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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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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자, 군국주의자!

등록 2004-03-26 00:00 수정 2020-05-03 04:23

국가와 주군에 대한 일본식 희생정신을 ‘계몽’으로 여겼던 유길준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유길준(1856~1914). 한국 최초의 도일·도미 유학생이자 서구의 본격적인 백과사전적 소개서인 의 저자인 그는 해외 학위와 선진 지식을 주된 권위 획득 수단으로 삼는 남한의 ‘주류’에 의해서 선각자, 계몽의 선구자로 기려져왔다. 유길준에 대한 ‘선양’ 작업을 시작한 것은, 그를 ‘조선 민족의 모범적인 지도자’로 섬기고 그의 흥사단(1907년 설립) 이름까지도 본떠 사용한 근대 친미적 부르주아·지식인의 수장 안창호였다. 와 같은 사료에서 갑오 내각의 주요 인물이었던 유길준과 명성황후 시해의 관련성이 뚜렷하게 보이는 등 그의 행적이 결코 ‘모범적’이지만 않았음에도, 오늘날의 교과서에서는 그의 모습을 ‘근대화의 선구자’ ‘국민 계몽의 주역’ 등 긍정 일변도로 서술하고 있다.

‘경쟁’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수입하다

이 권위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도전은 10여년 전, 친일 문제에 천착했던 일군의 중견·소장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유길준이 이른바 ‘한일합방’ 때 일본 정부가 제시한 남작의 작호를 거절하는 일도 있었지만, 종합적으로 질풍노도의 개화기에 유길준 이상의 친일적 정치·사회계 거물도 없었으므로 그 도전의 명분은 충분했다. 그가 역할을 맡았던 갑오 내각의 자율성과 타율성에 대한 해묵은 논쟁이나 단발령과 같은 일본의 사주에 의한 폭거를 논외로 하더라도,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전국적인 추도회를 열거나 그가 1908년에 조직한 한성부민회의 차원에서 일본 고관들의 환영식에 학생과 주민들을 반강제적으로 동원한 것 등은 추악한 행각임에 틀림없다.

거시적으로 그의 일본 망명으로부터의 귀국(1907년) 이후의 기본 방침인 ‘식산흥업과 교육에의 헌신, 정치에의 불참’은 곧 닥쳐올 일제 시대의 토착 엘리트(친일파)의 이데올로기인 현실 순응적인 ‘실력양성론’과 ‘일본 지도하의 몽매한 조선의 문명화’의 청사진이었다.

그렇다면 현대 한국의 막강한 ‘해외 유학파’의 원조, 유길준을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가? ‘계몽의 선구자’라는 긍정 일변도 평가에다 ‘친일적 행각’의 지적을 추가하여 “근대 국민 계몽의 주역이 정치적으로 잘못된 길로 갔다”는 식의 ‘공과론’(功過論)을 펼쳐야 하는가? 관제 우파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는 그의 친일 행각은 ‘옥의 티’이고, 그의 ‘계몽’은 공로 중의 공로일 것이다. ‘경쟁’이라는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를 ‘경쟁론’이라는 글을 통해서 1883년에 최초로 조선에 도입한 사람은 유길준이었고, 박정희의 외자 도입에 의한 경제 개발 프로젝트를 마치 예견하듯이 경제 발전을 위한 일본의 대규모 차관을 들이려고 한 사람들도 바로 어윤중·유길준 등의 ‘실무 개화파’였다.

그런데 유길준의 ‘계몽적인’ 활동의 내용을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과연 우리에게 고마운 공로일 만한 근거가 있는가. 그를 일본과의 ‘협력’(즉, 부일 행각)으로 이끈 찬란한 ‘계몽’의 논리는 따지고 보면 오늘날의 민중들에게 훨씬 더 큰 문제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학교에서 달달 외워야 했던 교과서들이 칭송하는 그의 ‘계몽’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서 그가 쓴 ‘계몽 저술’ 하나를 한번 들여다보자. 그리고 서구 관련 일본 자료의 번안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등 ‘유길준 자신의 말’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유명한 말고 훨씬 덜 알려진 1908년 7월의 을 한번 훑어보자. 은 하층 노동자들이 다니는 개화기 사립 야간학교를 위한 50과의 수신(修身·요즘 식으로 ‘국민 윤리’) 교과서인데, ‘계몽의 영웅’ 유길준이 계몽의 대상인 민초들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이 책에 간단명료하게 잘 정리돼 있다.

“국가적 폭력은 천하에 가장 신성한 일”

계몽의 주체를 자처한 유길준이 노동자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이었는가. 이 책에서 서술되는 ‘인간의 도리와 권리와 의무 등’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제1과 사람)는 것은 서두에 실린 훈화이다. 그렇다면 그 위대한 ‘도리’는 과연 무엇인가. 다름 아닌 “신하와 백성이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는 것이 국가의 윤리적 기본이며, 귀천·상하의 차례가 있는 것이 사회의 윤리적 기본이다”라는 게 바로 사람과 짐승의 경계선을 긋는 ‘도리’다(제2과 사람의 도리). 여기까지 어릴 때에 을 외우고 자신을 유교학자로 생각해온 유길준의 유교적 의식의 발로라고 치자. 그런데 ‘사람의 의무’(제4과)에 대한 해석은 결코 공맹의 가르침만을 따르지 않는다. 유길준에 따르면 사람이 가장 신성하게 여겨야 할 두 가지 의무는 효도나 도(道)의 궁리가 아니고 바로 납세의 의무와 ‘징병에 의하여 군사가 되는 의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두 가지 ‘의무’ 중에서 유길준에게 더 중요한 것은 ‘군사 되는’ 의무인 듯하다. 그는 ‘임금과 나라를 위해 죽을 의무’를 강조하고(제9과 내 몸), 부국강병을 실시하는 국가를 위한 맹목적인 희생을 ‘영예’로 만들고(제11과 우리 임금), ‘하늘과 같은 국가’와 보잘것없는 개인을 대조시키는(제12과 우리나라) 등 자신의 동류들이 다스리는 ‘국가’를 위해서 노동자들이 피까지 바치기를 대단히 바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가 이 텍스트를 만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보자. 이 쓰이기 바로 1년 전에 명목상으로 징병제였던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서 강제 해산돼 ‘징병제’라는 말은 일개의 허사(虛辭)가 되고 말았다. 아니, 군대도 없는 보호국에서 무슨 ‘징병의 의무’와 ‘강병’을 들먹이는 것인가? ‘군대에 가서 임금을 위해서 죽는 일’을 강조하는 이 책을 읽다보면 혹시나 유길준이 조국을 식민화해나가는 일제 당국의 반발을 장려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 그가 칭송한 ‘순국’을 몸으로 실천했던 의병들에 대해서 “의병의 이름을 거짓으로 달고 도적의 일을 행하는 것은 충의도 용맹도 아니다”(제42과 용기)라고 못박은 이 책이, 일본에 대한 실질적인 저항을 고취하는 것이 아니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그는 ‘백발노인의 장수보다 소년 병사의 죽음이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이토록 선호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서구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진 유길준이 영국과 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적 입헌군주국을 ‘이상향’으로 여겼지만, 현실적인 모델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같은 후발 개발국이라는 차원에서 더 가깝고 그의 정치적인 후원자이던 메이지 일본이었다. 군국 일본에서 징병제 군대는 ‘선량한 황민’을 육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국민 만들기’ 기관이었으며, ‘국가와 천황’을 위한 ‘순사’(殉死)는 교과서와 신문 등을 통해서 전파되는 어용적인 이데올로기의 진수였다.

유길준은 이 끔찍한 구조를 모델로 삼아 한국인들도 ‘국가와 주군’에 대한 무조건적 일본식의 ‘희생 정신’을 가지는 것을 ‘계몽’이자 ‘문명’으로 여겼다. 그래서 군대 없는 나라에서 “군대에 가서 죽어라”는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식의 ‘근대’에 젖은 유길준에게 ‘군대’와 ‘순사’는 바로 문명의 최대 상징적 기호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유길준의 사상적 후예라 할 만한 이광수 등의 식민지의 엘리트적 ‘실력양성론자’들이 태평양전쟁 때 “조선인이여 입대하라!”며 광분했던 것은 결코 단순한 ‘영달을 위한 훼절’로만 설명할 수 없다. 그들에게 근대적인 국가적 폭력은 천하에 가장 신성한 일이었다.

누구를 위한 ‘계몽주의’였나

서구의 교과서적인 ‘자유’와 ‘권리’의 해석과 함께 일본의 생생한 군국주의적 경험을 도입하느라 왕성한 저술 활동을 벌인 ‘계몽주의자’ 유길준…. 물론 한국의 유교 문화를 폭넓게 이해하고 긍정했던 점이나 한글 보급에 주력했던 점, 끝까지 노골적인 강권(强權)보다 법에 의거한 국제 질서를 선호했던 점 등 많은 측면에서 유길준은 윤치호 등 동류의 친일적인 계몽주의자보다 상당히 긍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살육극으로 치달은 100년 전의 세계 체제의 중심부를 모방하려 했던 주변부 지식인으로서의 유길준은, 그 당시 서구와 일본에서 암처럼 번졌던 군국주의에 전염되지 않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즉, 그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유길준이라는 개인을 무조건 폄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교과서 등 청년의 의식을 좌우하는 권위적인 서술에서 그의 ‘계몽주의’가 어느 계급·계층을 위한, 그리고 어떤 모델에 의한, 어떤 가치 구조를 가진 운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다루어졌으면 한다. 그렇게 해야 유길준이 걸렸던 군국주의의 전염병이 우리에게까지 옮겨지지 않을 것이다.

[도움이 되는 저술]
1. 노동야학독본 - , 일조각, 1971, 제2권, 260~358쪽.
2. 이훈상, 구한말 노동야학의 성행과 유길준의 노동야학독본 - , 지식산업사, 1987, 743~778쪽.
3. 윤병희, 한성부민회에 관한 일고찰 - (서강대 동아연구소 발행), 제17집, 1989, 609~632쪽.
4. 유영익, , 일조각, 1990.
5. 김도형, 유성준·유만겸·유억겸- 유길준의 양면성을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 , 돌베개, 1993.
6. 허동현, 국사 교과서에 보이는 유길준 관련 서술의 문제점과 제언 - 16호 (2004. 3 간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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