도 거절했다. 변사또 유형의 평양 감사 김진희가 옥단춘의 수청을 무조건 명령하자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보기 싫은 남성과의 접촉을 피했다. 대신에, 김 감사가 죽이려 하는 그의 죽마고우, 몰락 양반 이혈룡을 살려주어 그와 그 식솔들을 지원해주고 이혈룡이 과거에 급제할 수 있게끔 후원해준다. 결국, 에서처럼 암행어사로 평양에 온 이혈룡이 탐관 김진희를 엄벌하고 옥단춘과 같이 행복하게 살게 된다. 옥단춘은 이혈룡을 살려서 후원해주고 집에는 “천하의 모든 명화”, 온갖 고급 그림들을 걸어놓게 되는데 그 재력은 어떻게 창출됐을까.
기생의 신분을 벗어나 상인으로서 크게 출세해 제주도민들을 기아에서 구출해낸 ‘만덕할망’ 김만덕(1739~1812)은 너무나 유명하지만, 실제로 기생으로 남아 있는 여성들도 고급 연예인으로서 능력을 발휘해 상당한 재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18세기에 통신사로 남도 지방을 거쳐 일본으로 간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한 잔치에 불려온 수십 명의 기생들은 사신과 수령 등에게서 500냥 정도의 큰돈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기에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록에서도 가난한 남성의 재능을 알아채 그에게 물자를 주어 후원하여 출세시킨 ‘재산이 있고 지혜로운 기생’의 이야기가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강완숙을 ‘순교자’로만 보지 말라
폭력적인 위계질서로 이루어지는 남성 지배의 사회가, 전통 시대에도 식민화의 과정에서도 많은 여성들을 희생시킨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 그런데 희생만 강조되고 여성의 진취성과 활약, 자유분방과 탈주가 망각되면 여성이 주인공이자 주체가 되는 역사를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사를 빛낸 여성들에게 따라죽을 ‘순’(殉)자가 잘 붙는다. 유관순의 ‘순국’도 그렇지만, 가톨릭 최초의 순교자 중 한 사람인 골롬바 강완숙(1760~1801)도 그렇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받아도 끝까지 배교를 하지 않았던 강완숙의 헌신적 신앙심은 당연히 사람들을 감복시켰다. 그런데 필자 같으면, 이 ‘헌신’의 서사보다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던 남편을 과감히 떠나 혼자서 서울로 상경해 신앙 활동을 전개한 강완숙의 자립심 등을 오히려 더 부각시키고 싶다. 조선시대 여인으로서도 이처럼 가족의 올가미를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인식해야 진정한 의미의 여성주의적 역사 인식이 드디어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참고 문헌
1. 허경진, 푸른역사, 2003.
2. 허경진, 돌베개, 2002.
3. , 신원문화사, 2004.
4. 조광국, 월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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