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

신여성의 명암, 히라쓰카 라이초

제592호
등록 : 2006-01-05 00:00

크게 작게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나혜석과 김일엽의 ‘정조 부정론’에 영향 준 일본 잡지 <세이토>의 발행인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였으나 국가주의적 ‘페니스 파시즘’에 협조하기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우리가 쓰는 용어 중에서 ‘왜색’이라는 말은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제의 잔재인 체벌이나 두발 제한 등에는 그 기원에 대한 아픈 기억과 함께 왜색이라는 것이 이해되지만 간혹은 ‘그녀’와 같은 단어처럼 일본어를 모방했다는 식민지 시대의 신조어들까지 문제가 되기도 한다. 물론 왜색이 짙은 식민지 시대의 근대성이 제국주의의 폭력을 바탕으로 삼아 성립됐기에 이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런데 어두움이 있으므로 빛을 볼 수 있다는 변증법인가. 일본은 억압자로 기능한 동시에 공산주의 사상을 전해준 매개체이기도 했다.


나혜석 “혼외정사는 진보된 사람의 행동”

신채호가 “친일파가 이토 히로부미를 섬겼듯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일본 공산 운동의 이론가인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나 가타야마 센(片山潛)을 섬긴다”고 비판했으며, 조선 초기 공산 운동의 “소아병적 번역주의” 경향이 해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읽기 쉬운 일본어 저서가 없었다면 과연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겠는가. 1980년대 혁명시인 김남주는 옥중 서신에서 일본어를 배워서 사회과학 서적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일본산’ 내지 ‘일본발(發)’은 꼭 없애야 할 왜색으로만 봐야 할까?

김일엽(네모 안)과 나혜석의 새로운 정조론은 당시 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나혜석은 혼외 정사를 남편에게 들켜 이혼당한다. 파리에서의 나혜석과 김우영 부부.

해방적 의미의 한국의 근대에서 의미 있는 요소는 1920년대부터 나혜석(1896∼1948)과 김일엽(1896∼1971) 같은 급진파 신여성들이 주장했던 ‘새로운 정조론’이다. 여성을 가문의 부속물로 여겼던 유교 사회든, ‘현모양처’라는 이름으로 남편과 아이를 뒷바라지하게 만든 억압적 근대든, 모두 ‘정조’를 전가의 보도로 여겼다. 남성의 유곽 나들이는 ‘낭만’이지만 여성 정조의 여부는 ‘숙녀’와 ‘요부’를 나누는 잣대였다. 그러한 사회에서 나혜석과 김일엽 같은 이들이 “정조는 자유다. 밥을 먹고 싶을 때 밥을 먹고 떡을 먹고 싶을 때 떡을 먹듯이 정조를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오로지 내 선택이다”라고 외친 것은 혁명선언과 같았다. 선언만 한 게 아니라 그들의 생활까지도 그랬다. 유럽 여행 때 파리에서 최린(1878∼1958)과 사랑에 빠졌다가 남편에게 들켜 이혼을 당한 나혜석은 죄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배우자를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혼외 정사를 벌이는 것은 죄도 실수도 아닌 가장 진보된 사람의 행동일 뿐”이라는 도전장을 전남편과 조선 사회에 던졌던 것이다!

나혜석을 완전한 외톨이로 만들게 된 이 “사랑의 자유” 선언은 그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공개적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다. 실제로 남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 추구를 제대로 억제한 적이 없다. 남성에게 이름뿐인 일부일처제는 절대적인 가치도 아니고 부르주아 사회가 만들어낸 역사의 산물이다. 그런데 얼마 전 스와핑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볼 때 아직은 일부일처제와 정면 충돌해 그 범위를 공개적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나혜석과 같은 억압적인 정조에의 도전이 있기에 어쩌면 우리가 ‘도덕적 파시즘’에서 한 발짝 자유로워진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목사의 딸이었던 김일엽과, 보수적 기독교의 영향을 짙게 받은 나혜석이 과연 어떻게 20대 중반에 순결주의를 과감하게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일차적으로 그들의 저항은 남성들의 지배에 대한 현실적 대응의 차원에서 일어났지만 그들이 사용했던 ‘정조 부정론’과 같은 담론은 조선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여성해방 운동에서 차용된 것이었다.

혁신적 의제와 도전장 그 자체인 사생활

나혜석과 김일엽은 일본 유학 때 <세이토>(靑踏)라는 일본 최초의 페미니스트 잡지를 통해 여성 해방에 처음으로 눈뜨게 됐다. 나혜석이 평생 가장 사랑했던 문학 작품은 그가 1921년에 한국어로 번역·연재까지 한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이었다. 그는 자유를 향해 남편과 자녀를 두고 간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의 운명을 자신이 닮아간다고 느꼈다. 그런데 번역 텍스트는 1912년에 나왔던 일본어 번역이었으며, 그의 ‘노라’에 대한 이해에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인형의 집>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노라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다”라고 선언한 <세이토> 제3호이었다. 유학 초기 시절을 회고했을 때 나혜석이 “나에게 천재적인 이상을 심은 것은 <세이토>의 발행인 라이초(雷鳥) 여사였다”고 이야기했다. ‘정조와의 투쟁’의 선봉에 선 한국 여성에게 이렇게 영감을 준 이 일본 여성은 누구인가?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1886∼1971). 그 성장 과정으로 봐서는 그녀가 여성 해방 투사가 되리라 애당초에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정부의 감찰 기관인 검사원(檢査院)의 장까지 역임한 엄격한 아버지의 딸로 당시의 여성으로는 보기 드물게 대학까지 졸업한 고학력자였다. 그는 얼마든지 지체 좋은 신랑을 얻어 상류 계급의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사회주의가 일본 사회의 표면에 최초로 나타난 시기에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의 취미는 ‘불온 사상’이 아닌 암자에서의 조용한 참선이었다. 그런데 백척간두에 서서 얻어지는 궁극의 진실에 대한 애착이 강해 일요일마다 아이들에게 일왕의 조칙을 낭독하고 충효를 설교하는 아버지에게 역겨움을 느꼈고 대학을 졸업한 그의 생활은 탈선의 연속이었다. 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다가 이 소설을 높이 평가해준 유부남 교사와 사랑에 빠져 신문의 가십거리가 되는 등 파란을 겪었던 라이초는 1911년에 몇 명의 동지들과 함께 잡지 <세이토>를 만들어 여성 해방의 담론을 일본 역사상 최초로 펴냈다.

이 잡지 창간호에서 라이초의 사설은 “원시에 여성은 태양이었지만 (…) 지금 달이 됐다”는 문장으로 시작됐는데, 이 말은 그 이후로 일본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반영하듯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도 타율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현실을 라이초와 그 동지들은 격파하고자 했다.

라이초는 다섯 살 연하의 남자와 공개적으로 동거했다(왼쪽). 라이초는 노년에 반전 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다큐멘터리 <히라쓰카 라이초의 생애>의 한 장면.

1916년까지 나왔다가 폐간되고 만 동인지 <세이토>는 여성의 성에 대한 결정권, 여성의 가사 전담의 부당성, 아동 양육의 사회적 책임, 여성의 경제적 독립 필요성 등 그때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의제를 설정해 2천∼3천 부 팔리는 부수에 비해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매일 막강한 현실과 부딪혀야 했던 동인들은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간통을 찬양한다”는 이유(?)로 정간과 부수 압수, 잡지를 애독하는 학교 교사들의 파면과 학생 애독자의 학교 제명 조치, “여성을 타락시키는” 라이초에 대한 “죽이겠다”는 협박장과 돌팔매질 등이 이어졌다. 라이초의 과감한 발언들도 당시로서는 스캔들이었지만 다섯 살 적은 남자와의 공개적인 동거 생활과 형식적 결혼을 할 의사가 없다고 밝힌 그의 사생활은 도전장 그 자체였다. 1920년대에도 조선 최초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일본에서 여성의 투표권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라이초는 존경스러운 선배요 본보기였던 것이다.

가부장제의 극복, 페미니즘의 숙제

그런데 라이초와 조선 신여성들 사이의 공통점이 단순히 ‘정조’에 대한 회의론과 여성의 인격적·경제적 독립의 제창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라이초나 조선 신여성들이 남성의 지배를 개탄했지만 현실적으로 유산·유식 계급에 속하는 그들은 남성 지배의 제도적 보루인 국가를 떠나서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라이초는 “국가가 결혼을 통제하여 유전자가 나쁜 사람들의 결혼을 금지해야 한다”는 우생학적 관점에 섰고, 1930년대에 “여성들은 국가와 민족에의 봉사를 통해서만 인권 신장을 도모할 수 있다”고 하여 파시즘 체제에 협조했다는 오점을 남겼다. 또한 나혜석이나 김일엽 등 일부의 양심파를 제외한 조선의 많은 부르주아적 신여성들도 1930년대 초반부터 일제 침략전쟁의 선전꾼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라이초가 1945년 이후에 반전 평화운동 등에 적극 참여해 파시즘과의 협력에 어느 정도의 ‘속죄’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남성의 지배를 부정하면서도 계급지배와 국가를 부정하지 못한 한계는 남아 있다.

여성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려는 ‘페니스 파시즘’은 과연 정조나 현모양처를 강요하는 식으로만 나타나는가? 군인이 무표정하게 들고 있는 총에서도, 보행자를 압도하는 어마하게 높은 재벌의 빌딩에서도, 칼을 쥐고 공격적인 자세로 서 있는 ‘민족 영웅’의 동상에서도 여성성을 부정하고 짓밟는 파괴적 페니스의 그림자는 보인다. 가부장제의 극복, 국가·자본에서의 해방을 어떻게 함께 쟁취할 수 있는가는 한국, 일본 할 것 없이 인류 전체 페미니즘의 숙제가 아닌가?

참고 문헌

1. 최혜실 <신여성들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생각의나무, 2000.
2. 노영희 ‘나혜석의 동경 유학 체험과 신여성관’, <동아시아 비교 문학의 전망>, 동국대학교출판부, 2003.
3. Hiroko Tomida , Brill, 2004.
4. 요네다 사요코(米田佐代子) 이케다 에미코(池田惠美子), <‘세이토’를 공부하는 사람을 위해서>, 교토, 세계사상사, 1999.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