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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협격을 당해왔다”

역사적 퇴행의 기로에서 집필 40년 만에 <화산도> 한국어 완역… 작가 김석범과 함께한 일본 현지 문학르포
등록 2016-04-09 17:09 수정 2020-05-03 04:28



 문학르포


상: 오사카
하: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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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범 작가가 <화산도>에서 묘사한 일본 도쿄 우에노역 지하도를 둘러보고 있다. 맞은편은 그와 동행한 조동현 제주4·3을생각하는모임 회장.

김석범 작가가 <화산도>에서 묘사한 일본 도쿄 우에노역 지하도를 둘러보고 있다. 맞은편은 그와 동행한 조동현 제주4·3을생각하는모임 회장.

사람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물방울이 깃든 웅덩이처럼 사람들이 고인 지하도일 때가 있었다. 빨라진 사람의 유속이 더는 ‘사람이 고일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이 사람을 밀어내는 지하도에서 사람은 다만 흐를 수 있을 뿐이었다.

우에노역 지하도… ‘상한 물’처럼 고이다

“훤해졌네….”

도쿄 우에노역(다이토구) 지하도에서 3월15일 김석범(91)이 말했다. 따각따각 바닥을 치는 구두 소리들이 고막을 두드리며 흘러갔다. 가 묘사한 1948년 그날의 지하도를 2016년의 바쁜 걸음들 속에서 읽어내긴 버거웠다. 사람이 고이지 못하는 공간은 맑고, 깨끗하며, 무취했다.

남승지(의 주인공 중 한 명)와 강몽구는 1948년 4월3일로 예정된 무장봉기의 자금 조달을 위해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오사카(제1105호 ‘평생 4·3을 쓰도록 결박된 운명’ 참조)를 거쳐 도쿄에 당도한 두 사람은 요요기역에서 지바행 전철을 탔다. 그들이 우에노역에 내렸을 때 지하도는 흐르지 않는 사람들로 고여 있었다.

“지하도 한쪽 벽으로 부랑자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누더기를 걸치고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매거나 너덜너덜한 모자로 어떻게든 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등을 구부리고 웅크린 자세였다. 대부분 추운 것이 틀림없었다.”( 3권 42쪽) 가난한 자의 성스러움을 주장하는 청년과 그를 선동가라며 꾸짖는 중년의 남자가 자신들을 비웃는 노숙인들 사이에서 논쟁을 벌였다.

남과 북에서 살지 않아 ‘살아남은 작가’ 김석범은 <화산도>를 ‘망명문학’이자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했다.

남과 북에서 살지 않아 ‘살아남은 작가’ 김석범은 <화산도>를 ‘망명문학’이자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했다.

에도시대엔 태어날 때의 신분으로 사는 지역이 정해졌다. 상인과 농민의 거주지로서 우에노는 획정됐다. 홋카이도와 동북 지역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우에노역(1883년 개통)을 거쳐 도시로 흩어졌다. 우에노 동쪽엔 청일전쟁 이후 도쿄 3대 빈민가였던 시타야 만넨초가 있었다. 우에노가 속한 다이토구와 아라카와구의 경계엔 사형장·화장장·도살장·하수처리장·유곽이 밀집했다. 패전 뒤 전쟁 피해자와 귀환군인·고아들이 우에노역 지하도로 찾아들었다. 근대 일본의 명암이 우에노로 몰려와 현대를 이뤘다. ‘도시의 결과물’이지만 ‘도시가 거부하는 것(자)들’이 우에노 주변을 부유하며 ‘상한 물’처럼 고였다.

남승지·강몽구가 우에노에 도착하기 1년 전(1947년) 도쿄도는 부랑자 1187명 중 940명을 우에노에서 파악했다. “우에노 지하도는 범죄 모의의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발진티푸스 등 전염병과 화류병의 발생 유포 지점이 됐다.”(동경도총무부조사과) 69년이 흐른 봄날의 우에노에서 그들은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지하도를 오르는 김석범의 다리 아래로 계단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천천히는 못 걷는다”며 그가 일행을 앞질렀다. 그의 눈빛과 말투와 곧은 자세는 한 세기 가까운 나이(1925년생)가 욕심낼 수 없는 에너지를 뿜었다. 수십 년 젊은 사람들과 10시간을 대작해도 술잔을 먼저 놓지 않았다. 이틀 전 오사카에서 서중석(성균관대 명예교수)은 “제주 영령들이 보살피는 것 같다”고 했다.

(2015년 10월 한국어판 완역)를 놓고 한국과 일본은 반응을 달리했다. 김석범과 동행한 조동현(68·제주4·3을생각하는모임 회장)은 물었다. “일본어판 1권(전 7권) 출간 뒤인 1983년 아사히신문사는 ‘오사라기지로상’을 줬고, 완간 뒤인 1998년 마이니치신문사는 ‘마이니치예술상’을 수여했다. 한국은 무엇을 하고 있나?”

제주4·3을 금기시해온 한국이 김석범과 를 외면할 때, 제주인들이 학살을 피해 밀항해 간 일본은 그와 그의 문학을 품었다. 한국 정부는 김석범이 한국에서 받은 첫 상(2015년 제1회 제주4·3평화상)의 수상소감(이승만 비판)을 이유로 그를 입국 금지했다. 출판사 이와나미쇼텐이 를 재출간한 일본에선 오에 겐자부로(노벨문학상 수상자) 등이 실행위원단을 꾸려 기념 심포지엄(지난해 11월)을 열었다.

아메요코… “찢긴 나라의 국민은 되지 않겠다”
미군 제품을 파는 암시장에서 출발한 아메요코 상가.

미군 제품을 파는 암시장에서 출발한 아메요코 상가.

우에노역을 빠져나온 김석범이 ‘아메요코’(アメ橫)를 지났다. 도쿄엔 오사카 다음으로 많은 조선인들(1920년 548명→1925년 1만818명→1935년 5만3556명→1942년 12만2135명)이 살았다. 재일 4·3 유족 수도 오사카(‘4·3희생자 신고서’에 따르면 전체 570명 중 129명)의 뒤(59명)를 이었다. 도쿄의 조선인들은 긴자선 철도공사 현장에서 토목노동자로 일했다. 석탄 하역, 고무·피혁 공장, 넝마주이가 그들에게 밥을 줬다.

아메요코 상가 입구 JR선(1987년 옛 일본 국철이 7개로 나뉘어 민영화된 철도) 아래로 작은 가게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철도를 지붕 삼아 비를 피하던 가난한 사람들이 철도를 머리에 인 채 장사하며 상가를 이뤘다. 우에노의 재일동포들도 아메요코에 생계를 의탁해왔다. 미국 제품(‘아메’는 아메리카를 의미)을 암거래하며 제주인들은 가시 돋은 운명의 덤불을 헤쳤다. 조동현은 오사카 이쿠노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살다 우에노로 이사했다. 중학생이 될 때 아메요코로 아들을 데려온 어머니는 한국 사람에게 밀수시계를 구입해 입학선물로 줬다. 우에노엔 아메요코에서 돈을 벌어 성공한 제주인들도 있다. 그들이 소유한 모텔과 식당, 건물 등을 짚어가며 조동현은 “상인조합에서도 제주인들을 무시 못한다”고 전했다.

“본토에 거주하는 제주도 출신자 중에는 본적을 바꾸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지방 차별이 강한 본토에서는 옛날부터 그랬지만, 제주도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소위 출세에 지장을 받았다.”(2권 307쪽)

제주는 차별의 섬이었다. 한국의 이방이었고, 육지의 식민지였다. ‘제주인’이면서 ‘재일’은 이중의 굴레였다. 동포로부터 차별받는 섬과 이민자로서 차별받는 섬나라를 오가며 그들은 다만 살기 위해 도항(1934년 소작농의 77.8%)하고 밀항했다. 제주에 있든 일본에 있든 4·3 이후 제주인들에겐 ‘빨갱이’란 집단적 오명이 씌어졌다.

제주인이자 재일이면서 ‘조선적’인 김석범은 첩첩의 장벽 앞에서 글을 썼다. 일본 패망 뒤 귀국하지 않은 한인 모두를 일본은 조선적(1970년 29만여 명→2015년 3만3939명)으로 등록했다. 옛 피식민 백성에게 패망제국은 자신이 지워버린 나라의 국적을 부여했다.

조선적들이 한국적으로 옮겨가고, 북송을 선택하거나, 일본으로 귀화해도, 김석범은 ‘존재하지 않는 나라’를 고집했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도 ‘공화국 인민’도 아닌 분단 이전의 ‘조선인’으로 살았다. “언젠가 북·일 수교로 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북한 국적을 갖게 되면 조선적엔 나처럼 분단을 인정하지 않는 ‘무국적자’의 정체성만 남을 것이다. 찢긴 나라의 국민은 되지 않겠다. 나에게 조선은 국적이 아니라 나를 드러내는 기호다.”

남승지·강몽구는 여관들이 밀집한 거리로 들어가 제주인이 운영하는 ‘춘천장’에 묵는다. “여기 작은 여관이 많았다. 우에노가 교통이 편리하니까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이쪽에서 짐을 풀곤 했다. ‘춘천장’도 이곳이라고 봐야지.”

아메요코 인근에서 김석범이 숙박업소가 밀집한 거리를 살폈다. 여관들이 몰려 있던 자리엔 모텔과 소형 체인호텔이 들어서 있었다.

사람이 고이는 곳마다 냄새가 따라와 고였다. “우에노 지역은 조선의 음식점이 밀집해 있는 곳이었다. 그 외에도 고기를 덩어리째 파는 조선식 정육점과 어물전, 식료품점, 포목점 등이 있어서 오사카의 이카이노 조선시장을 축소해놓은 분위기를 풍겼다.”(3권 46쪽)

조선식당 골목…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망각
<화산도>의 등장인물 남승지·강몽구가 우에노에서 묵은 것으로 설정된 옛 여관 거리. 지금은 소형 호텔과 모텔 등이 들어서 있다.

<화산도>의 등장인물 남승지·강몽구가 우에노에서 묵은 것으로 설정된 옛 여관 거리. 지금은 소형 호텔과 모텔 등이 들어서 있다.

남도 북도 선택하지 않은 김석범은 “남에서는 반정부분자, 북에서는 반혁명분자로 취급하는 정치적 협격(협공)”(한국어판 작가의 말)을 당해왔다. 는 그 ‘협격’ 속에서 쓰였다.

김석범은 1951년 일본공산당을 탈당했고 1968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탈퇴했다. 그는 문학으로 정치와 치열하게 대결했지만 문학이 정치의 하부로 복무하는 것은 참지 못했다. “북한이 어디 사람 살 곳인가. 나는 남에 있었어도 죽었을 것이고, 북에 있었다면 총살당했을 것이다.”

남과 북은 필요에 따라 그를 공격하거나 회유하려 했다. 제주4·3평화상 사태 때 한국 보수언론들은 (조총련 기관지) 기자 경력(1960년대)을 들어 그를 “북의 대변자”라고 공격했다. “선생이 조총련과 북한을 비판하다 요주의 인물이 된 게 언제인데 실상도 모르고 딱지를 붙인다”고 조동현은 답답해했다. “1998년 제주4·3 50주년 때 조총련이 나한테 선생이 관여하는 행사엔 나가지 말라고 요구했다. 왜 그와 어울리냐며 ‘금족령’을 내렸다. 북한의 일인독재를 비판하는 그는 조총련의 눈 밖에 난 지 오래다.”

밝고 깨끗한 건물들 사이로 좁고 후미진 골목들이 생선 가시처럼 붙어 있었다. 가시들 틈마다 재일 제주인들이 운영하는 한 뼘짜리 가게들이 발라먹고 남은 살점같이 파리했다. “여기는 변화가 없는 곳이야. 이런 골목에 숨어들어 막걸리 먹고 말이지.” 두 사람은 지날 수 없는 좁은 통로에 몸을 붙이며 김석범이 말했다.

아메요코의 조선인들이 밀수품 암거래로 생존을 구할 때, 조선식당가의 조선인들은 밀주와 음식을 팔며 우에노에 스몄다. “이카이노에 비하면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막걸리 등을 놓고 파는 식당 겸 술집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시장이라고 하기는 어려”(3권 46쪽)운 골목이었다. ‘호루몬’(일본인들이 먹지 않던 소·돼지 내장)을 굽는 술집과 김치·떡국을 파는 가게들이 여전히 골목에서 불을 밝히고 손님을 받았다. 그 음식 맛과 냄새는 감출 수 없는 ‘출신’을 드러냈다.

그 ‘출신의 땅’으로부터 김석범은 하나의 신념 체계만을 강요받았다. 남한인도 북한인도 일본인도 아닌 자로서 김석범은 ‘교조적인 것’을 향한 강한 거부감을 에 새겼다. 작가의 분신인 주인공 이방근은 ‘다른 생각’을 허용치 않는 두 극단의 가치와 끊임없이 갈등한다.

“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붉은 비단 천으로 덮은 진리의 제단을 받들고 그 앞에서 절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실적인 노동자, 농민들이라기보다도, 하나의 관념적인 실태, 머리 위로 솟아오른 절대 진리의 신이었던 것이다.”(5권 259쪽)

역사 해석을 독점하며 ‘애국적 일치단결’을 요구하는 남한 정부의 폭력성도 김석범은 견디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을 사랑한다면 역사를 제대로 알고 사랑해야 한다. 그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이승만이 어떻게 건국의 아버지인가. 4·3의 완전한 해방은 해방 공간의 재평가와 맞물려 있다.” 제주인들은 ‘한없이 죽음에 가까운 망각’ 속에서 살아왔다.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죽여온 사람들이었다.

김석범이 흐린 하늘을 올려다봤다. 우에노공원(일본 최초의 서양식 공원) 위로 까마귀가 날며 악악 울었다. 1942년 일본으로 유학한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당숙 윤영춘과 우에노공원을 걸으며 시와 조선을 이야기했다. 윤동주가 걸었을 길을 중국인 관광객들이 걸으며 피지 않은 벚꽃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까마귀는 제주에 “아주 많은 새”였다. 제주의 까마귀들은 “흐린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시커먼 화산암으로 만들어진 해안의 방파제 주변에 앉아”(1권 300쪽) 있곤 했다. 까마귀는 전편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제주인들의 탁한 운명을 예고했다. 학살을 피해 밀항한 제주인들은 일본에서조차 숨죽이며 ‘가매기 모른 식게’(까마귀도 모르게 지내는 제사를 뜻하는 제주 방언)를 지냈다.

우에노공원…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문학”
우에노공원에 출입 금지당한 노숙인들의 짐꾸러미가 공원 옆 인도에 줄지어 놓여 있다.

우에노공원에 출입 금지당한 노숙인들의 짐꾸러미가 공원 옆 인도에 줄지어 놓여 있다.

“내가 조국의 남이나 북의 어느 한쪽 땅에서 살았으면 도저히 쓸 수 없었던 작품들이다. 원한의 땅, 조국 상실, 망국의 유랑민, 디아스포라의 존재, 그 삶의 터인 일본이 아니었으면 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한국어판 작가의 말)

남과 북에서 살지 않아 ‘살아남은 작가’ 김석범은 를 ‘망명문학’이자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했다.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의 삶처럼 그의 문학도 특정 국경선 안에 갇히길 원치 않았다.

공원을 걷는 김석범의 눈에 노숙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없는 공원은 청량했다. 2000년대까지 우에노공원은 집 없는 자들이 텐트를 치고 거주한 ‘마지막 집’이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땐 최대의 이재민 피난소가 됐다. 1948년부터 1956년까지 도쿄 내 ‘부랑자’와 넝마주이·일용직노동자들이 공원에서 ‘아오이부락’을 형성하고 살았다. 부락민 300여 명 중 절반은 조선인이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을 피해 온 이란인들이 이주노동을 하며 공원의 ‘노숙 가족’이 되기도 했다. 2010년 도쿄도가 우에노 재생정비 사업으로 텐트촌을 철거하면서 공원에 ‘고인 사람들’도 치워졌다.

91살 김석범은 ‘현역 작가’다. 최근 쓴 중편소설이 지난 1월 에 발표()됐다. 그는 ‘ 이후’도 200자 원고지 1200장짜리 장편소설(·미번역)로 썼다. 제주를 탈출한 남승지와 이유원(이방근 여동생)의 일본 생활을 그렸다. 를 완독한 독자들을 울릴 ‘어떤 이야기’가 의 결말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는 여름부턴 이후를 에 연재(1년6개월 계획)한다. 는 사실상 완간되지 않았다.

담요를 뒤집어쓴 남자가 몸을 꿈틀댔다. 우에노공원에 출입 금지된 노숙인이 공원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는 인도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공원을 두른 울타리 옆으로 노숙인들의 짐꾸러미가 줄지어 놓여 있었다. 짐 위에 붙은 경찰의 철거 계고장이 누렇게 빛바랬다. 가난이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치워져도 제거되진 않았다. 가난은 오직 가난하지 않을 때 물러갈 것이었다. 김석범이 를 끝내지 못하는 이유도 비슷했다. “4·3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야기를 완성할 때까지 김석범은 힘이 남아 있길 바랐다. “나이를 먹어도 계속 쓸 수 있으면 나는 산다. 더는 쓸 수 없을 때가 내 목숨도 끊어지는 때일 것이다. 두 때가 일치하면 얼마나 행복하겠나.”

한국  정부의  ‘4·3 역주행’  소식에


재일  제주인들은  두렵다


2003년 11월 우에노공원의 노숙인들. 2010년 도쿄도가 우에노 재생정비 사업을 단행하기 전까지 우에노공원은 집 없는 자들이 텐트를 치고 거주하는 그들의 ‘마지막 집’이었다.

2003년 11월 우에노공원의 노숙인들. 2010년 도쿄도가 우에노 재생정비 사업을 단행하기 전까지 우에노공원은 집 없는 자들이 텐트를 치고 거주하는 그들의 ‘마지막 집’이었다.

재일 제주인들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그들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4·3 희생자 재심사 추진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가 일본에서조차 숨죽여 살았던 그들의 비통을 되살리고 있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무서워하며 살았다. 4·3이란 말도 못 꺼내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한국 역사가 퇴행하면 우리에게 위해가 미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여전히 두렵다.”(오광현 재일본제주4·3희생자유족회 회장)
지난 3월13일 일본 오사카 이쿠노 재일한인기독교회관에 100여 명이 모였다. 작가 김석범과 시인 김시종(로 지난 1월 제42회 오사라기지로상 수상)이 청중 속에 있었다. 김시종 시인도 4·3 때 체포를 피해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
한국에서 온 서중석 성균관대학 명예교수가 ‘한국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제주4·3’을 강연했다. 그는 2000년 4·3특별법 공포 뒤 출범한 4·3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해왔다. “행사 개최 자체가 재일 제주인들 위기감의 표현”이라고 문경수 일본 리쓰메이칸대학 교수는 말했다.
2017년부터 사용될 국정교과서의 제주4·3 서술 방향을 서중석 교수가 예측했다. 국정교과서가 교학사 교과서의 서술을 따르거나 논쟁이 벌어지지 않을 만큼 무의미한 수준으로 축소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학계 비판을 받아 수정하기 전 교학사 교과서는 민간인과 경찰·우익인사의 희생을 동일하게 표현(“무고한 민간인의 많은 희생이 있었고 많은 경찰과 우익인사가 살해당하였다”)했다.
무장대 이덕구 사령관(1948년 6월 제주 관덕정 광장에 주검으로 전시)의 조카 이복숙(80)씨는 오사카 이쿠노로 밀항해 숨어 살았다. 누가 잡으러 올까 겁나 제주 출신이란 말도 잘 하지 못했다. 52년 만인 2008년 3월에야 울며 학살을 이야기(제704호 특집 ‘오사카의 증언 “학살의 섬에서 살아남았다”’ 참조)했다. 유족회장의 10년 설득에 겨우 입을 연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특별법 제정과 진상 규명 때문이었다. 8년 뒤 오사카에서 재회한 그는 한국의 ‘과거 회귀’ 소식에 다시 말을 아꼈다. “내 운명이 그러니까.”


도쿄(일본)=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 논문 ‘도쿄 우에노의 로컬리티 형성과 이동하는 하층민’(조경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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