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006699">상: 오사카</font>
<font size="2"><font color="#991900">*‘하편’에선 도쿄 우에노를 중심으로 한 문학르포가 이어집니다.</font></font>
물빛은 흙빛이었다.
운하의 물길 위로 빗방울이 송곳처럼 꽂혔다. 빗방울에 구멍 뚫린 물이 흙 알갱이들을 퉁겨 수면으로 밀어올렸다. 흐린 하늘만큼 흐린 물이었다. 흐린 세계에서 흐린 길을 더듬으며 ‘자이니치’들은 살아왔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히라노운하…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밀항자</font></font>김석범(91)이 우산을 들고 히라노운하(일본 오사카시 이쿠노구)를 따라 걸었다. 지난 3월14일 봄비가 차갑게 쏟아졌고, 바람은 벚꽃의 개화를 막았다. “옛날엔 난간도 없었고 물도 훨씬 더러웠다”며 김석범은 기억에서 풍경을 추려냈다. 미유키다리가 운하를 가로질렀다.
그는 1961년까지 이쿠노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 미유키다리 근처엔 파출소가 있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밀항자였던 그는 순사들이 무서워 다리를 피해 다녔다. 20여 년 만에 찾은 출생의 땅에서 김석범은 알아볼 수 없는 것들 가운데 알아볼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느라 고단했다.
히라노가 구다라(백제)란 이름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바닷길과 연결된 히라노강을 따라 도래인들이 배를 타고 들어와 삶을 부렸다. 비가 오면 물이 범람해 습지가 됐다. 값싼 땅에 조선인들이 집을 얻었다. 근처 고무·유리 공장에선 일본인들이 꺼리는 힘든 노동을 조선인들이 감당했다.
김석범이 걸음을 멈추고 후미진 골목 안으로 시선을 넣었다. “저런 집에 남승지 모친이 살 거라 생각했다.” 작고 낡은 집들이 몸을 숨긴 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일층집의 뒷담이 있었고 왼쪽으로 1층짜리 연립주택 네댓 채가 있었다. 그중 한 채가 어머니의 집이었다.”( 2권 426쪽)
1948년 남승지( 주인공 중 한 명)와 강몽구는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했다. 4월3일로 예정된 무장봉기의 자금 조달 임무를 맡았다. 이쿠노의 막다른 골목에 이른 남승지는 안쪽으로부터 두 번째 집 앞에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는 ‘해방조국의 혁명’을 꿈꾸며 어머니와 여동생을 오사카에 남겨두고 귀국했었다.
지난해 10월 완역본(전 12권·보고사 펴냄)이 한국에서 출간됐다. 평생 글로써 제주4·3과 대결해온 김석범 ‘필생의 대작’이다. 한국어판으로 완성되기까지 40여 년이 걸렸다. 1976년 일본에서 연재를 시작한 는 1997년 7권(문예춘추사)으로 완간됐다. 집필하는 데만 20여 년이 걸렸고, 완역되는 데 다시 20여 년이 흘렀다. 4·3의 한이 200자 원고지 2만2천 장에 차곡차곡 쌓였다.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와 그들을 등에 업은 단독정부 수립이 4·3과 어떻게 맞닿는지를 소설은 집요하게 묻는다.
4·3은 오랜 기간 말이 허락되지 않는 철창에 갇혀 있었다. 말해질 수 없었던 4·3의 운명이 말해지지 못한 이유를 말해야 하는 의 운명을 낳았다. 그 운명의 사슬에 평생 4·3을 말하기 위해 살아가도록 김석범의 운명도 결박당했다.
4·3이 직면한 ‘역사적 퇴행’의 기로에서 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의 현장을 김석범과 찾아 걸었다. 그는 “임박감”이란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했다.
섀시로 틀을 잡은 쇠락한 집은 방치돼 비어 있었다. 남승지 어머니의 거처였을 법한 ‘저런 집’ 중엔 문세광(1974년 8월15일 육영수 저격 혐의로 같은 해 12월20일 사형)이 살았던 집(한국오사카교회 뒤편)도 있었다. 그의 목숨을 끊은 거대한 사건이 연상되지 않을 만큼 주인 없는 집은 눈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뽑지 않은 잡초들이 현관문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이 길을 지나가면 시장 전체에서 김치 냄새가 났다.”
한국 음식점들이 길 양쪽으로 펼쳐졌다. 현대식 반찬가게를 김석범은 한참 바라봤다. 남승지 어머니의 집 근처엔 ‘조선시장’이 있었다. 1920년대 초 일본은 배수를 개선하고 수송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물길을 정비했다. 조선인 징용노동자들이 동원돼 히라노운하를 건설했다. 그들이 의탁한 동포들의 가게가 조선시장의 기초가 됐다. 뒷골목에서 김치를 팔던 조선인들이 길가로 나와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 상인들은 시장에 모여드는 조선인들을 피해 상점을 빼고 떠났다.
이쿠노의 코리아타운은 히라노운하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JR선 쓰루하시역과 모모타니역 사이에 있다. 한국 가요가 흐르고, 한국말로 소통하며, 돌하르방을 세운 식당들이 거리를 이룬다. 일본인지 한국인지, 오사카인지 제주인지, 그 무엇도 아닌지 모를 거리가 식민과 피식민, 이주와 정착을 통과하며 형성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조선시장… “이념에 물든 탁한 마음들” </font></font>지난해 4월 김석범은 뜨거운 시간을 보냈다. ‘제주4·3평화상 첫 수상자’란 영예가 불덩이를 뒤집어썼다. 4·3 진상 규명과 평화·인권 운동에 쏟아온 공로를 평가해 상이 주어졌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친일파 세력으로 구성된 이승만 정부”를 비판했다. 보수 진영의 공격이 쏟아졌다.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은 “반대한민국적인 발언”이라 직격했고, 와 는 “북의 대변자”와 “대한민국 폄훼자”로 몰아붙였다. 보수단체들은 수상 취소와 4·3평화재단 해산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행정자치부는 제주도가 수상자 선정의 적절성을 감사토록 했다.
6개월 뒤 완역본 출간을 기념한 심포지엄이 서울에서 열렸다. 김석범은 참석하지 못했다. 12월5일 제주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재출간)에도 그는 없었다. 한국 정부가 그의 입국을 금지했다. 그의 국적은 남도 북도 선택하지 않은 ‘조선적’이다. 입국 때마다 발급받아야 하는 여행증명서를 한국대사관은 내주지 않았다.
“입국 허가를 준다는 대사관의 내락이 수개월 전 있었는데 출국 직전 공식 엽서를 보내 불허를 통보해왔다. 입국 금지 이유는 쓰여 있지 않았지만 뻔하지 않나. 해방 70년이 된 시대에 이데올로기에 물든 탁한 마음들이 딱하다.”
이카이노(猪飼野) 43-52. 코리아타운의 ‘제대약방’(일본인이 운영) 벽에 붙은 옛 지번 표지를 김석범이 가리켰다. “흔적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40여 년 전까지 ‘이카이노’는 이쿠노를 통칭했다.
김석범은 1925년 10월 이카이노에서 태어났다. 그를 태중에 담은 어머니가 제주에서 일본으로 밀항해 그를 낳았다. 오사카는 재일 조선인들(특히 제주 출신)의 최다 밀집지(1922년 1만여 명→1932년 10만여 명→1940년 30만여 명)였다.
“제주로부터 값싼 노동력을 도입하기 위해”(2권 394쪽) 1921년 취항한 기미가요마루호의 제주∼오사카 직항 노선 탓이 컸다. 1923년부터 10년간 조선의 전체 인구가 15% 증가했을 때 제주도 인구는 10% 감소했다. 그 기간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인은 1년에 3500명에서 3만 명 수준으로 급증했다. 이카이노는 4·3을 피해 밀항한 제주인들의 은거지였다. 1950년대엔 제주 인구의 4분의 1이 일본에 있었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이카이노는 벗어나고 싶은 땅이기도 했다. “조선인 마을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이카이노 일대는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일본인이 싫어할 뿐 아니라, 이카이노에 살고 있는 조선인 청년들도 한 번쯤은 이카이노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재일 조선인으로 태어난 반발심 때문에, 그들에게 이카이노는 민족차별과 치욕을 집약한 지역으로 여겨지는 탓이었다.”(3권 211~212쪽)
김석범이 쓰루하시역 JR선 고가 아래에 섰다. “1959년 겨울 꼬치구이 포장마차를 했던” 장소였다. 홋카이도에서 강제징용을 살았던 조선적 남자가 가끔 그의 포장마차를 찾아와 술을 마셨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김석범은 단편 를 썼다.
남승지·강몽구는 쓰루하시역을 통해 이카이노에 도착했다. ‘쓰루하시 국제시장’은 전후 암시장에서 발전한 상점가였다. “가게는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운영하고 있었지만 조선인들의 가게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2권 424쪽) 지금도 ‘올드커머’(재일 1~2세대)와 ‘뉴커머들’(1980년대 이후 들어온 한국인)이 한복과 한국 음식을 팔며 국제시장에 의탁하고 있다.
일본은 애와 증이 뒤엉킨 공간이다. 증오의 힘으로 견뎌왔지만 증오만으론 살아갈 수 없는 ‘악착의 땅’이었다. ‘재일’은 식민통치의 산물이면서 ‘재한’일 수 없는 사람들의 대안 없는 선택이었다.
“구덩이를 직접 파게 한 뒤 그 구덩이에 작은아버지를 묻어버린” 섬에서 도망친 박영만은 이카이노에 와서야 생을 구할 수 있었다.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1948년 6월 제주 관덕정 광장에서 십자형틀에 묶여 주검으로 전시)의 조카 이복숙(80)도 “이카이노 동포들이 서로서로 살려줘서” 살아남았다.
“그곳에는 한민족의 생활 원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신비한 생명력으로 계속 살아왔던 것이다.”(2권 458쪽)
1973년 일본은 이카이노를 없애버렸다. 쓰루하시, 모모타니, 나카가와, 히가시나리 등으로 떼어 부르며 이카이노란 이름을 ‘제거’했다. 조선인 마을이란 인식을 지우기 위해 이카이노는 지워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이카이노… 지워진 마을·지워진 이름 </font></font>김석범은 일본에서 제주4·3 진상 규명의 상징적 존재다. 그의 장편 (1957)은 일본에서 제주4·3을 처음 공론화했다. 1987년엔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 결성을 주도했다. 수백 명이 암매장된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의 유해 발굴 필요성도 앞장서 제기했다.
4·3 당시 김석범은 제주를 탈출한 친척을 데리러 대마도로 갔다. 경찰이 달군 인두로 지져 양쪽 가슴이 녹아버린 20대 여성이 친척과 같이 있었다. 그가 촛불 아래서 덤덤하게 들려준 이야기가 김석범을 충격했다. 이야기에 글을 입혀 첫 소설(·1957)을 쓰며 그는 ‘4·3 글감옥’에 평생을 가뒀다.
김석범의 입국 금지는 한국에서 4·3이 처한 현실과도 같다. 43년간 막혀 있었던 그의 입국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비교적 자유로워졌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다시 불허됐다. 김대중 정부 시절(2000년) 4·3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박근혜 정부는 제주도에 ‘희생자 재심사’를 압박하고 있다. 국정화된 역사 교과서가 4·3을 왜곡할 것이란 재일 제주인들의 우려도 크다(‘하편’에서 계속). 김석범은 “나에 대한 비난은 박근혜 정부의 4·3 흔들기와 무관치 않다”고 했다.
이쿠노구에서 ‘소카이도로’(태평양전쟁 때 미군 공습에 대비해 주민들을 소개한 거리)를 타고 북쪽으로 달리면 JR선 모리노미야역이 나온다. 역의 대각선 방향으로 오사카성(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3년 건립)이 눈에 잡힌다.
“이 주변의 잡초가 무성한 광대한 부지는 전쟁 중에 육군 병기공장이 있던 자리로, B29의 집중적인 폭격을 받은 지역이었다. …당시의 거대한 공장 건물들은 녹슨 철골만을 드러낸 채 폐허로 변해 있었다.”(2권 471쪽)
를 쓸 때 폐허였던 병기공장터는 현재 오사카성공원으로 바뀌어 있다. “그전엔 출입 금지 구역이었다”며 김석범은 ‘살상무기의 옛집’을 처음 밟았다. “동양 최대의 병기공장이라고 했다. 여기 있던 무기로 동양 사람들 죽인 것 아닌가.”
병기창 너머엔 ‘아파치 부락’(일본 경찰이 조선인들을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부르던 명칭)이 있었다. 밤이면 조선인들이 폭격 맞은 병기공장 안에 숨어들어 고철과 군수품 부스러기를 주워다 팔았다.
“26일 점심때를 지나 방송국 앞의 넓은 십자로 주변에 모인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갑자기 타~앙 타~앙 하고 큰 소리로 파열하는 총소리를 들었습니다.”(6권 265~266쪽)
이카이노의 여동생 말순은 제주로 돌아간 남승지에게 1948년 4월24일 ‘한신교육투쟁’(고베 시위 참가자 1664명 검거)을 전한다. 미군정의 조선학교 폐쇄 명령에 분노한 동포 3만여 명이 오사카부청(오사카성 맞은편) 앞 오테마에공원에 모여 항의 집회를 열었다. 4월26일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조선학교의 16살 학생 김태일이 죽고 27명이 다쳤다. 에서 말순이 보고 들은 내용은 현실에서 김석범 자신이 겪은 일이었다. 그와 시위대는 지사 면담을 요구하며 부청 진입을 시도했으나 저지당했다. 당시 오르지 못한 부청 현관을 오르며 김석범이 70년 전을 회고했다.
“곤봉 들고 쫓아오는 경찰을 피해 풀숲에 몸을 던졌을 때 옛 오사카 NHK 건물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지사 면담이 불발되면서 시위가 확산됐다. 면담이 성사됐다면 김태일은 죽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카이노엔 소학교 2곳과 중학교 1곳의 조선학교가 남아 있다. 김석범이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에 들어갔을 때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가 교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김석범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우리말 알아들어?” 아이가 씩씩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1960년대 지어진 낡은 교사 벽엔 표어 같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나도 우리말을 쓰고 동무도 우리말을 쓰자.”
학교를 나온 김석범이 눈자위를 문지르며 말했다. “아이들한테 무슨 죄가 있나. 사면초가 속에서도 우리말 교육을 지켜내고 있는 거다.”
오사카조선제4초급학교와 좁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본 학교 ‘미유키모리소학교’가 있다. 조선학교엔 없는 수영장과 강당을 갖췄다. “이 학교의 90%가 재일동포 자녀들인데 한국 이름을 사용하는 아이들은 10%밖에 안 된다”고 후지이 고노스케(이카이노 샛바람문고 대표)는 전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오사카부청… “누가 불의한가”</font></font>김석범은 4·3평화상 사태를 다룬 글을 (일본 이와나미쇼텐 출판사가 발행하는 월간지) 2016년 3월호와 4월호에 발표했다. “2015년 10월 현재의 입국 거부가 70년 전의 역사 문제에 기인한 것인가. 이승만 정권 비판에 대한 현 정권의 제재란 말인가. 1987년 헌법 전문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의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기돼 있다. 여기서 ‘불의’는 이승만 정부를 가리킨다.”
글의 제목은 ‘마지막 한국행’이었다.
오사카(일본)=<font color="#008ABD">글</font>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font>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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