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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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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센터는 누구 편?

성폭력 피해자 나 몰라라 하는 대학 내 성폭력 전담기구
등록 2018-05-15 07:37 수정 2020-05-02 19:28
지난해 6월 1인시위에 나선 이혜선씨의 모습. 팻말의 문구는 지웠다. 가해자로 지목된 고려대 지도교수는 이혜선씨가 들었던 이 팻말의 문구를 근거로 이씨를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류우종 기자

지난해 6월 1인시위에 나선 이혜선씨의 모습. 팻말의 문구는 지웠다. 가해자로 지목된 고려대 지도교수는 이혜선씨가 들었던 이 팻말의 문구를 근거로 이씨를 무고 및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류우종 기자

지난 5월9일 과 만난 이혜선(31)씨는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인정받지 못한 ‘반쪽짜리’ 피해자다. 그는 2016년 11월 고려대 대학원 재학 중에 지도교수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이듬해 1월 지도교수를 검찰에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고소했다▶바로가기(제1169호 ‘국회는 대나무숲-성추행과 논문’ 참조). 지난해 3월 경찰은 조사 결과 불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10월 증거불충분을 사유로 무혐의 처분했다. 당시 검찰은 이씨의 무고에 대해서도 혐의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휴학 승인 거부 등의 일로 이씨가 지도교수를 강요 및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고소한 사건 역시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항고와 재정신청도 기각됐다. 지도교수는 이씨를 무고 및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역고소를 했다.

성폭력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는 비율(1.9%, 2016 여성가족부 성폭력 실태 조사)이 현저히 낮고, 바늘귀를 통과한 성폭력 피해 사실마저 검찰 수사 과정에서 강력범죄 가운데 가장 높은 불기소 비율(51.6%, 2016 법무연수원 범죄백서)을 보이는 현실이 ‘미투 운동’의 과제로 등장한 지금, 이혜선씨 피해 경험에 대한 일련의 법적 판단은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씨는 개인적으로만 인정되고 법적으로는 부인된 ‘반쪽짜리’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민사소송을 준비 중이다. KBS 비정규직 직원에 대한 카메라 기자의 성추행 사건은 형사소송에서 무죄가 확정됐는데도, 지난 2월 민사소송에서 대법원이 피해자의 승소(위자료 600만원)를 확정했다.

이혜선씨는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인정하지 않는 곳이 또 하나 있다고 했다. 바로 고려대 안 성폭력사건 처리기구인 ‘성평등센터’다. 이혜선씨는 여성가족부와 교육부에 수차례 고려대 성평등센터가 피해자 보호 조처를 소홀히 했다는 내용으로 민원을 넣었다. 취재 결과 증거주의에 입각해 엄밀히 유무죄를 판단하는 사법기관과 달라야 할 성평등센터가 ‘수사권이 없다’ ‘물증이 없다’는 식으로 지도교수 변경이나 휴학 신청 등 피해자 보호 조처를 거절했다.

성평등센터가 제3자?

이혜선씨와 고려대 쪽의 설명, 그리고 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이혜선씨가 2017년 2월8일 성평등센터를 찾았을 때 전문상담사 ㄴ씨는 “당사자의 주장만 갖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해당 사안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며 “형사고소 결과가 나온 뒤에야 조사 결과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씨가 지도교수를 형사고소했고, 성평등센터는 형사고소를 내세워 모든 처리 절차를 중단했다. 사실상 검찰의 ‘증거불충분에 의한 무혐의’라는 견해와 똑같은 얘기였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이씨에게는 사활이 걸린 지도교수 변경 건에 대해서도 성평등센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지도교수 변경 신청서를 해당 교수에게서 받아달라는 이씨의 요청을 수락해 실제 서명을 받아줬던 성평등센터와는 180도 달라진 태도였다. 이씨는 “새로 지도교수를 맡아주겠다는 교수를 찾았지만, 교수 간 화합에 저해된다며 꺼리셨다. 공식 절차 이후에야 받아주실 수 있다고 해서, 학교 차원에서 공문을 하나 보내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피해자가 겪는 불이익을 막아야 할 성평등센터가 당연히 해줄 것이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새 지도교수 선임 문제로 이씨가 2017년 3월 교육부에 제기한 민원 회신에서 성평등센터는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를 정하는 방식은 학생 당사자가 자신이 연구하게 될 세부 전공과 연구 방향에 따라 지도를 받고자 하는 교수를 선택해 개별 요청을 하고 해당 교수가 이를 수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특별한 사정으로 지도교수를 변경하더라도 제3자는 개입할 수 없다”는 대학원 행정실과 같은 일반적인 원칙만을 밝혔다. 성폭력 피해자의 조력기관이어야 할 성평등센터가 스스로를 제3자로 규정한 것이다. 결국 이씨는 6월 1인시위를 하고 나서야 체육과 긴급교수회의를 통해 지도교수가 변경됐다.

고려대 관계자는 “성평등센터는 구속력이 없는 기관이기 때문에 구속력 있는 수사기관의 결정에 따른다는 게 절차법의 일반 원칙”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대학의 성폭력 예방과 처리 관련 내규에 사법 절차가 진행될 경우 조사를 중지한다는 규정은 없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경우 재판이나 수사기관의 구체적 절차가 진행된 경우 진정 사건을 각하한다(소송을 종료한다)는 규정을 두고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 성공회대 외래교수는 “공동체는 사법기관처럼 엄격한 증거주의를 택할 이유가 없다. 하물며 최근엔 법원도 증거가 없어도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이 있으면 인정하는 쪽으로 간다. 판단하기 어려우면 피해자를 위한 보호 조치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고려대처럼 대학 내 성폭력 처리기구가 피해자 보호에 실패하는 일은 흔하다. 구슬아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 위원장은 “성추행을 당하고 성균관대 양성평등센터를 방문했을 때 첫마디가 ‘왜 술 마셨어요?’라는 말이었다. 상담사의 전문성에 큰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대학성평등상담소협의회가 2015년 전국 95개 대학의 성폭력 전담기구 상담원을 설문조사한 결과, 현재 대학의 상담기구 종사자의 53.7%는 기간제 계약직이었다. 성폭력 상담과 사건처리 업무 전담 인력이 배치된 곳은 13.7%에 그쳤으며, 81.1% 대학에서는 성폭력 업무 담당자가 행정 업무나 일반상담을 겸하고 있었다. 상담기구 내 전문인력 부족(40.4%)이 제일 어려운 점으로 꼽혔다.

익명 신고자 신원 유출
지난 3월8일 ‘성균관대 미투위드유 특별위원회’가 출범했다. 연합뉴스

지난 3월8일 ‘성균관대 미투위드유 특별위원회’가 출범했다. 연합뉴스

성균관대 양성평등센터의 경우 2015년 2월 문화융합대학원장의 성희롱 사실을 신고한 학생들의 신원을 교무처에 유출하기도 했다. 학생들의 투서 역시 비밀 보장이 되지 않은 채 교수들에게 회람됐다. 이 사건은 남정숙 전국미투피해생존자연대 대표의 피해 사실과 직접 관련 있다(제1210호 사회 ‘62년생 남정숙이 미투 대모 된 사연’ 참조). 제보자의 투서에 피해자로 지목됐던 남 대표는 “익명 투서를 한 바로 다음날 투서를 한 학생들에게 학교 쪽이 조사받으러 나오라는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투서를 접수받은 센터의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문화융합대학원 학생들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일일이 대조를 한 것이다. 학생들이 너무 놀랐다며 나중에 나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각 대학의 성폭력 내규는 성폭력 사건을 처리하는 자는 해당 사건과 관련된 어떤 정보도 당사자의 동의 없이 공개하거나 타인에게 누설하면 안 된다는 ‘비밀 유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대학 내 성폭력 처리기구는 1999년 남녀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2001년 교육인적자원부가 각 대학에 성희롱·성폭력 규정을 제정하라고 권고하면서 설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후 2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대학 내 기구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 일반대·전문대 282곳 성평등상담센터를 조사(‘대학교 성희롱 성폭력 실태조사’)한 결과를 보면, 성희롱·성폭력 상담소가 별도 조직으로 독립된 곳은 전체 26%에 불과했다. 별도의 성평등상담센터가 없고 학생상담센터의 업무 가운데 하나라는 곳(39%)이 제일 많았다.

고려대나 성균관대 등 독립된 성평등상담센터 역시 피해자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대체로 교수들이 여느 학교 기관처럼 돌아가며 센터장을 맡아 학교의 다른 부속기관과 똑같이 운영되는 문제가 원인으로 꼽힌다. 교수들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인권센터 인력만 9명으로 전국 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인력을 확보한 서울대도 그렇다. ‘사회학과 H교수 사건’으로 알려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성희롱 사건과 관련해 한 대학원생은 “인권센터는 항상 교수 사회 내 권력관계라는 한계 내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인권센터의 심의 절차에 대한 타 교수들의 저항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H교수 건만 하더라도, 인권센터에 사건이 접수된 뒤 많은 동료 교수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거나 항의 전화를 하는 등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한 정황이 있다. 더구나 인권센터의 사실 조사 절차는 내부 전문위원들이 담당하지만, 인권센터가 본부 징계위원회에 올리는 징계 양정을 결정하는 ‘심의위원회’의 주축은 교수라는 점도 문제다. 징계 권고안을 결정할 때 교수들과 외부 심의위원 사이에 상당한 이견이 있고 이를 절충하는 과정에서 ‘정직 3개월’ 결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짐작된다.” H교수 사건은 인권센터가 정직 3개월로 징계 권고를 하자, 이에 반발한 학생들이 언론에 제보하면서 공론화됐다.

성폭력 가해 교수가 성폭력상담소장

지난 4월 드러난 성폭력 사건과 관련해 교육부가 실태조사를 하는 경북대는 대학원생을 상습 성추행한 교수가 2016년 대학 내 성폭력 전담기구인 성폭력상담소장(현 인권센터)을 맡기도 했다. 성폭력상담소장 임명이 별도의 자격이나 검증 절차가 없는 일반적 보직이라는 것이다. 신미영 대구여성회 사무국장은 “단체로 비공개로 접수되는 다른 대학 내 성폭력 사건을 봐도 성폭력 전담기구가 중간에서 합의를 유도하는 등 제대로 처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대학 내 성폭력 전담기구의 정상화가 ‘대학 미투’의 주요한 과제로 꼽히지만 교육부는 이와 관련해 아무런 대책도 검토하고 있지 않다. 교육부가 현재 내놓은 대책은 5월3일 사립대 교원의 성비위도 국공립대 교원과 동일한 수준의 징계를 적용하도록 사립학교법을 개정한다는 것 정도다. 교육부 관계자는 “성폭력 전담기구의 예산이나 인력을 교육부나 여성가족부가 지원해 독립기구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는 것은 알지만, 대학마다 상황이 달라 아직 구체적인 정책은 검토되지 않고 있다. 현재 전체 대학의 성폭력 전담기구를 전수조사를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문제점을 확인해 대책을 수립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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